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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99화 (99/463)

99화

점창 칠검.

공유환과 공유립을 제외하고 공지량 본인이 직접 가르친 일곱 명의 일대 제자들이다.

경험을 쌓기 위해 중원행을 내보낸 시기를 제외하면, 그들이 문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걸 막기 위해 항상 곁에 두며 자신의 호위를 맡겼다.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칠검이라는 허명을 붙여주고, 모든 면에서 최상의 대우를 해줬다.

권력이나 자신만의 세력이 없을 뿐, 아직 경험이 일천한 공유환, 공유립과 달리 그들은 노련한 검사들이었다.

“네. 장문인. 밀리는 전장에 노를 쏟아 붓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지석인의 대답을 뒤로 하며 전장에 내려온 공지량이다.

매서운 눈과 나무표범 전사들을 잡기 위해 좌측의 전장으로 향하던 그가 멈춘 건, 거대한 올빼미가 전장 끄트머리에 내리꽂힌 순간이었다.

“삐이익―!”

맹금류의 그것과 같은 울음소리가 울리고, 와족의 후방을 향해 달려가던 응목대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아악!”

“크아아아악!”

눈에 보이지 않던 와족의 병력들이 땅거죽을 뚫고 뛰쳐나왔다.

비탈길을 치닫던 응목대가 암습에 속수무책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이런…! 숨겨둔 병력이 있었던가!”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문제없다.

응목대의 후방 급습은 결착을 앞당기는 수일 뿐이다.

시간이 걸릴지언정 이대로 진행해도 와족을 잡는 데는 큰 무리가…….

“음?!”

이백의 응목대가 전멸한 지점.

팔뚝까지 시뻘겋게 물든 누군가가 등을 돌렸다.

호위하듯 하늘에 떠 있는 거조.

그리고… 저 얼굴!

“저자는…!”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철질려를 되돌려 보낼 때는 족장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가려져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30년 전 악몽 같은 무력으로 전장을 휩쓸었던 그자!

와족의 장로 회효가 전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저기 있었나…!”

일체화는 마른 비만의 기예가 아니다.

그믐은 본격적으로 손을 쓰기 전까지 의도적으로 기척을 죽이고 있었고, 그가 작심하고 전사들의 기파에 스스로를 동조시키자, 눈으로 보고도 존재를 잡아내기 힘들었다.

마른 비의 일체화와 궤는 다를지언정 주변 환경에 녹아드는 기술의 깊이만큼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후방은 정리했다! 뭘 아직도 미적대고 있는 게야? 지금부터 적진을 돌파한다! 따라와라, 햇병아리들아!”

쩌렁 울리는 노장의 일갈이다.

힘겹게 전선을 밀어내던 전사들의 육체가 다시금 뜨겁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우오오오! 할아범!”

“그믐 할아범이 나선다!”

“할아범의 뒤를 따라라!”

점창만이 아니다.

와족의 전사들 사이에서도 그믐은 살아 있는 전설이나 다름없다.

너른 하늘이 정점에 이른 태양이라면, 그믐은 이미 창공을 가로질러 온 세상을 짙게 물들이는 석양과 같다.

전사들에게 미치는 영향력만큼은 너른 하늘보다도 위인 남자가 그믐이었다.

그가 앞으로 나서자 와족의 사기는 끝 간 데 없이 치솟기 시작했다.

“밤일도 부실한 노인네 뒤꽁무니나 따를 참이냐! 할아범보다 뒤처지면 죄다 고자라고 불릴 줄 알아라!”

힘이 난 거친 모래가 전사들을 독려했다.

“저 새끼가?”

눈을 한 번 흘겨준 그믐이 호기롭게 외쳤다.

“애송이들! 죄다 고자로 만들어주마! 먼저 간다! 어둔 날개!”

“삐익-!”

쏜살같이 날아든 어둔 날개의 다리를,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보지도 않고 붙잡는다.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은 그믐이 적들의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눈깔을 막아선 것들과 비슷한 기세를 뿜는 놈들!’

와족의 입장에서 좌측, 마룡봉을 기준으로 우측 전장에는 호검대와 쌍벽을 이루는 풍검대가 대기 중이었다.

“어둔 날개! 저기다!”

벗의 발목을 놓은 그믐이 매섭게 하강했다.

빠박!

어리둥절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던 풍검대원 두 명의 얼굴에 발차기가 꽂혔다.

‘이놈들의 숫자를 줄여야 전사들의 돌파가 가능하다!’

대지에 발 디딘 그믐의 자세가 한없이 낮아졌다.

훅-

오른손으로 몸을 지탱한 그가 수평으로 몸을 띄웠다.

‘횡, 중선오격!’

수직으로 뻗을 다섯 번의 발차기를 횡으로 분배한다.

목표는 명치. 한 명당 한 발.

거침없이 내지른 족격에 전방에 위치한 다섯 명의 검사가 허물어지고, 빙글 돌린 몸을 왼손으로 지탱하니 또다시 다섯 번의 발차기가 후방으로 뻗어진다.

적진 한복판에 떨어져 내린 그믐의 주변, 급습을 당한 풍검대 열 명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무, 무슨!”

“당황하지 마! 놈은 혼자다! 쳐라!”

“혼자가 아니지.”

하늘에서 어둠이 내리꽂힌다.

어둔 날개의 발톱이 풍검대 검사들을 찢어발기려는 찰나!

퀘에에엑!

위협적인 파공음이 날아들었다.

지석인의 지시를 받은 열 기의 상노가 전부 어둔 날개를 조준하고 있었다.

“삐악-!”

가까스로 화살을 흘려낸 어둔 날개가 황급히 고공으로 되돌아갔다.

‘어둔 날개라도 날개를 맞으면 끝장이다!’

엄습하는 풍검대의 검을 흘리며, 그믐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약이 오른 어둔 날개는 상노 부대를 향해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 된다, 어둔 날개! 그게 적이 노리는 바야! 접근하면 연노까지 쏟아질 거다!』

적들도 와족의 반려수 중 새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상노와 연노는 그에 대한 대비이기도 했다.

맞추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명중하기만 한다면 연약한 날개는 쏟아지는 화살들을 버텨낼 수 없으리라.

하늘을 비행하는 중이라면 모를까, 공격을 위해 떨어져 내리는 순간은 일직선 궤도를 그릴 수밖에 없으며, 그건 맞추기 좋은 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이다. 지금 써야 한다!’

가장 강대한 적들에게 홀로 돌격해 들어간 너른 하늘 대신 지휘를 맡은 그믐이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풍검대의 검을 받으며, 전장의 추이를 지켜보던 그가 결단을 내렸다.

『오래들 참았다! 전원, 지금 발동해라!』

그믐이 발한 광범위 언령이 전장에 메아리쳤다.

“하앗!”

또 한번의 찌르기가 암습을 시도했던 검은 수리 전사의 심장을 정확히 후벼 판다.

원승은 방어를, 여규는 공격을.

평생을 손발을 맞춰온 단짝처럼 두 사람은 혼연일체가 되어 다가오는 위기를 극복하고 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3인 1조! 방패와 창과 검을 하나로 묶는다!”

스파팟!

빛을 쪼개는 검날이 적들의 육신을 가른다.

숨통을 끊지는 못하더라도 기세를 꺾기엔 충분한 검격이었다.

진형이 무너지려는 순간마다 기가 막히게 나타나 점창의 제자들을 구원하는 이는 공유립이었다.

“놀라워! 사형이 저렇게 강했다니!”

연신 공유립을 곁눈질하며, 여규는 탄성을 쏟아내기 바빴다.

“저도 짐작도 못 했습니다. 정말 굉장하군요!”

원승 또한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그야말로 군계일학이다.

밀집한 이, 삼대 제자들보다 월등히 강한 와족 전사들이 공유립의 검 앞에 연신 물러서고 있었다.

압도할 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한 우위다.

벌써 무너졌어야 할 전선이 억지로 버티고 있는 건 공유립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형도 대단한 건 마찬가집니다.”

잠시 한숨 돌릴 틈을 얻은 원승이 여규를 보며 말했다.

“이제 고작 열네 살. 그 나이에 저 무지막지한 전사들을 몇이나 쓰러뜨린 겁니까. 나이를 감안하면 성장 가능성이 더 큰 건 여 사형입니다.”

“아, 아냐. 사제가 아니었다면 난 벌써 죽었을 거야. 사제가 날아드는 공격을 잘 막아줘서…!”

“저 혼자선 죽을힘을 다해도 적 한 명 쓰러뜨릴까 말까입니다. 짐승까지 달려들면 대책이 없죠. 사형이 없었다면 벌써 죽었을 겁니다. 사형이 아닌 다른 사람과 짝을 이뤘더라도 그건 마찬가지일 거고요.”

진심 어린 칭찬이다.

누군가에게 칭찬이란 걸 들어본 적이 없는 여규는 전장 한가운데에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3인 1조를 기본으로 어깨를 맞대라! 견고한 방벽의 띠를 형성하는 거다!”

어느새 일대의 전장은 자연스레 공유립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발군의 무력과, 사형제들을 하나라도 살리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그의 모습은 모두에게 감명을 주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적재적소에 병력을 투입하고 물리는 용병술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탁월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역사 속에서 그랬듯.

전쟁은 새로이 또 하나의 영웅을 낳고 있었다.

“전사들은 힘을 집중해라! 이곳을 뚫고, 나무표범 전사들을 지원한다!”

방패 너머에서 적의 지휘자로 짐작되는 목소리가 들렸다.

와족 고유의 언어와 한어가 섞여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의미를 유추하기엔 충분했다.

적의 기세와 힘이 이곳으로 집중되기 시작했으니까.

“이런!”

공유립의 낭패 어린 탄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뒤이어 내뱉어진 그의 말은 모두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방패병! 내 지시가 있으면 선회하여 후방을 막는다! 알겠나!”

“후, 후방 말입니까, 사형? 어째서…?”

“설명할 시간이 없다! 살고 싶다면 지시에 따라라! 네가 뒤돌지 않으면 너희 조는 전멸이다! 명심해!”

“아, 아니, 그게 무슨…?”

와족 전사들이 몰려든다.

인원과 힘을 집중한 그들의 기세는 방패의 벽을 깨부수고도 남을 정도였다.

“지금이다! 전원, 뒤돌아 방패를 들어라!”

“으… 으… 으아악!”

공유립에게 질문했던 제자가 눈을 질끈 감으며 뒤돌았다.

하늘로 번쩍 쳐든 방패.

방금 전까지 방패로 가로막고 있던 정면에서 와족 전사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쐐새새새색!

캉! 캉-! 콰카캉! 카캉-!

“끄아악!”

“커헉…!”

“크어엉!”

등 뒤에서 와족 전사들과 짐승들의 비명이 난무한다.

하늘로 들어 올린 방패에선 날카로운 금속성과 둔중한 충격이 쉴 새 없이 전해졌다.

후방에서 아군이 쏘아낸 연노가 일대의 전장을 한순간에 마비시켰다.

“멍하니 있지 마! 창검병! 찔러라!”

푸욱! 푸푸욱!

“끄으으…….”

원통한 표정의 와족 전사들이 무릎을 꿇는다.

눈을 부릅뜬 제자들이 필사적으로 상황을 되새겼다.

“저… 저 새끼들, 우리에게 연노를…!”

“공 사형이 아니었다면… 우, 우린 다 죽었을 거야!”

와족 전사들의 힘이 집중되자 이 일대가 뚫릴 거라고 예상한 지석인은 지체 없이 연노를 쏟아 부었다.

시야가 좁아진 제자들이 못 보았을 뿐, 동일선상에 있던 전선은 거의 무너진 상황이었다.

백병전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희생시켜 막강한 와족 전사들을 잡는다.

철저히 효율성에 천착한, 하지만 지독히도 냉혹한 전술이었다.

“이 개 같은 새끼들아! 네놈들이 그러고도…!”

그제야 수뇌부의 의도를 파악한 제자들이 분개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사문을 위해 푸릇한 목숨을 던질 각오로 뛰어든 전쟁이다.

하지만 수뇌부는 자신들을 칼받이로 여길 뿐이었다.

지독한 배신감에 몸이 떨리고, 의지와 상관없이 굵은 눈물이 흐른다.

한순간에 삶의 의미가 송두리째 부정당한 사내들이 망연자실하여 고개를 떨궜다.

“기억해라. 이 순간을.”

착 가라앉은 음성이 귓전을 때린다.

너무나 차분하여 냉정하게까지 들리는 어조였다.

자신들을 살린 남자의 목소리에 모두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저들은 우릴 버렸다. 사문이 아니야. ‘저들’이 우릴 버린 것이다. 욕해도 좋고, 저주해도 좋다. 저들을 넘어, 사문 전체에 화살을 돌려도 좋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니.”

말을 잇는 공유립.

침착한 줄만 알았던 그의 입술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

“다만 그것도 살아남아야 가능한 것이다. 난 살기 위해 정해진 위치를 이탈하여 이곳으로 왔다. 날 욕해도 좋아. 하지만 저들은 우릴 버렸고, 난 스스로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멍해졌던 눈들에 빛이 들어찬다.

들어 올린 고개에 이어, 땅으로 쳐졌던 검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난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 모두를 살리기 위해 싸울 것이다.”

절규 어린 외침과 단말마의 비명이 난무하는 전장 한복판에서.

껍질을 깨고 나와, 바야흐로 운명을 제 손으로 움켜쥐게 된 남자가 모두를 돌아봤다.

“그러니, 부디 나와 함께 해다오.”

쩌저정!

“크헙!”

철퇴보다도 묵직한 짐승의 앞발이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예리하게 벼려진 발톱이 도에 가로막혔다.

막을 거란 생각은 못 했는지, 맹수의 시퍼런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크르르르…….”

꾸구구국―.

“크윽!”

새하얀 발톱에 푸른 기운이 차오르자 두 손으로 맞잡은 도가 밀리기 시작했다.

한쪽 무릎을 풀썩 꿇은 봉검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물러서라!”

퀘에엑-!

한기를 머금은 청운창이 맹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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