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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05화 (105/463)

105화

커다란 표범에 버금가는 체고(體高)다.

날렵하게 뻗은 네 다리와 싯누런 안광.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짙은 남빛에 가까운 붉은색의 털이었다.

자줏빛이라 일컫는 그 색은 자연이 낳은 거라기엔 지나치게 강렬했다.

콰드득!

목뼈를 끊어 응목대원의 고통을 덜어준 맹수가 입가에 묻은 피를 핥았다.

“피 좀 핥지 말라니까.”

인상을 찡그린 매서운 눈이 하나뿐인 벗을 돌아보며 말했다.

“피에 굶주린 식인 짐승 같잖아. 끝까지 그 버릇 안 고칠 거냐?”

안 고치는 게 아니라 못 고친다.

이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달래도 보고, 혼내 보기도 했지만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가려운 곳을 긁듯 자연스런 야수의 습성이라는데 어쩔 것인가.

가볍게 고개를 저은 매서운 눈이 지석인에게 말했다.

“내 반려수 ‘외톨이’다.”

와족어로 붙인 이름을 지석인이 알아들을 리 없다.

알아들었다면 기가 막혔을 거다.

뚝뚝 떨어지는 인간의 피를 핥고 있는 짐승의 이름이 외톨이라니.

“네놈들 언어로 바꾸면… 아, 몰라. 아무튼 그 잘난 정보에 이놈도 있었나?”

“…….”

“없겠지. 늑대 주제에 날 만나기 전부터 무리를 버리고 혼자 싸돌아다니던 놈이거든. 그 이상한 습성이 지금도 남아 있어서 나랑 붙어 있는 경우가 없다.”

이름이건 만나게 된 경위건 그딴 건 관심 없다.

중요한 건 갑자기 나타난 저 야수가 어느 정도의 힘을 지녔냐는 것.

감각을 총동원해 자줏빛 늑대를 탐색한 지석인이 눈살을 좁혔다.

‘저 짐승… 강하다…!’

자신의 동체시력으로도 포착하기 힘든 쾌속한 움직임.

그리고 몸뚱어리 내부에 웅크린 막강한 기운.

저 늑대 하나를 잡는 것만으로도 응목대 태반이 쓸려나갈 게 틀림없었다.

‘이건… 위험하군.’

지난 십여 년간, 죽이고자 한 대상을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척살할 수 있었던 건 표적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토대로 십 할의 승산이 섰을 경우에만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다.

변수가 끼어드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아니, 아무리 철저한 계획을 수립해도 막상 실전에 돌입하면 변수는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모든 걸 극복해왔지만, 이번 표적은 지나치게 강했다.

더군다나 민첩함에 특화된 부류.

암습을 주특기로 삼는 응목대에게 매서운 눈 같은 유형은 상당히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검사가 검을 들 듯 짐승이 더해진 와족은 전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수많은 정보를 취합해 내린 결론이다.

그렇다면.

“빠진다.”

지석인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매서운 눈을 둘러싼 응목대가 푹 꺼지듯 사라졌다.

“허? 뭐야, 이 병신들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는 거냐?”

매서운 눈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불확실한 싸움을 할 필요는 없지. 어차피 네놈들은 시간이 많지 않….”

키이이잉-!

그믐이 그랬듯.

매서운 눈 또한 아직 발동 전이다.

그의 얼굴을 뒤덮은 형형색색의 전투 화장이 번쩍였다.

“주둥이 열 시간에 부하들과 바로 빠졌어야지. 일단 너부터 뒈져라.”

흉흉한 미소와 함께, 지석인의 목을 따기 위해 전사와 맹수가 바람을 갈랐다.

쒜에에엑-!

전장이 확대되며 달려든다.

마른 비는 급격히 전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충천하는 기세와 농밀한 투기.

여기부터가 진짜다.

소년의 입이 열렸다.

“흰둥아!”

“크아아앙!”

하지 마라.

그 이름 진짜 마음에 안 든다.

뭐든 좋으니 다른 이름을 좀 붙여다오.

어느새 후방의 이, 삼대 제자들을 흩어버린 백호가 마른 비의 곁에 따라 붙었다.

“가자!”

오래전부터 호흡을 맞춰온 것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백호의 등에 훌쩍 올라탄 마른 비가 방패로 구성된 방벽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저기야!”

누가 있는지는 모른다.

그저 기운을 느낄 뿐.

이 근방에서 가장 강한 전사가 저곳에 있다.

그 지점에서 일직선으로 쭉 뻗어나간 곳.

비교도 할 수 없이 강대한 기운이 전장 한복판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마른 비에게 매우 친숙했다.

‘매서운 눈 아저씨!’

저곳이다.

눈앞의 방벽을 허물고 전사들을 저기까지 이끌어야 한다.

살아난 불씨를 화염으로 폭발시킬 수 있는 경로가 소년의 눈엔 보였다.

“뛰어!”

“커어어엉!”

훌쩍 뛰어오른 백호가 바위 곰 전사들을 뛰어넘었다.

물고 물리는 전장의 최일선.

먼저 떨어져 내린 건 마른 비였다.

“타아아앗!”

발그림자가 허공을 수놓는다.

수를 늘리며 사선으로 내리꽂히는 그것은 환영과 같은 족격일지니.

맑은 아침 하늘, 피륙으로 이루어진 소낙비가 내렸다.

두두두두두!

방패, 창, 검.

간신히 유지하던 진형이 허물어진다.

전투 화장을 발동한 바위 곰 전사들에 의해 마모된 방벽은 머리 위에서 내리꽂힌 급습을 버텨낼 수 없었다.

“으엉?!”

푸른 불꽃을 담은 눈들이 휘둥그레졌다.

갑작스레 등 뒤에서 난입한 무언가가 적진을 깨부쉈다.

그리고 이 녀석은…!

“비아?!”

“꼬맹이!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이런 난데없는 등장이라니!

아이들이 습격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하지만 무모하다.

여긴 싸움을 모르는 꼬마가 끼어들기엔 지나치게 흉험한 전장이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뒤로 물러서라! 비아, 네가 낄 곳이 아니야!”

“아저씨. 걱정해 주셔서 고마운데, 저도 전사예요. 힘을 보태서….”

“당치 않은 소리! 반려수를 길들이지 못한 자는 전사가 아니다! 당장 물러…!”

“크허허허헝!”

쿠콰콰카캉!

휘두르는 앞발에 방패와 사람이 한꺼번에 날아오르고, 전진하는 송곳니에 핏물이 흩날린다.

범접할 수 없는 위용을 드러내는 백색 영수가 전장을 찢어발겼다.

“제 친구예요. 전사 맞죠?”

전장 한가운데 피어오른 소년의 미소에 전사들은 할 말을 잃었다.

“흰… 호랑이? 운남에 저런 놈이 있었나?”

“색깔이 중요한 게 아냐! 저, 저놈! 자연기가…!”

“맙소사…! 각성한 놈이라고?”

경악이 줄을 잇는다.

하지만 아직 놀라긴 이르다.

마른 비를 힐끔 돌아보는 백호의 눈!

전사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 저놈 저거! 눈 색깔이…!”

“파란색?! 설마…!”

살아남은 새끼가 있었는가!

전 애뢰산 산군이 죽임을 당했을 때 몰살한 줄만 알았다.

탄성을 지르는 전사들 사이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확실하군. 저 색깔이 자연적으로 발현되는 핏줄은 운남 전체를 뒤져도 하나밖에 없지. 저놈, 푸른 눈의 혈통이다.”

‘거친 모래 아저씨였구나!’

멀리서도 감지되던 강렬한 기운.

바위 곰 고위 전사 거친 모래가 여기에 있었다.

“아저씨! 이리로 쭉 가야 해요!”

날아드는 공격을 피해내며, 마른 비가 외쳤다.

“안다. 나무표범 전사들이 고립된 곳까지 가야 한다는걸. 하지만 쉽지 않아. 계속해서 밀어내고는 있지만, 적들도 필사적이야. 뒤에 분단된 검은 수리들이 합류하지 않으면 돌파력이….”

“갑시다. 거친 모래.”

숨을 몰아쉬며 다가온 이는 수리의 눈을 이끄는 고위 전사였다.

“아니! 어떻게?”

“비아 덕이오. 저 녀석이 후방을 무너뜨린 덕에 빠져나올 수 있었지. 뻔한 분산책에 휘말려 미안하오.”

“비아가?!”

놀라움을 담은 눈길들이 마른 비에게 모아졌다.

‘허어… 역시 족장님의 핏줄인가…! 철부지 꼬맹이가 어느새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구원군.

비아는 큰일을 해주었다.

주먹도 여물지 않은 꼬맹이가 이토록 분전해주었는데, 어찌 매가리 없는 모습을 보일쏘냐?

이를 빠드득 깨문 거친 모래의 외침이 전장을 울리며 터져 나왔다.

“전사들은 들어라! 전장을 넓게 밀어 치던 병력을 한곳에 모아 일점 돌파한다! 힘을 집중하여 단번에 부 족장이 있는 곳까지 치고 올라갈 것이다!”

“오오오오!”

좋다.

검은 수리가 돌아왔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적들의 방벽은 거의 허물어졌고, 나무표범이 고립된 곳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도끼와 비수.

여기에 창이 합쳐지는 순간, 적들은 와족의 진정한 저력을 깨닫게 되리라.

“형제들이여! 무도한 적들을 쳐부숴라! 가자!”

힘차게 대지를 밀어낸 거친 모래의 뒤로, 푸른 귀화를 눈에 담은 와족의 전사들이 날아올랐다.

* * *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피가 내를 이루는 전장.

그 살벌함을 가까스로 비켜낸 원형의 방진 안에서, 공유립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형제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췄다.

“점창은 썩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전장의 아우성이 꿈만 같다.

방금 전까지 그 안에 몸담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사문에게 버림받았다는 잔혹한 진실이 피부를 헤집고 뼈에 사무친다.

방패로 둘러싸인 원형의 방진은, 그래서 고요했다.

“저들은 우릴 버렸고, 우리가 이대로 남아 생을 구한다 해도 비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

“하지만 생각해라. 잘못을 저지른 자가 누구인지를. 점창을 썩게 만든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이다.”

모두가 안다.

어찌 무고한 사문의 식구들을 탓하랴.

자신들이 그랬듯, 전쟁에 임해 떨어지는 명령을 주워 담기 바쁜 자들이다.

명령을 내린 자.

이런 잔혹한 짓을 획책한 건 극소수의 수뇌부라는 걸 모두가 안다.

그저… 가슴을 후비는 배신감에 심신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울 뿐이다.

“난 갈 것이다.”

축 처져 생각에 잠겨 있던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형제들이 차가운 땅에 쓰러지고 있다. 난 그들을 살리기 위해 다시 전장으로 간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저 정신 나간 자들에게 죄를 물을 것이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안다.

여기 남는다 해도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것임을.

공유립의 말대로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상처를 입어 거동이 어려운 자.

치솟는 울분에 도저히 싸울 마음이 들지 않는 자.

간신히 지켜낸 목숨을 부지하고 싶은 자까지.

절반 가까이가 남았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공유립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심신은 피폐하지만,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결단을 내린 그들의 눈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로 빛나고 있었다.

선두에 선 공유립의 좌우로 여규와 원승이 따라붙었음은 물론이다.

맹수처럼 날뛰는 소년과 하얀 짐승이 전장을 가르는 그곳으로.

이날 이후, 점창의 찬란한 미래를 열어젖힐 자들이 움직였다.

* * *

타다다닥! 쒜엑―!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만 힘을…!”

가파른 숲길을 주파하는 사내가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등에는 사람 한 명이 업혀 있었는데,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보아 달리는 자보다 업혀 있는 자가 더 힘들어 보였다.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고집을 부려서 미안하다. 하지만 꼭 가야만 하느니…….”

“그런 말씀 마세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내의 얼굴에는 지극한 공경과 안타까움 섞인 걱정이 버무려져 있었다.

들쳐 업은 사람의 안위를 염려하는 게 틀림없었다.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

업힌 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 * *

쐐액-! 쾌애애액!

좌, 그리고 우.

구릿빛 번개와 자줏빛 섬광이 쇄도한다.

전투 화장을 발동한 매서운 눈과 그 기운에 동화된 외톨이의 속도는 눈으로 좇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쩌저정!

“큭!”

막아낸 게 기적이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검에 주입한 지석인이 가까스로 매서운 눈의 공격을 상쇄했다.

“크아앙!”

촤악-!

‘크윽! 가, 감각이…!’

반사적으로 상체를 틀었지만, 완전히 흘리지 못했다.

옆구리가 뜯겨나간 걸까?

모르겠다.

맞긴 맞았는데 피해를 가늠할 겨를이 없다.

지석인은 늑대의 앞발이 긁고 간 옆구리를 내려다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몸을 뒤로 물렸다.

“도망갈 수 있을 것 같나?”

사나운 눈초리가 빛을 담고 번쩍였다.

‘죽는다!’

지석인의 눈에 절망이 차올랐다.

하나라면.

하나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텐데!

응목대를 물릴 때 같이 빠졌어야 했다.

허나 아무리 빨라도 후회는 늦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가?

검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짓쳐오는 두 줄기 섬광이 그의 망막을 채웠다.

“대주님! 뒤로!”

지석인을 살린 건 그가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수하들이었다.

후퇴했던 응목대의 정예들이 솟아오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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