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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01화 (101/463)

101화

“화살을 재라! 내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일제히 발사한다!”

야만인들의 폭발적인 기세를 막기 위해 장문인과 응목대주가 전장으로 향했다.

연노와 상노 부대의 지휘를 이양받은 응목대 11조 부조장 준해가 노병들을 독촉했다.

‘어려울 것 없다. 세밀하게 전황을 읽을 필요도 없어. 무조건 쏟아부으면 돼!’

야생의 살기로 번들거리는 저 눈!

야만인 전사들은 구파의 숙련된 무인들을 앞마당 눈 쓸 듯이 치우며 밀려오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준해에겐 공지량이나 지석인처럼 전장의 추이를 살피며 적재적소에 화살을 배분할 능력 따윈 없었다.

미리 지시받은 대로 와족 전사들이 방패로 이루어진 저지선과 충돌하는 순간, 일제 사격을 명할 뿐이다.

“전과는 다르다! 이제부턴 아군이 맞아선 안 된다는 걸 명심해라!”

지금부터 적들과 부딪히는 자들은 점창의 핵심 무력단체들이다.

소모용 칼받이로 내세운 제자들과는 엄연히 달랐다.

아군의 진영에 화살이 꽂히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우오오오오!”

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거리.

야만인들의 함성이 선명하게 날아와 귓전에 박힌다.

그만큼 정확한 조준이 가능해지며, 연노와 상노의 살상력 또한 가파르게 상승하리라.

날카롭게 벼려진 철촉들이 미친 물소 떼처럼 날뛰는 와족 전사들을 겨눴다.

휘이이잉―

칼바람이 휘몰아친다.

절로 눈이 감기는 바람의 홍수 속에서, 청년은 가늘게 뜬 눈으로 지상의 소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아직도 신호가…!’

두터운 팔 근육이 육신을 지탱한다.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단애에 수십 명의 인간이 매달려 있었다.

범인이라면 추락하지 않게 버티는 것만으로도 생사가 오가는 지옥을 경험할 거다.

아니, 이 높은 곳까지 맨손으로 기어 올라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십 명에 가까운 청년들은 누구 하나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건, 당장 저 아래 보이는 전장으로 달려가지 못하는 답답함이었다.

‘왜 신호를 보내지 않는 겁니까!’

이 순간에도 전사들이, 식구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전장에 난입하여 미력하나마 손을 거들고 싶었다.

산은 의지를 거스르고 자꾸만 뛰쳐나가려는 몸을 붙잡아 두기가 힘들었다.

“삐아아아악―!”

저 멀리 전장에서 터진 거조의 울음이 바람에 실려 온다.

창산 열아홉 봉우리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사양봉(斜阳峰)의 중턱.

기척을 죽인 채 깎아지른 벼랑에 매달려 있던 청년들이 기다리던 신호에 반응했다.

“저것! 어둔 날개의 울음소리다! 할아범의 신호야!”

“드디어…! 머뭇거릴 시간이 없어! 가자!”

휘휘휙―

자살이라도 하려는 걸까?

지상의 거목들이 손톱만 하게 보일 만큼 까마득한 높이다.

하지만 사십 명의 청년들은 망설임 없이 고공으로 몸을 던졌다.

“너희는 따로 간다.”

문산에서 창산까지 일직선으로 진격한다는 결정이 떨어진 날.

청년 전사들을 모아놓은 그믐이 말했다.

“네? 할아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희도 이제 엄연한 전사예요. 혹시 저희가 못 미더우신 거라면…!”

산의 항변은 청년들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왜 자신들만 따로 떼어놓는가?

다칠까 봐?

미숙하기 때문에?

전력에 보탬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무엇이건 간에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다.

자신들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성년식을 마쳤을 때와 달리, 이제는 스스로의 실력을 명확히 안다.

허나 부족의 명운을 건 전쟁에서 빠지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미숙하면 미숙한 대로.

식구들과 어깨를 맞대고 함께 싸울 것이다.

힘이 모자라서 죽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전장에도 나가지 않고 숨어 있으라고?

전사들의 출정을 배웅이나 하면서?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건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듯 구차하게 살아남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설령 목숨을 건진다 해도 평생을 자괴감에 시달리며 살아가야 하리라.

할아범, 아니, 족장님의 명이라도 그런 건 따를 수 없었다.

“으엉? 이 핏덩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게야?”

눈썹을 추켜 올린 그믐이 얼굴이 벌게져서 씩씩대는 청년들을 둘러봤다.

“얼씨구? 한 대 치겠다? 예끼! 오해하지 마라, 꼬맹이들. 성년식을 통과했을 때부터 너희는 어엿한 와족의 전사다. 그런 이유로 따로 가라는 게 아니야.”

“……그러면요?”

한결 누그러진 청년들에게, 그믐이 말했다.

“잘 들어라. 전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백병전으로 전개될 거다. 허나 놈들은 무척이나 많은 준비를 했어.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겠지. 너희는 그 순간을 대비해 숨겨두는 칼날이다.”

“저희가요?”

“그래. 우리들은 곧 문산을 출발하여 창산이 있는 서북부까지, 운남 땅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른다. 적들의 이목은 우리에게 집중될 게야. 너희는 지금 당장 출발하여 아래로 우회한다.”

“아래로…!”

“적들의 눈에 띄지 않을 길을 골라 우리보다 앞서 달려야 한다. 부상자들의 회복과 너희의 주력(走力)을 감안해 본대의 진격 속도를 조절하겠지만, 무척이나 고된 행군이 될 게야.”

“아무리 고되어도 견딜 수 있습니다!”

“전장이 어디가 될지 모른다. 적이 무엇을 준비했는지도 모르고. 전투가 벌어지면 들키지 않게 접근하여 충분한 거리를 두고 대기해라. 내가 신호를 주면, 그때 적들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거다.”

믿지 못해서, 보호하기 위해서 따로 가라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할아범은, 그리고 족장님은 비장의 승부수가 될 중요한 역할을 자신들에게 맡겨왔다.

감격한 청년들의 얼굴에 비장한 결의가 떠올랐다.

“할아범! 맡겨만 주세요! 꼭 저희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아, 그건 아니고. 너희 핏덩이들 몇 없다고 우리가 밀리기라도 할 것 같으냐? 그저 만약을 대비한 거다. 이번 점창 장문인이란 놈, 하는 짓을 보아하니 영 찜찜하단 말이지.”

“할아범. 그럼 지휘자급 성인 전사 한 분을 붙여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오며, ‘안개 걸음’이 말했다.

안개 걸음은 그믐에게 손 한 번 못 써보고 패한 이후로,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이제는 자만하지 않는다.

자신들은 미숙하며, 대규모 전쟁을 겪어본 사람이 없다.

시시각각 급변하는 전장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노련한 지휘자가 필요했다.

부족한 부분을 냉정히 파악하고 보완하려는 태도.

그믐의 얼굴에 대견함이 스쳤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왜요?”

“소수부족을 습격한 맹수들과 전사들이 싸웠던 전장. 그 모든 곳에 적들의 정찰대가 숨어 있었다. 한 놈도 남김없이 색적(索敵)하여 쓸어버린 건 족장밖에 없어. 외따로 떨어진 지역이라 그런지, 너희가 파견된 이 문산에만 적들이 없었다. 광서우를 막자마자 족장이 확인한 사실이니 확실할 게야.”

“음… 그렇군요.”

그믐의 의중을 파악한 안개 걸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얼굴이 팔리지 않은 건 너희밖에 없단 뜻이다. 진격로에 있는 놈들을 보는 족족 쳐 죽이며 나아가겠지만, 놓치는 놈들이 생길지도 모르지. 그 경우 지휘자급의 고위 전사들이 보이지 않으면 눈치를 챌 수도 있다. 정면 격돌이 벌어질 게 뻔한 상황에서 핵심 전력이 빠져서도 안 되고.”

“알겠습니다, 할아범. 저희가 스스로 판단하고 돌입하겠습니다. 적절한 시기를 알 수 있게 신호만 주세요.”

“얼굴을 보지 못하는 기간이 한 달을 넘을 거다. 그동안은 날짐승들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다. 적들에 대한 탐색도 새들을 앞세워라. 그리고… 여울아.”

“네… 네? 저요? 할아범?”

호명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여울이 깜짝 놀라며 대꾸했다.

“감각이 무척이나 뛰어나다고 들었다. 광서우의 순간 가속을 잡아낼 정도라고? 그건…… 아니다. 그 부분은 전쟁 이후에 이야기하자꾸나. 어쨌든 한 달간 네가 선두에 서줘야겠다.”

“제, 제가요?”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여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새들이 앞서서 적들을 찾겠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적들의 기척을 미리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이 미련한 놈들은 싸울 줄만 알았지, 그런 쪽은 형편없더구나. 네가 이놈들을 이끌어라.”

“그… 저는 항상 폐만 끼치고, 도움이…….”

여전히 자신감이 부족한 여울이다.

고개를 숙인 채 꼼지락대는 그녀의 용기를 북돋은 건, 산이었다.

“할 수 있어. 여울아. 광서우와 싸웠을 때, 네가 없었으면 우리는 훨씬 많이 죽거나 다쳤을 거야. 전멸했을지도 모르지. 네가 우리를 살렸다. 이번에도 할 수 있어.”

“사, 산이 오빠…….”

항상 그 넓은 등을 남몰래 훔쳐보며 얼굴을 붉힌 연모의 대상이다.

그가 광서우의 뿔에 받혀 죽을 뻔했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의 무력함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다시는……. 다시는 그런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할 거야.’

할 수 있다.

3년의 성년식 기간 내내 자연에 녹아든 야수들을 감지하고, 맹수들의 예민한 감각을 피하며 생존을 일궈냈다.

은밀히 숨어 있는 적이라도 절대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할게요. 할 수 있어요. 제가 모두를 안전한 길로 이끌겠어요.”

내가 지킨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각자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듯 성장의 계기 또한 제각각이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고, 그들을 지키고 싶단 마음이 17년간 움츠려 있던 소녀의 용기를 일깨웠다.

그 변화의 순간을 포착한 그믐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잘 해내리라 믿는다. 여울이 뿐만 아니라 너희 모두를 믿는다. 만약 전장이 창산이 된다면, 전쟁에 앞서 ‘녀석들’을 전부 너희에게 보내마.”

비아, 노을이의 또래와 더불어 와족의 미래를 이끌어갈 세대다.

일생을 흐드러지게 꽃피우고, 삶의 완주를 눈앞에 두고 있는 노인이 보기 좋은 웃음을 지었다.

“멋지게 한 방 먹여줘라.”

여울의 감각은 그믐의 예상보다도 훨씬 뛰어났다.

성인 전사들의 거침없는 진격이 적들의 이목을 끌어당긴 덕도 크겠지만, 여울은 드문드문 숨어 있는 적들의 위치를 귀신같이 파악하고 청년들을 이끌었다.

개구, 원양, 원강…….

거기까지 이르자 적들은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운남의 남부를 내달린 청년들은 마침내 운현의 한 야산에 도달했다.

성년식을 치르기 위해 청죽림을 나온 마른 비가 침식을 잊고 단련했던 산이다.

그 뒤의 행군로 또한 마른 비가 북상한 경로와 동일했다.

봉경, 보산…….

과거 자신의 영역이었던 보산에 이르자 ‘큰 발’은 아련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자신이 있을 적에는 숨도 크게 못 쉬던 불곰 녀석이 주인 행세를 하는 걸 보고, 괜한 심통을 부리려 했다.

불곰이 침입자를 감지하고 기세 좋게 달려 나왔으나 큰 발을 보자마자 잔뜩 움츠러들었고, 한 대 쥐어박으려 다가갔던 녀석은 어쩐 일인지 곧바로 뒤돌아 행군에 합류했다.

생식기 부분이 허전한 걸 보니 측은해서 때릴 수가 없었다나 뭐라나.

빠르게 산을 지나치는 인간들에게서 자신을 불구로 만든 아이와 비슷한 구석을 발견한 불곰이 서럽게 울부짖었다.

그렇게 한 달.

청년들은 성인 전사들보다 한발 앞서 창산에 도착했고, 적들의 눈을 피해 산의 남쪽을 더듬어 올라왔다.

열아홉 봉우리 중 최남단에 있는 사양봉을 타고 올라, 까마득하게 보이는 전장을 시작부터 두 눈에 담았다.

그리고 전장이 창산이 될 것을 예감한 순간, 그믐은 약속대로 ‘녀석들’을 보내왔다.

“가자!”

내려다보기만 해도 움츠러들 고공이다.

하지만 산은 호기롭게 몸을 던지며 외쳤다.

“삐아악!”

그 음성에 화답하듯 맹금류의 거센 울음소리가 사양봉의 꼭대기를 울렸다.

휘휘휘휘휙―!

운남 푸른 하늘의 주인들이 쏟아져 내린다.

사양봉 정상 뒤편에 대기하고 있던 반려수들이 봉우리의 경사를 타고 미끄러지듯 활강했다.

펄럭, 펄럭―! 콰악!

한 마리, 또는 두 마리씩.

검은 비가 내리듯 수직으로 내리꽂힌 날짐승들이 낙하하는 청년 전사들의 어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저기다! 저기로 가야 해!”

목표는 명확했다.

난생 처음 보는 무기들이 전쟁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전사들을 힘겹게 만들고 있었다.

쐐애애액!

등 뒤의 하늘에서 다가드는 급습.

공지량조차 상상하지 못한 습격을 눈치챈 자는 아무도 없었다.

새들의 발에 매달려 거칠게 활강한 청년 전사들이 연노와 상노 부대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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