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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97화 (97/463)

97화

눈썹이 하늘로 치솟은 봉검 장로가 노기 어린 눈으로 공지량을 돌아봤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알겠다.

적 수장의 발을 묶기 위해 죽을 게 뻔한 데도 제자들을 돌격시켰다.

그리고 아군의 피해를 아랑곳하지 않고 상노를 쏘아붙였다.

거대한 코끼리에게 쏜 3발은 정확히 명중했다지만, 7발의 화살은 거한의 주변에 어지러이 꽂혀 있었다.

당연히 그에게 달려드느라 근접해 있던 제자들도 상노의 파괴력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천하 구파의 수장이란 자가 어찌 이런 악독한 짓을…!’

아군을 미끼 삼는 잔혹한 지휘에 봉검의 수염이 푸들푸들 떨렸다.

‘나중에. 지금은 안 되오. 봉검 장로.’

입술을 꽉 깨문 운검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자신들에게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점이다.

반대할 걸 예상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막상 전쟁이 시작되면 어쩔 수 없이 지휘에 따를 것이란 점까지 계산한 게 틀림없다.

전투 중에 내분을 일으킬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 비열함에 노기가 치밀지만, 현시점에서 봉검과 운검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뻔히 알면서도 유용한 장기짝으로 이용당할 뿐.

‘완전히 잘못 보았구나.’

자신들이 틀렸다.

장문인은 이미 정도를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봉검과 운검이 앞으로 나섰다.

“오는군. 봉검대는 파봉진을 준비하라.”

“허어. 이건… 정말 엄청나구먼. 운검대도 수운진을 펼치시게.”

피도 눈물도 없는 사파나 마도 나부랭이들이 할 짓을 벌이지만, 전황을 읽는 능력만큼은 탁월하다.

공지량의 예측 그대로.

전장 전체를 떨쳐 울리는 무시무시한 살의가 앞으로 치닫고 있었다.

‘우둔한 땅…….’

단순한 힘 싸움이라면 이토록 고전할 리 없다.

그저 진형에 의존한 집단 백병전이 벌어지리라 예상했거늘.

처음 접하는 전략 병기들이 쏟아져 나왔고, 대처법을 알지 못하는 와족으로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전략을 들고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인으로서의 긍지마저 버리고 오직 승리에 집중한 적들에 비해 자신들은 너무나 순진했다.

‘매서운 눈…….’

적들의 진형 한복판에 고립되어버린 나무표범 전사들이다.

무력의 우위로 인해 아직까진 크게 밀리지 않고 있지만, 사방이 에워싸인 형국이라 빠져나오긴 어려웠다.

더군다나 그 앞을 가로막은 백에 가까운 무인들.

몸놀림을 보건대 정예 중의 정예가 분명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될 게 뻔했다.

“할아범. 전장의 지휘와 후방을 맡깁니다.”

“들어갈 거냐?”

그믐의 얼굴이 크게 굳었다.

“네. 그래야겠죠.”

“신중해라. 철저히 준비한 놈들이야. 이 시점에서 네가 움직일 걸 예측했을 거다.”

“분명히 그럴 겁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방패와 장창, 그리고 병력의 우위로 밀어붙이는 적들을 바위 곰 전사들은 뚫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둔한 땅과 긴 코가 당분간 움직일 수 없다.

전황을 타개할 강대한 무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결국 힘으로 뚫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들과 달리 우린 전사니까요.”

전사.

허리를 세운 너른 하늘은 그리 말했다.

“크르르…….”

훌쩍 뛰어오른 푸른 눈이 그 옆에 자리하자 전장의 모든 시선이 강제로 남자에게 쏠렸다.

“전사들은 나를 따르라!”

쩌렁 울리는 호령과 함께 진정한 전사의 돌진이 시작됐다.

푸콰캉!

“크아악!”

내리꽂히는 강격.

요동치는 대지.

사형제들의 고함과 비산하는 핏물.

최전선에 선 공유립은 아비규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필사적으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하압!”

저 멀리, 애타게 찾아 헤매던 낭랑한 기합성이 들려왔다.

성인들만이 자리한 전장에서 한눈에 띄는 소년병이었다.

‘찾았다!’

장창보다도 예리하게 뻗어 나가는 검날이다.

소년의 손에서 신들린 듯 터져나간 사일검이 쇄도하는 와족 거한의 어깨를 꿰뚫었다.

“흡!”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타오르는 투지가 구멍 난 어깨의 통증을 밟고 일어선다.

소년의 덩치의 몇 배는 됨직한 거한이 바위라도 깨부술 기세로 주먹을 내리꽂았다.

‘안 돼!’

“여 사형! 뒤로!”

휘리릭―

한 자루 검이 원을 그리며 부드럽게 흐른다.

유화검(柔和劍).

호남성 원가장을 대표하는 검술이 사나운 전장 한복판에 유려한 곡선을 그려냈다.

채채채챙!

검과 팔뚝이 부딪는 거라곤 믿기 어려운 충돌음이 울리고, 바위 부수기, 그 강권에 담긴 경력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주먹을 비켜낸 원승이 바위 곰 전사의 얼굴을 노렸다.

“흐읍!”

강피, 철골, 그리고 자연기.

전사의 반대쪽 팔뚝이 터질 듯 팽창하고, 날아드는 원승의 검날을 막아냈다.

그그그극!

쇠못이 철판을 긁는 듯한 기음이다.

거한의 팔뚝에 한 줄기 혈선이 남았지만, 뼈까지 갈라내진 못했다.

바위 곰 전사의 성한 어깨가 원승에게 날아들었다.

“차핫!”

섬광 같은 검격이 등 뒤에서 전사의 목줄을 끊는다.

배후에서의 급습?

전장에선 당연한 일이다.

원통한 표정의 거한이 쓰러지고, 공유립이 놀란 얼굴의 원승과 여규에게 외쳤다.

“드디어 찾았구나! 용케 철질려의 폭풍에서 살아남았어!”

최전선 정중앙.

방패와 장창의 바로 뒤에 있던 공유립이다.

위치만 왼쪽으로 치우쳐 있을 뿐, 최전선에 배치된 건 여규와 원승도 마찬가지였다.

공지량은 그들을 일부러 그곳에 배치했고, 그건 거기서 죽으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사형? 장문인이 배정한 위치가…!”

“배정한 위치? 개나 주라지! 이탈했다!”

“……!”

공 사형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가?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도리어 말문이 막힌다.

전선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허락 없이 정해진 위치를 이탈하는 건 중죄를 저지른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공유립은 손톱만큼도 신경 쓰는 표정이 아니었다.

“잘 들어라. 우린 사지에 던져졌어. 주요 무력집단이 포진한 앞쪽의 제자들은 미끼와 방패막이, 버리는 패나 다름없다.”

“……사형. 힘겹긴 하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곧 뚫린다.”

확신에 찬 어조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단호한 얼굴로, 공유립은 그리 말했다.

“그리고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건 와족만이 아니다.”

“그게 무슨….”

“곧 알게 될 거다.”

생소하다.

공유립에게 결단을 내리라 말한 것은 여규 본인이지만, 그날 이후 전장에서 만난 사형은 무언가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여규 본인이 급격한 성장을 이뤘듯.

공유립의 시간도 그날 이후로 밀도 있게 흘렀다는 걸 여규는 알지 못했다.

“나, 너, 그리고 원 사제. 우린 반드시 살아나갈 것이다. 여기 있는 사형제들도.”

“…….”

“내가 그리 만들 것이다.”

군용 병기들이 점창으로 유입되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까지도.

이, 삼대 제자들이 생소하기만 한 방패와 장창, 연노를 들고 훈련하는 것을 보며, 공유립은 전장의 흐름을 순식간에 그려낼 수 있었다.

당연하다.

지금에 와서는 몸서리쳐지게 싫은 일이지만, 자신의 핏속에는 장문인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그 머릿속을 유추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카아압!”

콰장창창!

‘유격대!’

와족의 수장 세 명이 경악할만한 무위로 철질려를 날려 보낸 게 직전이다.

곧바로 날랜 전사들이 진형을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송곳이 파죽지세로 진형을 가르는 그곳은 공유립과 여규, 원승이 위치한 좌전방이었다.

‘위치는 좋다.’

보는 순간 알겠다.

저들은 고립될 거다.

자신이 지휘자라면 반드시 그렇게 할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들을 포위하라는 장문인의 명령이 떨어졌다.

‘방패의 벽을 뚫을 수 있는 초강수가 들어올 거다. 아마도 적 수장 중의 하나. 위치는 정중앙.’

쿠콰콰콰쾅!

전장에서도 한눈에 띄는 거인과 코끼리가 무지막지한 괴력으로 방벽을 뚫는 게 보였다.

‘그대로 있었다면 휩쓸렸어.’

정확히 공유립이 있던 곳이다.

장문인은 여기까지 수를 내다본 거다.

분명 이 시점에 자신이 끝나리라 예상했겠지.

그리고 하나 더.

‘아마도… 상노.’

패애애액!

후방에서 무지막지한 화살들이 날아와 전장을 들쑤셨다.

화살에 적중된 코끼리와 거인이 피를 쏟으며 무너지는 게 보였다.

와족의 거인은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일곱 발의 화살 중 다섯 발을 피하거나 쳐냈다.

화살의 진행 경로에 있던 제자들과, 거인이 쳐낸 경력에 휩쓸린 제자들이 산산조각 나 육편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공유립은 끝까지 눈을 떼지 않고 그 처참한 모습 하나하나를 두 눈에 담았다.

‘비열한 새끼.’

자신이라면, 아니,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절대로 쓰지 않을 전술이다.

하지만 아버지라면… 아버지? 아직도 입에서 떼어내지 못했던가.

그자라면, 분명히 이렇게 하리라 예상했다.

보면 볼수록 치가 떨리는 인간이었다.

‘와족은 더 이상 쓸 수 있는 수가 없다. 이런 전개는 상상도 못 했을 거야. 그렇다면…….’

푸화하학!

산천을 뒤덮는 농염한 살기가 피어오른다.

거신의 손바닥이 대지를 짓누르듯 압도적인 패력이 전장 전체를 찍어 눌렀다.

“전사들은 나를 따르라!”

‘족장이 나온다!’

푸콰카카캉!

“으아악!”

“끄아아아! 사, 살려…!”

빨아들이듯 눈길을 휘어잡는 한 명의 남자와 야생의 살기를 휘날리는 한 마리의 짐승이 전장 한복판을 찢어발겼다.

“우오오오! 족장님을 따라라!”

상념에서 깨어난 공유립이 정면을 바라봤다.

전장에서의 사기는 이토록 중요하다.

위대한 전사의 돌격에 용기백배한 거한들이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옆에 선 짐승들도 전장의 광기에 사로잡혀 더욱 흉포하게 날뛰고 있었다.

견고한 방패의 벽에 차츰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사지임을 알면서도 이곳으로 왔다.

예측할 수 있는 전장이며, 자신이 유일하게 삶을 도모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누구도 돌보지 않는 어린 사제를 살려야만 했다.

전장에 임하여, 마침내 자신을 속박하던 모든 것을 떨쳐낸 청년이 하늘로 검을 치켜들었다.

“대 점창의 제자들은 들어라! 우리는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나를 따르라!”

쩌렁 울리는 포효는 껍질을 깨부순 자의 세상을 향한 선전포고다.

이제부턴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길을 개척하리라.

평생토록 한 번도 내보이지 않았던 진신전력을 아낌없이 개방한 공유립이 와족의 전사들을 향해 날아올랐다.

“쿠어어어엉!”

대기가 찢어져라 울부짖은 흑곰이 앞발을 쳐올렸다.

부아악!

통째로 뜯겨 나간 점창 무인 세 명의 상반신이 허공에서 휘돌고, 날아드는 창검이 텅 빈 흑곰의 가슴을 찌른다.

휘리릭!

측면에서 날아든 구렁이의 꼬리가 열 자루가 넘는 창대와 검날을 모조리 휘감았다.

우드드득!

십여 자루의 병장기가 수수깡처럼 부러지고, 틈을 놓칠세라 파고든 바위 곰 전사의 뒤돌려차기가 점창 무인의 육신에 작렬했다.

뻐어엉!

“카악!”

공격 직후의 빈틈.

눈으로 좇기 힘든 분광검이 터져 나온다.

피피피핏!

바위 곰 전사의 육신에 무수한 혈선이 그어졌다.

스륵- 쒜에엑!

바위 곰 전사를 바짝 뒤따르던 검은 수리 전사다.

자연이 선사한 경이적인 은신술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림자가 늘어나듯 순식간에 솟구쳐 오른 전사의 무릎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던 검사의 턱을 으깼다.

빠가각!

역공에 역공.

주변을 살필 여유 따윈 없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적에게 사력을 다한 일격을 쑤셔 넣을 뿐.

죽고 죽이는 살육의 광기가 전장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밀린다.’

눈을 가늘게 뜬 공지량은 전장의 흐름 하나하나를 세밀히 살피고 있었다.

강하다.

와족의 전사들은 정말로 강했다.

수많은 인원 가운데 추리고 추린 이, 삼대 제자들이다.

아직 설익은 무력을 보완하기 위해 군용 병기까지 동원했지만, 막상 전면전에 들어가니 완연히 밀린다.

두 명의 제자가 쓰러질 동안 와족의 전사는커녕 짐승 한 마리 쓰러뜨리기도 벅찼다.

‘전략 병기가 아니었다면 정말이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거야.’

특히 저곳!

전장의 한복판이 파도를 만난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하늘의 신장이라도 강림한 걸까?

심혈을 기울여 고안한 포진이 일직선으로 으깨진다.

전장의 광기조차 찍어 누르는 절대적인 무력이 전염병 같은 공포를 확산시키고 있었다.

‘당장 움직이지 않고 뭐 하는 거야? 굼뜬 늙은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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