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03화 (103/463)

103화

“뭐 이런 조잡한 놈들이!”

씩씩대는 매서운 눈의 어깨에 지석인의 비웃음이 얹혔다.

“미개한 네놈에게 가르침을 주마. 정보는 곧 힘이다. 너를 낱낱이 관찰하며 수집한 정보와 응목대의 암습. 우린 정면으로 널 당하지 못한다. 인정하지. 하지만 죽는 건 네놈이 될 것이야.”

“……바빠 죽겠는데 정말 짜증 나는군.”

치졸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다.

하지만 지금껏 상대한 놈들과는 궤가 다른 강함이었다.

전장에 난입한 이후 처음으로 입은 상처다.

인정해야 한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상당히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후웁―.”

깊게 들이마신 숨으로 들썩대는 가슴을 진정시킨다.

흥분을 가라앉힌 매서운 눈이 차분해진 눈으로 지석인을 바라봤다.

“정보……·. 좋다. 구석에 숨어서 수집한 그 잘난 정보에 이것도 있나?”

“……?”

“내 반려수 말이다.”

* * *

“빠져라!”

부아앙-!

눈앞을 스치는 주먹에 전율이 인다.

바로 물러서지 않았다면 머리가 뜯겨나갔을 터.

우둘투둘하게 일어선 소름이 무복의 안감과 마찰하는 감각은 불쾌했다.

“호 사제! 삼십 명을 데리고 좌측을 쑤셔라! 일검을 꽂아 넣는 즉시 바로 이탈하라!”

“아, 알겠습니다! 대사형!”

쉴 틈이 없다.

공유환의 지시가 연달아 터져 나왔고, 호국영은 살았다는 안도를 느낄 겨를도 없이 검사들을 이끌고 와족 전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촤아악!

피가 튀고, 뼈가 잘리는 스산한 소음이 울린다.

진형에서 떨어져 나온 삼십의 검사들이 검은 수리와 바위 곰 전사들의 배후를 후볐다.

빙글 몸을 돌린 검은 수리들이 악에 받친 고함을 질렀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알짱알짱 정말 귀찮게 하는구나!”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고립된 나무표범 전사들이 있는 곳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들과 합류하기만 한다면.

전투 화장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 우측 전장을 밀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바위 곰! 계속 진격하라! 뒤쪽은 우리가 정리한다!”

검은 수리 고위 전사의 지시가 떨어지고, 반전한 검은 수리들이 밀착해 있던 바위 곰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빌어먹을! 따라 잡힌다!’

호국영이 입술을 짓씹었다.

검을 휘두르자마자 이탈했음에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다.

이, 삼대 제자들 중 가장 강한 자들을 모았다지만, 개개인의 역량은 야만인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갈라라!”

촤차차악!

“큭! 이것들은 또 뭐냐!”

호국영의 눈앞까지 다가갔던 검은 수리 전사의 다리가 꺾였다.

“대사형!”

자신을 미끼 삼아 적들을 분리했다는 걸 눈치챌 정신도 없다.

그저 살았다는 안도감이 호국영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면 대결로는 못 이긴다! 놈들이 분단되었으니 앞뒤로 가둔 채 다시 합류하는 것만 막아라!”

계획대로 검은 수리들을 끌어낸 공유환이 빠르게 외쳤다.

“네놈이 지휘자냐!”

독특한 억양이 섞인 한어였다.

새파랗게 타오르는 눈동자는 광전사의 상징이니, 전투 화장을 발동한 검은 수리 전사가 공유환을 덮쳤다.

“그렇다면?”

철컥. 퀘에엑―!

점창식 발검.

검이 뽑히는 순간, 응집한 내공을 터뜨려 검의 속도를 배가시킨다.

분광검의 묘까지 담아내어 극대화시킨 검속이 올빼미 사냥을 앞질렀다.

촤아악!

허리가 양단된 검은 수리 전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떴다.

‘이, 이럴 수가! 이런 어린놈에게…!’

내뻗은 손은 볼에 깊은 상처 하나를 남겼을 뿐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였다.

“후우… 일개 잡놈 하나가 이 수준이라니. 죽을 뻔했지 않나.”

간발의 차였다.

하지만 승리했다는 건 분명하다.

쓰러진 검의 수리 전사만큼이나 호국영의 눈도 경악으로 물들었다.

‘대사형이… 이토록 강했던가!’

적진의 약점을 잡아내는 안목.

뜻한 바대로 전장을 재편하는 능력.

간결하고 효율적인 지휘.

그리고 무력.

과연 장문인의 핏줄이다.

배후를 덮치는 것 말고는 여기 있는 누구도 일대일로 야만인들을 당해낼 수 없다.

검대에 속한 무인들조차 손쓸 도리 없이 무너지고 있거늘.

본신의 힘을 드러낸 공유환은 점창의 대제자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무위를 갖추고 있었다.

“뭘 멍하니 섰나! 멈추면 죽는다! 계속 움직여!”

놀라운 광경에 움찔했던 점창 제자들이 덤벼드는 검은 수리들을 앞뒤로 압박하며 시간을 끌었다.

‘저것들은 또 뭐냐!’

나무표범을 구출하기 위해 돌진하던 거친 모래가 뒤를 돌아봤다.

바위 곰 전사들의 뒤를 굳건하게 받치던 검은 수리 일부가 떨어져 나가 고립돼 있었다.

어리지만 상당한 놈들이다.

정면 대결을 피하며 앞뒤로 치고 빠지는 시간 끌기에 검은 수리들이 애를 먹는 게 한눈에 보였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한데 이 망할 놈들은 대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한 건지 새로운 무언가가 끝도 없이 튀어나온다.

전황을 훑은 거친 모래의 얼굴에 암담함이 스몄다.

“크크크!”

자신이 지휘자라는 걸 알아본 것인가.

검은 수리를 일대일로 쓰러뜨린 허여멀건 한 놈이 이쪽을 돌아봤다.

스윽-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

네놈들은 끝났다는 의사표현이다.

돌파력을 늦추기 위해 병력을 분단시킨 게 저놈의 작품인 건 안 봐도 훤했다.

“크하하하하!”

비열한 광소가 전장에 메아리친다.

면상을 뭉개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누른 거친 모래가 등을 돌리는 순간!

숲을 열어젖힌 두 줄기 섬광이 전장에 강림했다.

‘저기야!’

전술? 전략? 전장의 흐름?

그런 건 모른다.

하지만 보는 순간 알겠다.

어디가 위태롭고, 가장 시급한 곳인지를.

꺼져가는 불씨를 커다란 화염으로 번지게 할 경로가 소년에겐 보였다.

“흰둥아! 날 따라와!”

“크앙!”

그렇게 부르지 마라.

그 이름, 마음에 안 든다.

마른 비의 뒤를 따르던 백호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르렁거렸다.

“먼저 갈게! 타앗!”

거세게 도약한 육신이 대기를 가른다.

내달려온 속도에 체중이 고스란히 실리니, 상노보다 강력한 인간 화살이 적진을 관통했다.

“크악!”

“뒤! 뒤에…!”

“적습이다!”

놀란 점창의 제자들이 등을 돌릴 때, 진형을 파고든 마른 비는 이미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단순히 내뻗는 것만으론 부족해.’

두 번이나 목격했다.

대리에서 보았던 여규의 찌르기.

검치호를 막아섰던 은빛 여우의 움직임.

그들의 공격에는 살상력을 끌어올릴 무(武)의 이치가 담겨 있었다.

‘회전!’

일격에 적들을 거꾸러뜨릴 힘!

빠르면서도 통렬한 일격!

한 번 본 것을 펼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소년의 몸이 빙그르르 회전했다.

휘리릭-!

그것은 지키지 못한 아이의 이름을 딴 기술이다.

이번에는 잃지 않겠다는, 마른 비를 살리고야 말겠다는 은빛 여우의 각오가 담긴 유작(遺作)이다.

그의 생명을 불태웠던 최후의 기술이 마른 비의 육체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돌개바람.’

퍼버버버벅!

주먹, 팔꿈치, 무릎, 정강이, 뒤꿈치!

맹렬히 휘도는 육체에 회전력이 스미고, 튕기듯 뻗어 나간 팔다리가 적들의 급소를 노린다.

거칠게 불어닥친 바람의 발톱이 점창 진형 한복판을 난자했다.

“컥!”

“크아악!”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적들 사이로 이제는 어엿한 전사로 거듭난 소년이 허리를 세웠다.

“웬 놈이냐?!”

“저, 저놈…!”

“틀림없어! 족장! 와족 족장의 아들이다!”

한 명을 제외하면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은 대리에서 마른 비의 추격에 가담했던 자들이다.

마른 비를 알아본 이, 삼대 제자들이 경악성을 토했다.

‘이게 웬 떡이냐!’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호국영의 얼굴에는 희열이 차올랐다.

‘족장을 잡을 패가 제 발로 날아들다니!’

아들놈을 사로잡아 족장이 보는 앞에서 참수한다.

아니면 목에 칼을 들이대고 인질로 삼아도 좋다.

한순간.

단 한순간이면 족하다.

봉검, 운검대에게 둘러싸여 혈투를 벌이는 족장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수만 있다면!

대장로들과 봉검, 운검대는 절대 그 틈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족장을 잡으면.

점창 최고수 두 명과 최강의 무력 집단 둘이 자유로워지며, 그걸로 전쟁은 끝난다.

승리의 일등 공신!

찬란한 미래를 다질 절호의 기회였다.

“저놈을 잡는다! 날 따라왓!”

호국영과 그의 주변에 머물던 이대 제자 다섯이 한꺼번에 몸을 날렸다.

마른 비에게 쇄도하는 그들의 눈빛은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너. 잘 만났어.”

마른 비 또한 호국영을 대번에 알아봤다.

대리고성 위에서 급습을 해왔던 기분 나쁜 놈.

다시 만날 순간만을 벼르고 있었다.

쾅!

소년의 왼발이 대지에 굳건히 뿌리내렸다.

허리춤으로 당긴 오른 주먹에 정심해진 자연기가 깃들고, 비틀며 내뻗는 정권에 급속한 회전이 담긴다.

퀘에에엑―!

대리에서와는 다르다.

몰라보게 강력해진 바위 부수기가 적들을 덮쳤다.

휘류류- 채채채채챙!

팔뚝 전체를 타고 흐르는 회전력이 날아드는 검들을 빨아들이고, 자연기를 머금은 철골과 강피가 검날을 깨부순다.

검을 잃고 무방비로 노출된 점창 제자들을 묵직한 정권이 꿰뚫었다.

퍼어어억!

“커허어……!”

지독한 생존 본능이다.

공격이 실패한 걸 직감한 순간, 다섯의 사형제를 방패 삼아 뒤로 몸을 뺐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비열함으로, 호국영은 홀로 살아남았다.

직각으로 허리를 꺾은 채 주루룩 피를 토해내면서도, 그의 눈은 있을 수 없는 일을 마주한 사람처럼 부릅떠져 있었다.

‘사… 상대가 되지 않는다. 어찌, 어찌 이런 일이…!’

기껏해야 십여 일 전이다.

대리고성 위에서 겨뤘던 야만인 꼬마는 강하긴 했지만, 충분히 검을 맞대볼 상대였다.

그리고 방금 전의 그 주먹질.

분명 자신을 성벽 밖으로 밀쳐냈던 그것인데…!

‘쿨럭! 카학! 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 짧은 기간 동안 인간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사선을 넘나들었다.

한계를 넘지 못하면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었다.

맹독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맸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존재들과 맞서 싸웠다.

추격전에 참여하지 않은 자가 마른 비가 겪어야 했던 그 처절한 시간들을 짐작이나 할까.

그저 상식을 깨부수는 상황이 불가해할 뿐이다.

호국영.

그의 눈에 두려움이 스멀거리며 차올랐다.

“호 사형! 사형을 구해!”

“이 쳐 죽일 야만인 새끼가!”

“죽여어어어어!”

처음으로 전장에 몸담은 이들이다.

악착같이 유지하던 평정심은 전장의 광기에 먹혀버린 지 오래다.

오직 피아만이 있을 뿐, 적의 힘을 가늠할 안목은 사라져 있었다.

잔존해 있는 이, 삼대 제자들이 악을 쓰며 사방에서 날아올랐다.

추아아악!

풍경이 사선으로 잘리고, 후드둑 떨어지는 인간의 팔다리가 섬뜩한 기음을 토한다.

백색의 털빛보다 눈부신 발톱에 푸르른 자연의 기가 이슬처럼 맺혔다.

한 번의 발짓으로 전장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든 야수가 소년의 곁에 우뚝 섰다.

“크허어어어엉―!”

내리쬐는 햇살.

안개처럼 산란하는 핏물.

그리고… 포효하는 백색의 영수.

그것은 난입이자 강림일지니.

바로 지금, 수왕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돌파

‘이건…!’

들끓는 걸 넘어 비정상적으로 폭주하는 기운!

두 눈에서 선명하게 타오르는 자연기!

확실하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단언할 수 있다.

전사들은 전투 화장을 발동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시간이 없어!’

감히 다가오지 못하는 적들에게서 시선을 뗀 마른 비가 백호에게 외쳤다.

“먼저 갈게! 여길 정리하고 따라와!”

난입과 동시에 호국영이 이끄는 후방을 무너뜨린 소년과 야수다.

백호에게 잔존 인원의 정리를 맡긴 마른 비가 땅을 박찼다.

“으, 으으…!”

막아야 한다.

족장의 아들이 야만 전사들에게 합류하는 걸 저지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호국영과 다섯 명의 이대 제자를 일격에 쓰러뜨린 괴물을 무슨 수로?

자신들만으론 막을 수 없다.

급기야 맹수의 시퍼런 안광이 소년의 후방에서 빛나자 이, 삼대 제자들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비켜!』

“크흡…!”

의지의 제어를 벗어난 육체가 부들부들 떨린다.

그것은 곧 심신의 굴복일지니.

위압을 담은 언령이 쩌렁 울리자, 겨우 버티고 있던 이, 삼대 제자들이 쫙 갈라지며 길을 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