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타다닥―
발 몇 번 놀리니, 마른 비는 앞뒤로 둘러싸여 곤혹을 치르던 검은 수리 전사들에게 도달할 수 있었다.
“아저씨들! 후방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앞쪽에만 집중해요!”
“누구…?!”
맹독에 중독되어 죽음의 문턱을 넘기 전, 백호가 불어넣은 자연기가 마른 비의 몸을 휘돌았다.
텅 빈 육신을 적셨던 정결한 기운.
그 감각과 내음을, 자연의 그것에 한없이 가까운 순정함을 기억한다.
정신을 차린 후, 마른 비가 새로이 축적한 자연기는 전과는 비할 수 없는 순도를 지니고 있었다.
소년의 몸이 허공에서 깊게 회전했다.
“타앗!”
회전까지 등에 업고 내리꽂힌 확산형 불벼락이 점창 제자들을 덮쳤다.
꽈르릉!
“이, 이놈! 족장의…!”
“이놈이 왜 여기에?!”
퍼퍼퍼엉!
사위를 휩쓰는 폭음이 울리고, 다섯 명의 상반신이 한꺼번에 터져 나갔다.
자욱하게 번지는 혈무.
그 끔찍한 광경에 점창 무인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세상이 느려진 듯, 그들의 눈자위가 확장되는 순간이 마른 비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바로 간다.’
후속 공격을 대비할 틈?
줄 것 같으냐.
급습이 성공한 지금,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착지와 동시에 적진을 파고든 마른 비의 눈이 번쩍였다.
‘연(連), 올빼미 사냥.’
쾌- 쾌- 쾌애애액―!
공기를 찢는 양손이 부챗살처럼 뻗어나간다.
단순히 찌르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관통이다.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적들을 꿰뚫는 그것은 피륙으로 이어진 단창이나 다름없었다.
“이, 이놈! 죽여… 카학!”
“아악!”
“사, 살려…!”
전방위.
그리고 팔이 닿는 간격까지.
마른 비의 주변을 둘러싼 적들이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피를 뿜었다.
“한 놈이다! 당황하지 마라!”
점창에도 인재는 있다.
번개처럼 파고든 급습에도 침착하게 대응에 나선 사내는 과연 명문 거파의 무인다웠다.
다만.
상대가 나빴다.
퍼억!
강습.
최속의 일격에 목젖이 찢긴 그가 눈을 까뒤집었다.
‘곧바로! 망설이지 마!’
여긴 전장이다.
한순간이라도 머뭇거리면 바로 살해당한다.
십여 일 전, 살인의 충격에 넋을 놓았던 소년은 이제 없었다.
지체 없이 전진하는 다리가 번개 같은 단타를 쳐냈다.
‘중단, 솔잎 털기.’
빠바바바박!
“크아악!”
“컥…!”
“푸헉!”
눈 깜짝할 사이의 기습.
그리고 일직선 돌파.
무자비한 주먹과 발에 채인 자가 도대체 몇 명인가.
“후우……·.”
참았던 숨을 내쉼과 동시에.
쿵, 쿵, 쿠쿠쿵!
소년이 지나친 경로에 있던 점창 무인들이 썩은 짚단처럼 무너져 내렸다.
“……비아?”
소수로 떨어져 나와 협공을 받던 검은 수리들이 그제야 마른 비를 알아봤다.
“저… 녀석이 비아라고?”
“비아가 맞긴 한데, 저건 너무…!”
대다수 부족원들에게 있어 마른 비는 호기심 많고 놀러 다니기 좋아하는 철부지 꼬마일 뿐이었다.
힘을 키우기 위한 단련은 물론이고, 성년식 교육에도 참여하는 꼴을 본 적이 없다.
저 너른 하늘의 아들이니 어디 가서 객사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그의 잠재력을 눈치챈 극소수를 제외하면, 그에게 기대를 거는 부족원은 없었다.
한데 저 무력!
거침없이 적들을 깨부수는 위용을 보라!
성년식을 떠난 지 1년도 지나지 않았건만.
일진월보, 일취월장, 괄목상대…….
어떤 말로도 부족하다.
놀란 검은 수리들이 눈만 껌뻑이며 훌쩍 커버린 소년의 등을 바라봤다.
“족장의 아들이라 했더냐?”
설치는 꼴을 두고 볼 리 없다.
마른 비를 처음 본 한 명.
넘실대는 살기가 일직선으로 쏘아오고 있었다.
눈을 희번덕이는 공유환이 마른 비에게 쇄도했다.
“이런 사람이 또 있네?”
공유환을 본 마른 비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격퇴한, 백족으로 추정되는 남자도 그랬다.
기름을 바른 듯 번지르르한 얼굴과 훤칠한 외모.
운남 소수부족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외양이다.
하지만 말끔한 겉모습과 달리 전해지는 느낌은 더없이 음험하고 지저분하다.
존재의 특질을 파악하는 자연기의 공능이 공유환의 본성을 간파했고, 절대로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임을 경고하고 있었다.
첫 만남에 불쾌함을 넘어 메스꺼움까지 유발하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대리고성 성벽 위에서 호국영을 마주했을 때 그랬듯.
마른 비는 속마음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으… 기분 나빠. 너 진짜 최악이다.”
공유환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뭐 이런 미친놈이…! 삼 합! 삼 합이면 충분하다! 그 안에 애새끼의 목을 딸 테니 너희는 야만인 놈들을 막아라!”
공유환의 명령에 검은 수리들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삼십도 안 된 나이지만, 저놈은 보통 놈이 아니다.
전투 화장까지 발동한 동료가 일검에 허리가 양단되는 걸 똑똑히 지켜봤다.
당장 움직여서 마른 비를 구해야만 했다.
“비아…! 비아를 구출해! 저놈은 위험하다!”
몰라보게 강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대책 없는 꼬마다.
단독으로 적진을 파고든 마른 비는 전사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공유환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소년에게 가는 길은 가로막혔다.
여기서 비아를 잃으면.
족장의 얼굴을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
다급해진 전사들이 점창 제자들에게 달려드는 광경을 뒤로 하며, 마른 비와 공유환이 격돌했다.
“삼 합? 그 안에 날 이길 자신 있어?”
“차고 넘치지.”
싸우는 걸 봤다.
이 야만인 꼬마는 상당하다.
하지만 그뿐.
저 뒤에서 날뛰는 야만인 수장과 달리 충분히 제압 가능한 상대였다.
“네놈 모가지를 잘라내서.”
철컥.
“족장에게 던져주마.”
패애액-!
검은 수리의 허리를 가른 극속의 발검이 그어졌다.
“이걸로 전쟁은 끝이다.”
밀폐된 방안.
설지굉을 조롱하던 비틀린 흉소(凶笑)가 공유환의 입가에 번졌다.
“지금 꿈꿔?”
빠르다.
추격전을 겪기 전이라면 분명 이 검에 목숨을 잃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글쎄.
설검대 네 명이 합심해서 펼치는 검막을 보았고, 회색 눈을 가진 노인의 무지막지한 검속을 몸으로 겪었다.
무엇보다 그놈.
순간이동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쾌속하게 움직이는 검치호와 마주했다.
표정을 보니 알겠다.
이 남자는 자신의 빠르기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검치호의 털끝 하나 스치지 못한다.
구름 걷기, 낙엽 가누기.
한 줄기 연기처럼 스르륵 흩어진 마른 비가 공유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피잇!
오밀조밀한 근육으로 엮인 팔뚝을 검날이 긋고 지나간다.
추격전 내내 적들이 남긴 크고 작은 상처에 검상 하나가 더해졌다.
하지만 극도로 집중한 마른 비는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공유환의 발, 허리, 어깨가 그리는 동태를 눈에 담을 뿐이다.
‘얼굴!’
큰 기술도 필요 없다.
경쾌하게 차올린 왼발이 사선으로 솟구쳤다.
빠악!
“큽!”
가벼운 한 방.
안면에 직격한 발차기가 알싸한 통증과 함께 공유환의 코뼈를 뭉갰다.
마른 비는 바짝 긴장하며 이어질 공방을 준비했지만…….
허무하게도 그 한 방이 승부를 결정지었다.
요동치는 육체를 따라 검날이 흔들리고, 절대 흔들려선 안 될 부동심도 깨졌다.
검을 회수한 공유환이 발작적으로 검을 내쳤다.
“이런 썅! 쓰레기 같은 야만인 새끼가 감히…!”
패애애액!
수직으로 내리긋는 분광참이 사납게 떨어져 내린다.
실린 힘은 엄청나지만… 속도와 변화가 모두 거세됐다.
그저 분개하여 내지른 검일 뿐이다.
마른 비의 눈썹이 이해하지 못할 상황을 접한 것처럼 꿈틀댔다.
‘뭐야, 이거? 이 녀석, 지닌 힘에 비해…….’
투심(鬪心)이 여물지 않았다.
싸움이란 결코 상처 없이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놀이가 아니다.
적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나 또한 목숨을 버릴 각오로 임해야 하거늘.
어떤 순간에도 마음이 흔들리면 안 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한데 고작 얼굴 한 대 맞았다고 평정이 깨져?
이놈은… 전사가 아니다.
‘너저분한 원숭이 새끼가 감히 이 몸의 얼굴을 차?!’
야생에 던져져 스스로 생존을 일군 원시부족의 아이와, 전장에서조차 안전한 곳에 배치받은 문명인의 아들.
무엇이 인간을 강하게 하는가.
오래도록 이어진 장문인 독재 체제.
그의 아들이라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위치.
한 번도 제대로 된 타격을 허용해본 적 없는 공유환이다.
공지량을 제외하면, 문내의 비무에서 감히 그에게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공유환을 제압 가능한 자들도 그저 승패만을 갈랐을 뿐, 그를 상처 입혀 껄끄러움을 감수할 리 만무했다.
검은 수리와의 대결이 길어졌다면.
결과는 분명 다르게 나왔으리라.
“죽어어어어!”
공격이 실패했다는 점이 하나.
생애 처음 얼굴에 허용한 일격이 야만인의 발이라는 게 둘.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게 셋.
일전에 보여준 광기는 이유 없이 표출된 게 아니었다.
공지량은 아들을 잘못 키웠다.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전사 맞아?”
형편없다.
육신의 힘과 정신적 수양이 이토록 불균형한 인간은 처음 봤다.
흥분하여 내리그은 검을 손쉽게 피해내고, 다시금 차올린 발이 공유환의 얼굴에 깔끔히 꽂혔다.
“컥!”
한 방을 더 처맞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다.
싸움에서 흥분은 절대 금물이거늘.
서늘하게 가라앉은 가슴이 냉정함을 되돌려 주었지만, 늦었다.
마른 비의 어깨는 이미 전진하고 있었다.
쿠콰앙!
가까스로 검을 들어 올렸지만, 방어를 깨부순 어깨가 공유환의 가슴을 때렸다.
피를 뿌리며 날아간 공유환이 저 멀리에 풀썩 떨어져 내렸다.
“……뭐야, 대체? 별 희한한 놈이 다 있네.”
삼 합 안에 끝내겠다는 호언장담.
지긋지긋하게 쫓아오던 노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상당한 축에 속하는 무력.
하지만 예상과 달리 너무 쉽게 끝나버린 전투에 마른 비가 허무함을 감추지 못했다.
“대, 대사형…!”
일대일 결투를 지켜보던 모두가 굳어버렸다.
족장의 아들과 장문인의 아들.
중앙에서 피 튀기는 전투를 벌이는 양측의 대표들을 제외하면 가장 흥미진진하고 기대가 컸던 대결이다.
저 무시무시한 와족 전사를 일검에 쪼개버리는 걸 보고 공유환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게 뭔가.
초격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지만, 안면에 한 방을 허용한 순간, 공유환은 정신을 놓아버린 듯했다.
스스로의 화를 가누지 못해 감정적으로 내지르는 검이라니.
마른 비보다도 허탈한 건 지켜보던 점창의 제자들이었다.
“시간을 꽤 잡아먹을 줄 알았는데… 뭐, 좋네. 아저씨들! 왜 멍하니 있어요? 빨리 가요!”
“어… 어? 그, 그래, 알겠다! 비아야!”
뒤가 정리됐고, 껄끄럽던 지휘자가 쓰러졌다.
남은 건 잔챙이들뿐.
속박에서 벗어난 검은 수리들이 얄미운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을 앞지른 마른 비는 벌써 전방을 향해 뛰고 있었다.
그리고 저 뒤편.
숨 가쁘게 돌아가는 전장의 흐름과 동떨어져 자리를 지키던 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 선 발톱과 섬뜩한 이빨.
인축이나 야생의 짐승들을 습격하는 특성.
그리고 사나운 성질.
맹수라 불리기 위한 기본 요건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특히나 이 운남에선.
들소의 두개골을 일격에 부술 힘.
멧돼지의 목덜미를 짓이길 치악력.
강대한 야수들을 잠재울 거력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맹수라 불릴 자격을 얻는다.
하지만 맹수로 분류되는 짐승들이 모두 힘이 센 건 아니다.
힘과는 다른 능력으로 먹이사슬의 상부에 군림하는 맹수들도 있다.
민첩성.
압도적인 속도로 찍어 누르는 것.
존재를 포착할 틈도 없이 달려들어 사냥감의 숨통을 끊는다.
섬전처럼 흐르는 자줏빛 동체가 모습을 드러낸 응목대를 농락했다.
촤차악! 촤악-! 콰지직!
“어? 어? 끄, 끄아아아!”
인간의 몸뚱이는 야수처럼 튼튼하지 않다.
가볍게 할퀴는 것만으로 힘줄이 끊어지고, 근육이 절단난다.
거동 불능의 치명상을 입은 응목대의 정예들이 처절한 비명을 토했다.
“……늑대?!”
고통에 몸부림치는 응목대원의 목을 문 채.
맹수가 지석인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