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쾅! 쾅! 콰앙!
“윽! 큭! 크윽!”
강철로 주조한 사각 방패가 종잇장처럼 구겨진다.
주먹이 한 번 내리꽂힐 때마다 방패의 손잡이를 쥔 팔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경련했다.
걸레짝이 된 방패 너머, 새파란 불꽃을 담은 거한의 눈동자가 형형히 빛났다.
“히, 히익!”
인간이 아니다.
정상적인 인간이 저런 눈빛을 보일 순 없다.
바위 곰 전사와 눈이 마주친 삼대 제자는 뱀을 만난 개구리처럼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퓨퓨퓩!
얼굴 옆으로 두 줄기 선이 바람을 가른다.
창대와 검날.
그를 지원하기 위해 등 뒤에 있던 사형제들이 창검을 내뻗었다.
‘사, 살았어!’
덥석!
방패를 두드리던 거한이 날아오는 창검의 날을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가볍게 힘을 주자 쇠붙이가 나뭇가지처럼 뚝 부러진다.
이게 전부냐?
씨익 웃는 바위 곰 전사의 미소는 야차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끼익, 끽!”
콰지직!
머리 위에서 뚝 떨어져 내린 거대 원숭이의 앞발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삼대 제자의 머리통을 바스러뜨렸다.
그는 무엇에 당한 지도 모른 채 짧은 생을 마감했다.
두두두두― 콰아앙!
“으아아악!”
“커헉!”
집채만 한 멧돼지와 물소의 돌진에 방패 네 개가 허공을 날았다.
뒤를 받치던 창병과 검사까지도 한꺼번에 날려버린 짐승들은 멈출 줄 모르고 진형을 파고들었다.
전투 화장으로 강화된 전사들만큼이나 반려수들도 전에 없던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 멍청한 놈이! 당장 안 쏘고 뭘 미적대는 거냐!’
우측 전장으로 내려와 전선을 지휘하던 공지량이 후방을 돌아봤다.
고함을 지르기 위해 벌어졌던 그의 입이 그대로 멈췄다.
쐐애액― 쾅!
슈악- 쉬아악― 콰쾅!
“크아아악!”
“아악!”
연노와 상노 부대가 위치한 최후방이 급격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메운 맹금류들.
그리고 운석처럼 내리꽂히는 수십의 야만인들.
공지량은 쩍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악몽 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휘유~ 아침 햇살과 함께 강하하는 전사들이라니. 그림이 따로 없구먼. 죽기 전에 저런 것도 한번 해봐야 하는데 말이야.」
“감히 어떤 놈이!”
몸을 돌린 곳엔 정신없이 치고받는 전장의 풍경이 있을 뿐이다.
미간을 좁힌 공지량의 귀에 예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여기다.」
“……?!”
방패와 주먹이 부딪히는 전방의 전선.
거기서 꽤나 떨어진 곳에 피 칠갑을 한 노인이 그린 듯이 서 있었다.
「전음이라던가? 어때? 너희들 기술을 흉내 낸 건데 쓸 만한가?」
「네놈은…!」
입은 한 번 벌렸으니 이젠 눈이 커질 차례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공지량이 동공을 확장시킨 채 그대로 굳었다.
「회… 효……!」
다르다.
전장에 내려와 직접 마주한 노인은 과거와는 사뭇 달랐다.
뇌리에 고스란히 박혀 있는 젊은 날의 모습과 달리, 늙수그레해진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한 마리 맹수를 연상케 하던 투기도 온데간데없다.
눈빛이 다르고,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며, 말투마저 다르다.
허허롭게까지 느껴지는 기운은 마치 도의 이치를 궁구하는 무당산의 도사들 같았다.
「네놈? 저번에 사절로 온 호국영인가 하는 놈도 그렇더니만, 하여튼 이것들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그래, 이 몸이 회효다.」
하지만 같다.
혼돈이 휘몰아치는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태연한 신색.
30년 전과 변함없는 단단한 자신감으로, 노인은 우뚝 서 있었다.
고요히 서 있을 뿐이지만, 공지량의 눈에는 지난 전쟁에서 악귀처럼 날뛰던 그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30년… 만이군. 난 대 점창의 장문인 공지….」
「안 물어봤다. 네놈의 이름 따위 하나도 안 궁금해.」
「이…!」
「시끄럽다. 지난 전쟁에 참전했었나? 난 본 기억이 없는데?」
「그때 평원의 대회전에서…!」
「숨어 있었군?」
「무슨 소리냐! 네놈과 칼을 주고받은…!」
「그럴 만해. 뒤에서 꾸미는 짓들을 보니 납득이 간다.」
하는 말마다 끊어먹는 그믐이다.
핏발 선 공지량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의 그 애송이인가.’
수많은 적과 주먹을 맞댔고, 헤아릴 수 없는 목숨을 취했다.
당연히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적들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중엔 청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소년병 두 명이 있었다.
‘기억이 나는군.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꼬마 하나와, 그에는 못 미치지만 역시 비범했던 다른 하나. 후자인가.’
푸들대는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어린 시절의 얼굴이 남아 있다.
전쟁의 막바지, 평원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사형제들의 원수를 갚겠다며 달려들었던 녀석이었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대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덤비는 용기가 가상해 살려준 기억이 난다.
적이지만 아직 여물지 않은 아이이기도 했고, 뛰어난 재능이 아깝기도 했다.
‘한데 이렇게 컸단 말인가…….’
비열하거나 음험한 싹이 보였다면 결코 살려두지 않았을 거다.
허나 지인들의 복수를 원하는 소년의 얼굴은 나름의 정의로 불타고 있었다.
그건 순수하면서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종류의 것이었다.
‘허허… 사람 일이란 정말이지 알 수가 없구나.’
분노로 가득 찼지만, 본바탕은 맑았던 눈빛을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점창 장문인을 그때의 소년과 연결 짓기엔 하늘과 땅만큼의 괴리가 있었다.
‘그때 죽였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모를 일이다.
유사한 짓을 벌이는 다른 누군가가 나타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되돌아간다 해도 쉽게 죽이긴 어렵다는 점이다.
인간의 미래란 건 어떻게 뻗어 나갈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지금은 이런 인간으로 자랐지만, 또 다른 무수한 가능성이 공존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아직 피어나지도 않은 새싹을 짓밟는 건 많은 생명을 꺼뜨린 그믐에게도 여전히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녀석은 보이질 않는군.’
그 꼬마가 순탄하게 성장해 이 전장에 나왔다면.
전장의 판도가 사뭇 달라졌을 게 틀림없다.
그믐의 긴 생애를 통틀어도 그 정도의 천재성과 잠재력을 지닌 인간은 본 적이 없었다.
한 쌍의 부자(父子)를 제외하면.
그믐이 과거의 기억을 훑는 사이, 공지량은 철저히 현재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 노골적인 무시. 의도된 도발이다.’
기억? 못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저자가 자신을 경멸하고 혐오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달려들게 만들려는 속셈이군.’
과거의 어린아이가 아니다.
왜 저런 격장지계를 시도하는가.
흥분을 가라앉힌 공지량은 분석했고, 판단했다.
‘제한된 시간이 다하기 전에 끝내려는 수작.’
그 의미는 명백했다.
제자들이 떼로 죽어나가고 있지만, 급한 건 이쪽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급하긴 급한가 보군. 야만인 놈들의 비정상적인 폭주. 시간이 한정돼 있다는 걸 모를 것 같은가?」
서벽신검을 들어 올린 공지량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움찔하리란 예상과 달리, 그믐은 여유로운 미소로 응했다.
「두렵긴 두려운가 보군. 연노와 상노 부대의 예상치 못한 괴멸. 뒤통수를 후드려 맞은 충격에 불알이 쪼그라든 걸 모를 것 같으냐?」
한마디도 지지 않는 그믐이다.
오직 그믐이기에 가능한 응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만만한 표정과 달리 그의 등허리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연노와 상노에 부상을 입은 전사가 너무 많다. 저 방패 때문에 돌파력이 현저히 떨어져. 게다가 최정예가 이쪽으로 오십. 눈깔 쪽으로 또 오십. 빌어먹을, 앞으로 일 각도 남지 않았거늘.’
단순 백병전이라면 그 안에 섬멸시킬 수 있다.
지금도 전사들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으며 적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문제는 방패와 장창 때문에 그 속도가 더디다는 것과 적들의 최정예가 건재하다는 점이었다.
‘족장. 상황이 녹록치가 않구나. 서두를 순 없는 게냐.’
애가 타지만 눈길을 그쪽으로 돌리는 실수 따윈 하지 않는다.
위태한 상황일수록 여유를 가장해야 한다.
굳이 보지 않아도 좌우측의 전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운들이 충돌하는 걸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중앙에 포진한 적들이 너무도 두텁구나. 우측은? 음… 이대로라면…… 눈깔 쪽도 어렵다.’
사방이 포위당한 상태에서 풍검대를 상대로 지금까지 우위를 점한 것만으로도 나무표범 전사들의 강인함을 엿볼 수 있었다.
전투 화장을 발동한 후 더욱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지만, 전사들이 가장 지친 쪽이 거기다.
더군다나 방패 뒤로 숨은 풍검대와 새로이 가세한 오십의 정예.
붙으면 지지야 않겠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내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청년 전사들은 충분히 잘해주었다.
가장 곤란했던 원거리 병기들을 처리한 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적들도 검을 빼들었고,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게 뻔했다.
“가자! 어둔 날개!”
그믐의 전투 화장이 빛을 발했다.
“카합!”
하늘에서 내리꽂힌 다리가 방패의 벽을 허문다.
거센 폭음과 함께 수평으로 번지는 자연기의 확산이 대량 살상을 이룩했다.
매서운 눈이 전력을 다해 펼치는 확산형 불벼락은 갓 입문한 마른 비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휘리릭-! 콰콰칵!
전장에 파고든 이후 땅을 밟은 적이 없다.
순식간에 세 명의 머리통을 짓밟은 매서운 눈이 재차 허공으로 도약했다.
‘한 방 더!’
힘을 아낄 때가 아니다.
나무표범만으로는 결정적인 파괴력이 부족했고, 또다시 방패가 등장한 이상, 자신이 길을 뚫는 수밖에 없었다.
스스슷―
‘엇?!’
퀘에에엑!
치명적인 암검이 날아든다.
어둠이 일어서듯 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솟구치며 매서운 눈의 배후를 덮쳤다.
“크윽!”
상반신의 가죽옷이 갈라지며 등줄기에서 피가 솟구쳤다.
급소를 비껴낸 매서운 눈이 땅에 착지했다.
“어떤 놈이…!”
불벼락을 터뜨리려는 찰나, 기가 막히게 짓쳐온 암격.
의지와는 상관없이 밟은 땅이다.
상처 입은 야수가 그림자를 노려봤다.
“잘도 날뛰더군.”
새카만 옷으로 전신을 감싸고 눈만 내놓은 복면인이었다.
착 가라앉은 음성이 예의 암격과 지독히도 잘 어울렸다.
“뭐 하는 새끼냐?”
“응목대주 지석인이다. 네가 설검대주를 부숴놓았다지?”
“그렇다면?”
“잘했다.”
“…….”
식구의 목숨을 빼앗은 적에게 잘했다?
매서운 눈이 무섭게 침묵했다.
“죽으라고 보낸 거다. 살아 돌아왔다면 내가 귀찮아질 뻔했어.”
“하…! 이놈이나 저놈이나…….”
전쟁 전부터 지금까지.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놈을 본 적이 없다.
매서운 눈이 마주친 한족들은 예외 없이 살려둘 가치가 없는 놈들뿐이었다.
“하나같이 개새끼로구나.”
지석인의 입 부근 복면이 길게 일그러졌다.
“듣던 대로군. 외모부터 성격, 몸놀림까지.”
“잡소리 집어치우고 덤벼라. 아니, 내가 가지.”
쾅!
번갯불이 공간을 압축했다.
“그럴 줄 알았지.”
쾌액! 쐐새색!
“이건 또 웬…!”
지석인의 발밑.
땅속에서 다섯 자루의 검이 치솟았다.
“쳇!”
쾅!
“일직선 후방 삼십 보 내외.”
슈악! 쾌액! 쐐애액!
후방으로 거둔 번갯불의 착지 지점.
둥근 원을 그리며 여덟 자루의 검이 함정처럼 솟아올랐다.
“이것들이!”
빠바바박!
급하게 쳐낸 솔잎 털기가 여섯 자루의 검을 분지른다.
미처 막아내지 못한 검날 두 개가 매서운 눈의 옆구리를 그었다.
“카악!”
사나운 족격으로 쓸어 담듯 지면을 휩쓸었지만, 적들은 이미 땅 밑으로 사라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