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공지량이 인상을 찌그러뜨리기 무섭게, 붉고 푸른 섬광 두 줄기가 치닫던 살의를 가로막았다.
촤아악!
“크어엉!”
선두에서 적들을 분쇄하던 흑곰의 몸통이 사선으로 갈렸다.
잘린 절단면에는 불에 그을린 듯한 열상의 흔적이 선명했다.
퀘에엑!
“컥!”
바위 곰 전사 또한 벗의 죽음을 느낄 새도 없이 푸른 빛 창날 아래 쓰러졌다.
가슴에 남은 관통흔에는 새하얀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스르륵-
“어딜 가는가?”
창이 연이어 뻗어지고, 일직선으로 날아간 창기(槍氣)가 거리를 벌리려던 검은 수리 전사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었다.
“큭!”
희끄무레하던 전사의 육신이 땅 위에 새겨지듯 떠올랐다.
근접한 적들을 처리한 봉검과 운검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너른 하늘의 기세를 정면으로 맞받는 곳에 섰다.
“후우… 눈앞에서 보니 더 엄청나구먼.”
“그러게 말이오.”
적봉도를 든 봉검의 팔이 가볍게 떨렸다.
막을 수 있을까?
운검과 동시에 덤벼도 이기지 못한다는 건 확실하다.
현 와족의 족장은 아직 미숙했던 시절, 자신들을 패퇴시켰던 전사보다도 훨씬 더 막강했다.
게다가 저 푸른 눈의 대호.
믿기지 않게도 데리고 다니는 짐승조차 자신들보다 강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겨야만 한다.
이건 비무가 아닌 전쟁이며, 자신들이 족장을 막지 못하면 점창의 역사는 오늘로 끝이니까.
봉검대와 운검대를 모조리 동원한 합공으로 저자를 쓰러뜨린다.
봉검은 전장에 나서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자존심을 버렸다.
“푸른 눈!”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크허허헝!”
푸른 눈의 맹수가 앞으로 나왔다.
쾅!
대지를 박차는 거친 발구름과 함께,
쉬아아악!
울부짖던 맹수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흐읍!”
급격히 몸을 비튼 봉검, 그의 적봉도가 좌전방의 허공을 갈랐다.
“지금이다! 올려라!”
대장로들과 와족 족장이 충돌하기 직전.
공지량이 오른손을 휘저었다.
퍼얼럭―!
허공에서 크게 휘날리는 깃발이다.
와족 전사들이 거쳐 온 후방의 숲이 기다렸다는 듯 들썩이기 시작했다.
“장문인의 신호다! 쳐라!”
“우와아아아!”
저 복장!
외부로 내보냈던 응목대다.
와족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창산으로 오는 길목에 깔아놨던 응목대원들이 어느새 집결해 뒤를 잡고 있었다.
‘문산에서부터의 일직선 돌파. 빈 공간을 더듬어 뒤를 쫓아온 거겠지.’
등을 돌린 그믐이 비탈 아래를 내려다봤다.
너른 하늘은 전장에 뛰어들었고, 전사들 또한 그 뒤를 따라 전원 돌격해 들어간 상황이다.
후위를 방어할 어떤 병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대로 뒤를 잡힌다면 순식간에 무너질 게 뻔했다.
‘이 흐름……. 모두 계산된 것이었나.’
이제야 알겠다.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딱딱 맞아 들어가는 이 상황.
전부 의도된 것이다.
적중에 굉장한 책사가 있는 게 분명했다.
‘허… 완전히 농락당했군.’
전략이나 전술과는 거리가 먼 와족이다.
기껏해야 소규모 교전에서 적의 허를 찌르기 위한 기책을 사용할 뿐이지, 이런 대규모 전장을 뜻대로 이끌 수 있는 책사는 와족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중원을 왕래하며 방대한 지식을 쌓은 그믐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심하구나. 연륜 있는 척, 세상에 대해 아는 척은 혼자 다 해놓고서…….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족들이 쌓아 올린 전쟁의 결과물을 등한시하다니…….’
전장을 쥐락펴락하는 전술과 온갖 종류의 전략 병기.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두 번 세 번 조심했어야 했다.
무거운 후회가 밀려왔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 그저 할 수 있는 바를 다할 뿐.’
그믐이 뒷짐 진 손을 풀었다.
“헉!”
“저, 저 노인!”
비탈을 치달아 오르던 응목대 사이에 커다란 소란이 일었다.
“회, 회효! 그 괴물 같은 장로입니다!”
“신평에 파견한 제자들을 전멸시켰다는 그 자인가…!”
“30년 전 전쟁에서도 신들린 듯 날뛰었다고…!”
펄럭-! 퍼얼럭―!
검은 장막이 내리쬐는 햇빛을 차단한다.
허공에서 날갯짓하는 거대 올빼미는 의심할 여지없는 그의 상징이었다.
“두려워 말라! 우리가 야만인 놈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겨야 한다! 세 갈래로 나뉘어 전진한다!”
촤아악!
조장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떼 지어 돌격하던 응목대가 순식간에 세 집단으로 나뉘었다.
첩보와 정찰, 암습을 담당하는 조직의 특성상 가장 많은 인원을 보유한 게 응목대다.
운남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진 전투와 와족의 진격로를 막아섰던 대원들의 몰살로 숫자가 급감했지만, 여전히 이백이 넘는 인원이 달려오고 있었다.
‘중앙은 나. 좌우는 전사들에게 달려들 셈인가.’
이백이 넘는 정예라도 저들만으로는 어둔 날개와 함께하는 자신을 제압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리라.
조장급 몇 명과 수십의 대원으로 자신의 발을 묶고, 나머진 전사들의 후방을 들이칠 속셈인 게 분명했다.
‘네놈들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도 나름 준비를 했느니.’
적당한 때를 가늠하던 노장의 입술이 달싹였다.
“지금! 일어서라, 수리의 눈!”
후아악―! 퀘에엑!
땅거죽이 뒤집어지며 전사들이 솟구쳐 오른다.
지상을 달리던 응목대원들이 하반신과 척추가 부서지며 무너져 내렸다.
“컥!”
“크학!”
“뭐, 뭐냐 이놈들은?!”
야생곡에서 바위 곰 전사들을 급습한 땅 밑의 암습자들.
중원에 지둔술이 있다면, 와족에는 두더지 굴이 있다.
개전 이래로 벗들과 함께 땅속에 은신해 있던 검은 수리와 흰 수리들이 침묵을 깨고 땅 위로 치솟았다.
“한 놈도 지나가지 못한다. 쓸어버려라, 어둔 날개!”
당연히 뒤통수를 노리는 적들이 있으리라 예상했다.
너른 하늘은 후방을 맡겼고, 자신은 그 요청을 받았다.
그렇다면.
한 놈도 놓치지 않는다.
“삐이익-!”
소매를 걷어붙인 노장이 하늘을 거니는 벗과 함께 적들에게 쇄도했다.
“가자!”
마룡봉에서 내려다본 좌측.
매서운 눈과 나무표범 전사들이 분투하는 전장에서도 멀찍이 떨어진 숲속이다.
숨소리까지 죽인 채 은신해 있던 남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직 때가 아닙니다, 대사형. 장문인의 신호가…….”
옆에 앉아 있던 호국영이 당황한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신호가 떨어지면 측면을 들이치라는 명을 받고 대기하던 참이다.
하지만 공유환은 만류하는 호국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고 꽤 시간이 흘렀어. 모든 게 장문인의 예상대로 흐르고 있다. 야만인 놈들은 분단되었고, 적 수장급도 한 명이 쓰러졌다. 대장로들과 족장이 충돌하고, 후방에서 응목대가 뛰쳐나왔다.”
‘그래. 순조롭게 흐르고 있지. 우리가 끼어들 필요 없이 이대로 끝나버리는 게 최선이고. 왜 조급해하는 거지?’
호국영은 공유환의 심중을 짐작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아니지. 이유 따윈 몰라도 된다.
무조건 막아야 했다.
“대사형. 저흰 사전에 지시받은 대로 상황이 위급해질 경우에….”
“닥쳐라! 이대로 가면 아무것도 못 하고 전쟁이 끝나버린단 말이다!”
‘공을 세우고 싶은 건가!’
호국영이 일그러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이 머저리가 적들의 힘도 모르면서…!’
공유환은 빼앗은 땅에서 소수부족들을 내쫓는 안전한 일만 맡았을 뿐, 와족의 수장급이나 전투 부대를 마주친 적이 없다.
너른 하늘과 그믐, 마른 비까지 두루 접해본 호국영은 절대로 전장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적들의 무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행여나 족장을 마주치면…!’
겨울 달을 이용한 자신을 본다면?
절대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그의 시야에 잡히는 순간, 자신의 인생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대, 대사형! 전쟁에서 맡은 임무와 배정된 위치는…!”
“닥치라고 했다.”
공유환의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호국영을 노려봤다.
‘공을 세워야 한다. 공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확고한 전공 말이다!’
내 아들은 너뿐만이 아니라는 아버지의 말.
다시없을 충격이었다.
공유립을 공개적으로 두들겨 패도 방관한 아버지의 태도에 안심했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더군다나 빌어먹을 서출 놈은 무슨 생각인지 자청해서 최전선으로 갔다.
수많은 제자들이 놈의 용기와 솔선수범하는 자세에 감격한 건 물론이다.
‘그놈, 무언가가 변했어.’
장문전 집무실을 찾았을 때의 눈빛과 태도.
자신이 아는 공유립이 아니었다.
절대 그럴 리 없지만, 만약 놈이 살아남는다면.
그리고 자신은 안전 지역에 웅크린 채 아무런 전공도 세우지 못하고 전쟁이 끝난다면.
차기 장문인 자리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매 순간 들끓는 욕망을 채워왔던 동물적 본능이 말한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고.
공유환이 뒤에 늘어선 제자들을 돌아봤다.
“우린 무인이다! 사문을 침범한 적들에게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전쟁을 끝낼 것이냐! 용감한 점창의 제자들은 일어서라! 나, 공유환이 너희들을 이끌 것이다!”
“우… 우, 우와아아!”
‘빌어먹을!’
여기 있는 누구도 공유환의 의지를 거스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호국영 또한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장에 이변이 감지되는 순간이었다.
난입
“가자!”
“우오오! 대사형을 따라라!”
숲이 흔들린다.
일단의 병력이 숲을 빠져나와 전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칼끝은 적의 유격대가 고립된 곳, 와족의 수장 중 하나라고 짐작되는 사내가 아군의 머리를 짓밟으며 날뛰는 지점을 향해 있었다.
“아니?! 유환이, 저 녀석이!”
공지량의 눈썹이 꿈틀댔다.
‘기껏 안전한 곳에 배치해 두었더니만, 왜 뛰쳐나온 거냐?’
명을 어긴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감히 자신의 아들에게 누가 뭐라 할 것인가.
그가 뛰어들려는 전장의 위험도가 문제였다.
선두에서 달리는 공유환은 검을 하늘 높이 쳐들고, 뭐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마치 용맹한 장수가 병사들을 독려하는 것처럼.
보기에는 좋지만… 그가 향하는 방향은 영 좋지 않았다.
‘설마 저 야만인 놈에게 달려들려고?!’
흉포한 표범을 연상케 하는 사내가 전장을 휘젓고 있었다.
땅에도 내려오지 않은 채 두 발만으로 제자들의 머리와 어깨를 짓이기며 날뛰는 모습은, 드넓은 전장에서도 한눈에 들어올 만큼 압도적이었다.
‘최소 동수. 아마도… 근소한 차이로 나보다 위일 확률이 높다.’
매서운 눈에 대한 공지량의 솔직한 평가였다.
족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와족 삼대 무력단체의 수장들은 하나같이 괴물들이었다.
무력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을 떨쳐내기 위해 불철주야 수련에 매진했음에도 이렇다.
여휘, 봉검, 운검, 야만족의 족장… 하다 하다 이제는 그 밑의 수하들까지도!
하늘은 빌어먹게도 불공평했다.
저 위에 진정 만물을 굽어살피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면,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그리로 가면 된다!’
적장을 향해 기세 좋게 달리던 공유환은 악귀처럼 날뛰는 사내를 보고 흠칫하더니, 와족 유격대의 측면을 격파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좋아. 아주 좋은 판단이다. 저자에게만 가지 않으면 돼. 원래는 전장이 안정된 후에나 부르려 했거늘. 전공을 세우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유환이 차기 장문인으로 자리매김하려면 숨어만 있어선 안 된다.
하지만 위험한 전장에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적들의 힘을 충분히 빼놓고, 위험 요소를 제거한 후에 확실히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전장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들놈은 애가 탔는지 명령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뛰쳐나왔다.
혼쭐을 내야 마땅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수장이 될 자로서 적당한 패기를 보여주는 건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설혹 병력이 전멸하더라도 전장에서 지휘를 해보는 건 좋은 경험이도 하고.
유환만 살아남는다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더군다나 전장의 흐름을 나름 잘 읽고 있다.
후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응목대를 보며, 자신도 와족의 유격대를 정리하기 위해 움직이려던 참이니까.
지금 가장 먼저 끊어내야 할 것은 저쪽이 맞았다.
“지 대주. 상노와 연노 부대의 지휘를 부탁하네.”
적들은 사방이 둘러싸인 채 서서히 고사하고 있었고, 이쪽은 아직도 투입할 병력이 남아 있다.
적들이 전멸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빠르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고, 호검대만으로는 결정적인 무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공지량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아들의 근처에 머무를 겸 직접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칠검(七劍)은 나를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