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00화 (100/463)

100화

“크아앙!”

노련한 무인의 회피 동작처럼.

푸른 눈이 고개를 휙 돌리며 날아드는 창을 비켜냈다.

빈틈을 노리고 들어간 회심의 찌르기였건만.

맹수의 안면 부위에 작은 상처 하나를 남긴 게 전부다.

어느새 하늘로 올라간 푸른 눈의 앞발이 운검의 머리 위에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웠다.

‘흘려야 한다!’

힘으론 안 된다.

그렇다면 기술로 맞설 뿐.

휘돌린 창대가 부드럽게 흐르며 대호의 앞발을 사선으로 흘렸다.

그그그긍!

넋 놓고 있을 리 없다.

도를 기울여 대호의 발톱을 미끄러뜨린 봉검이 그대로 적봉도를 휘둘렀다.

스팟!

연이은 공격에 위협을 느낀 짐승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안면 부위에 생긴 또 하나의 상처.

푸른 눈이 앞발을 들어 상처 부위를 툭툭 쳤다.

“제법 화끈할 게다.”

호기롭게 내뱉긴 했지만, 봉검의 눈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봉검의 이름을 짊어진 순간부터 일인 전승되는 화봉공(火峰功).

그 화기를 고스란히 전이한 참격이었다.

저렇듯 발로 툭툭 턴다고 진정될 기운이 아니다.

무엇보다 손상 부위에 불이 붙질 않았다.

화봉신공이라고까지 불리는 극양(極陽)의 무학이 저 짐승에게는 통하질 않는 모양이었다.

“내 빙운공(氷雲功)도 마찬가지요. 한기가 침투하질 못하는군.”

봉검의 심정을 짐작한 운검이 말을 건넸다.

극음(極陰)의 성질을 띠는 운검가의 절학 또한 상처 부위를 통한 이차 피해를 입히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릉! 크헝-! 크허어어엉!”

상처를 입은 게 대체 얼마 만인가.

공격을 허용한 것도 그렇지만, 자연기를 두른 외피가 뚫린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따끔따끔한 안면의 상처를 문지르던 푸른 눈이 자세를 낮췄다.

인정해야 한다.

눈앞의 인간들이 그저 오래 살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좋다. 제대로 상대해 주마.

강적을 만나 진지하게 자세를 갖춘 푸른 눈의 주변으로 유형화된 자연기가 넘실거렸다.

‘눈에 보일 정도로 농밀한 기운이라니!’

봉검이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홀로 상대하기에 조금 버거운 정도로만 여겼거늘.

완전히 잘못 봤다.

본연의 기세를 드러낸 맹수는 운검과 함께 달려들어야 겨우 승산을 점칠 수 있을 만큼 무지막지한 괴물이었다.

‘데리고 다니는 짐승이 이 정도인데, 족장이란 자는 그럼…?’

“뭘 넋 놓고 있나.”

경악을 선사한 맹수 때문에 잊었다.

진짜 적은 따로 있다는걸.

전사의 강맹한 주먹이 대장로들을 덮쳤다.

“모든 제자들은 둥글게 뭉쳐라! 3인 1조를 기본으로 하여, 어깨를 맞대고 원진을 형성한다!”

그것은 전장 한복판에 형성된 제 3지대나 다름없었다.

마룡봉에서 내려다 본 전장 좌측엔 매서운 눈이, 중앙에는 너른 하늘이, 우측에선 그믐이 와족 전사들을 이끌고 점창의 주요 무력집단과 격렬한 싸움을 지속하고 있었다.

매서운 눈과 너른 하늘이 돌격한 경로의 중간 지점.

그 둘이 한참을 지나쳐 온 뒤편의 전장이다.

이미 무너져 내린 최전선에는 오직 그들만이 생존해 있었다.

“대체 뭐냐, 저건?”

거친 모래는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일단의 무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방패를 둥글게 둘러치고, 장창과 검으로 무장한 점창의 무인들이 원진 안에 웅크리고 있다.

진형을 허물려는 전사들에게만 반격할 뿐, 먼저 달려들지도, 그들을 지나치는 전사들을 쫓지도 않는다.

마치 잔뜩 겁먹고 웅크린 고슴도치 같았다.

‘뭐야, 이놈들은? 수장들 없이 공격하자니 피해가 막심하고… 놓고 가자니 뒤통수가 간지럽고…….’

기묘한 상황이다.

부상당한 우둔한 땅을 제외한 모든 수장들이 전장에 뛰어들었기에 자신이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민에 빠진 그에게 원거리 언령이 날아들었다.

『그놈들, 싸울 의사 없다. 아까… 아군에게 공격받았다. 살… 기 위해 저러는 것이니 무시하고 달린다.』

의사의 전달이 뚝뚝 끊기긴 하지만, 우둔한 땅의 상태는 한결 나아보였다.

후방으로 눈을 돌리니, 그를 호위하는 전사들 사이로 거인의 눈빛이 또렷이 빛났다.

‘알겠소. 부 족장. 하긴 저 진형만 아니라면 쓸어버리는 게 어렵지 않은 놈들이지.’

후방을 급습한다면 그때 처리한다.

지금은 전방으로 파고든 수장들을 뒤따를 때였다.

우회의 명을 받은 와족의 전사들이 공유립과 여규가 위치한 원진을 넘어 돌격을 시작했다.

‘저런 걸 왜 그린 걸까?’

지나치는 적들을 보며 한숨 돌린 여규가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꾹꾹 눌러두었던 의문을 떠올렸다.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

처음 와족과 마주했을 때, 함께 있던 사형들은 저걸 보고 야만인들의 헛된 미신이라며 코웃음 쳤다.

‘아냐. 비아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와족은 그저 자연에 밀착한 삶을 살아갈 뿐이야. 결코 야만적이거나 미개하지 않아.’

사문에서 귀동냥한 정보로도 그랬다.

와족은 이해하지 못할, 아무 이유 없는 행동을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전승되어온 의식 같은 건가?’

옛 전통과 풍습을 고스란히 지켜온 자들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전쟁을 앞둔 선조들이 행했던, 오래된 의식일지도.

‘아니면… 적을 위압하려고?’

빨강과 파랑, 그리고 검정.

사람에 따라서는 노랑과 초록에 이르기까지.

울긋불긋하게 채색된 선과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와족 전사들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기괴해 보이긴 하지만 저런 걸로 상대가 겁먹을 리가…….’

차라리 무시무시한 맹수의 형상을 본뜬 가면이라면 모를까.

많이 양보해서 용맹해 보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된 선과 무늬들은 차라리 예술적인 상징에 가까웠다.

‘괜한 걱정인가.’

하지만 계속해서 마음 한구석에 미묘한 불안이 남는다.

한 달 내내 창산으로 달려오느라 지쳤을 와족 전사들이 아무 이유 없이 저런 복잡한 치장을 했다고?

“오오오오!”

여규의 고민이 깊어지던 그때, 전장 깊숙이 파고든 전사들의 함성이 창산을 울렸다.

그것은 아득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온 술식(術式)이다.

누군가는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기적이라 칭송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허무맹랑한 미신이며 실체 없는 허위라 손가락질한다.

둘 다 틀렸다.

그것은 고도로 발달한 인간 정신의 소산이며, 수백 년에 걸쳐 혼의 영역을 집요하게 탐구한 결과물이다.

엄존하는 대자연의 기운을 질료로 하여 구현되는 초월적인 힘의 발현이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위의 아버지 때부터.

대자연에 가장 가까운 천성을 타고난 한 명.

한 세대에, 어머니 대지의 부름을 받은 단 한 명만이 그 힘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베푸는 게 허락되어왔다.

전투 화장.

그것은 인간의 육체에 묶인 혼신(魂神)의 고삐를 늦추는 촉매이며, 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와족 술법의 정수나 다름없다.

『발동하라!』

“드디어!”

그 말만을 기다려왔다.

한순간에 적들을 쓸어버릴 힘을 지니고도 쓰지 못하는 갑갑함에 가슴이 터져버릴 뻔했다.

“할아범의 허가가 떨어졌다! 전투 화장을 발동하라!”

오래도 참았다.

긍지를 저버린 비열한 적들을 두 눈에 깊숙이 담는다.

와족 전사들의 입가에 분노 어린 살소가 번졌다.

휘오오오―

끌어올린 자연기가 정교하게 설계된 술식의 도면을 타고 흐른다.

복잡한 기하학적 무늬들은 영육을 잇는 고리의 상징이니, 가열하게 치달은 자연기가 육신에 매인 영혼의 사슬을 풀어헤쳤다.

캉, 캉, 카앙!

영혼의 해방은 곧 정신의 폭주다.

생존을 위해 저당 잡힌 최소한의 기운마저 아낌없이 끌어 모아 발산한다.

이지가 분명할 때는 절대로 행할 수 없는 생명력의 발화이자, 육신에 각인된 최소한의 생존 본능마저 저버리는 광기의 향연이었다.

꽈아아악-!

하지만.

영혼의 완전한 해방과 정신의 가없는 폭주는 허락지 않는다.

그건 자살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분리되려는 혼신을 일정거리에서 묶어두는 건 고련을 거듭한 육체였다.

힘, 민첩, 은밀, 유연, 또는 발달된 감각.

다채로운 색상으로 그은 선들은 특성화된 장기와 기예의 상징이다.

지난한 세월, 끊임없는 단련을 거쳐 쌓아 올린 육체의 강인함이 영영 떠나려는 혼백을 단단히 붙잡았다.

번쩍.

찰나간 흐려졌던 눈빛에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한 정광이 깃든다.

갖은 약재를 배합해 마환산의 악성을 제거하고, 장점만을 추출한 전투 화장의 성분이 전사들로 하여금 고통을 잊게 하고, 불굴의 용기를 북돋았다.

“우오오오오!”

타오르는 투지.

고양된 감각.

넘쳐흐르는 자연기와 전신에 깃든 충만한 활력!

이는 술식 아래 구현되는 한시적 기적이니, 공존할 수 없는 두 현상의 혼재다.

생생한 이지를 갖춘 광전사(狂戰士)들의 파도가 적들을 덮쳤다.

푸화하학!

하늘 끝까지 치달을 것 같은 투기가 전장 전체를 밀어젖힌다.

작디작은 불씨가 천지를 집어삼킬 화염으로 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쿠콰카카카캉!

“끄아아악!”

“뭐, 뭐야, 이놈들! 왜 갑자기…?!”

“아아악! 살려줘!”

호검대? 풍검대?

방패, 장창, 연노?

뭐든 가져와봐라.

눈앞에 얼쩡거리는 순간 통째로 짓이겨줄 테니!

물고 물리던 전장이 한순간에 뒤집힌다.

가늘게 늘어선 와족의 띠가 두터운 점창 포진 전체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여, 연노! 연노를…!”

당황한 지석인이 궁사를 명했으나, 본인도 어디를 노려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다.

특정 지역이 아니다.

와족 전사들은 전장 전체를 갈아엎을 기세로 사방에서 밀려들고 있었다.

후유증?

당연히 있다.

육신에서 거리를 둔 정신은 신체의 고통을 경감시키며 무엇이든 깨부술 힘과 용기를 주지만, 인간이 버텨낼 손상의 최대치를 감안하지 않는다.

몸이 망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계를 넘어선 힘을 쏟아낼 뿐이다.

강제로 잠력을 격발시키니, 혼신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 크나큰 격통이 뒤따르는 건 예정된 수순이다.

제한된 시간이 끝나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는다.

한계를 초월한 힘을 얻는 대가였다.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 안에 몰살시키면 그만이다.

힘이 다해 무릎이 꺾일 때, 서 있는 적이 하나도 없다면 문제 될 게 무엇인가!

폭주하는 늑대들의 물결이 겁먹은 양떼를 집어삼켰다.

‘나왔다!’

발을 멈춘 채 전장을 내려다보던 공지량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30년 전, 가뜩이나 밀리던 점창 무인들을 한순간에 괴멸 직전까지 밀어붙인 불가사의한 무언가!

무공?

와족만의 신비한 기예?

또는 불가해한 미지의 주술?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다.

상리를 벗어나는 기운의 증폭 현상 이후 밀어닥쳤던 가공할 공포!

푸른 빛 광망을 토하는 와족 전사들을 막아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전대의 봉검과 운검마저 저 현상 직후, 순식간에 살해당했다.

당시 삼십을 갓 넘은 회효에게.

차기 봉검과 운검으로 확실시되던 현재의 대장로들 또한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라오.’

그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점창의 이름은 그날로 지워졌을 것이다.

‘이제부턴 시간 싸움이다!’

한 번 겪어보았기 때문에 절절히 안다.

언젠가는 저게 튀어나올 줄 알았다.

그에 대한 대비를 했음은 물론이다.

30년 전, 점창을 괴멸 직전까지 몰고 갔던 야만인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자 맥이 풀린 듯 주저앉았었다.

‘여기가 승부처다!’

버텨내면 승리하고, 버티지 못하면 몰살하리라.

주먹을 불끈 쥔 공지량이 빠르게 명령을 쏟아냈다.

“이차 저지선을 앞으로! 호검, 풍검대는 뒤로 물러나라! 봉검가와 운검가의 예비대 사십 명은 나와 함께 우측 전장에 돌입한다! 지 대주! 오십의 응목대를 모조리 이끌고 좌측 전장을 지원하라!”

척, 척, 처억!

최전선을 막아섰던 방패와 창이 또다시 등장했다.

그들보다 더욱 숙련된 무인들로 구성된 이차 저지선이다.

또한 설익은 이, 삼대 제자들이 아닌 점창의 주요 무력집단이 바짝 따라붙어 뒤를 받친다.

이 전술의 핵심이 되는 패는 연노와 상노.

전선에 나온 모든 제자들은 방어에 집중하며, 적들의 손이 닿지 않는 원거리에서 화살을 쏟아붓는다.

이 순간을 위해 공지량이 준비한 최후의 수였다.

바야흐로 최종 결전이 임박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낱낱이 지켜보던 그믐 또한 아껴두었던 마지막 패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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