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콰지직! 푸화아악!
결연히 몸을 날린 응목대가 산산조각 나는 사이, 지석인은 가까스로 방패의 벽 뒤에 안착할 수 있었다.
“호, 호검대주!”
“가오!”
꽈꽈꽝!
방패, 장창, 그리고 호검대와 응목대.
거침없이 적들을 분쇄하던 전사와 맹수도 그 앞에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매서운 눈이 뭐라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는 찰나, 하얀 바람이 불어왔다.
“크와아아앙!”
푸화아악!
그 독특한 빛깔은 한순간에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새하얀 빛줄기가 내리꽂히고, 매서운 눈이 두드렸던 방패의 벽을 뛰어넘은 영수가 전장 한복판에 피분수를 뿜어 올렸다.
“……뭐야, 저건? 흰 호랑이? 자연기를 빌려 쓰는 게 아니잖아? 각성? ……푸른 눈?”
난데없는 백호의 출현에 얼떨떨해진 매서운 눈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쿠콰쾅!
내달려와 부딪힌 소년의 어깨에 방패의 벽이 출렁였다.
“크으…! 엄청 단단하네!”
“……이건 또 뭐야? 내가 환각이라도 보는 건가? 비아? 네가 왜 여기서 튀어 나와?”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된다.
한쪽 눈썹을 추켜 올린 매서운 눈이 소년을 내려다봤다.
“나무표범! 당장 합류해라! 진형이 갖춰지는 대로 돌격하여 방벽을 뚫는다!”
힘을 집중시키자 돌파는 한순간이었다.
망치로 두드려 박은 쐐기와 같이 바위 곰과 검은 수리 전사들의 일점 돌파는 얼마 남지 않은 적들의 포위를 헤집었다.
마침내 나무표범이 고립된 곳까지 다다른 그들은 거친 모래의 지휘 하에 진형을 가다듬었다.
“으엉?”
적진 한가운데서 분투하던 매서운 눈이다.
응목대의 암습 이후 주위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어느새 등 뒤에 늘어선 전사들을 보며, 그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어떻게? 설마… 비아, 네가 한 거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마른 비가 여기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난다.
그리고 이 꼬마가 아니면 갑작스런 전황의 변화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말이 안 된다고 느끼면서도 매서운 눈은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잘했죠?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아저씨가 전사들을 이끌고 전장을 일주해야 해요.”
“…….”
매서운 눈은 그제야 눈을 들어 후미를 살폈다.
후방에서 알짱대며 전사들의 돌파를 방해하던 파리 떼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인가? 이 꼬마가 그놈들을 처리하고 전사들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새삼스런 눈길이 마른 비를 향했다.
‘성년식을 다녀오면 확 달라져 있을 게다.’
푸른 대나무 숲에서 그믐이 했던 말이 매서운 눈의 뇌리를 스쳤다.
그믐의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다.
일 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장족의 발전을 이뤄낸 소년이 눈앞에 있었다.
“저 흰 호랑이… 네가 길들인 거냐?”
매서운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홀로 적진을 파고든 백호는 전장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있었다.
몸집과 근육의 형태로 보아 아직 성장 중인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저 정도라니…….
몰라보게 강해졌다지만, 마른 비의 설익은 무력으로 때려눕힐 수 있는 녀석이 절대 아니었다.
마른 비도 그 의중을 짐작했다.
“안 싸웠어요, 우린. 그냥 자연스럽게 친구가 됐어요.”
‘홀로 각성을 이룬 놈이 굴복하지도 않고 따라 다닌다고? 그게 가능한가?’
혼란의 연속이다.
이 괴짜 같은 꼬마는 상식을 연달아 파괴하고 있었다.
저 짐승만 해도 그렇다.
그 희귀함으로 인해 중원에선 신수(神獸)니 뭐니 호들갑을 떠는지 몰라도, 사실 저 새하얀 털은 열등한 개체라는 증거다.
설원이라면 모를까.
눈이 수북이 덮인 지역을 제외하면, 자연 지형 어디에 위치해도 눈에 띄기 때문에 사냥에 지극히 불리하다.
와족 내부에서 구전되어온 이야기도 증명하고 있다.
힘, 속도, 감각.
몇 세대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흰 호랑이들은 하나같이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고 했다.
심지어 수명도 짧다.
끌림을 느끼는 대상이 하나로 한정된 것도 아닌 이상, 제정신 박힌 와족 전사라면 흰 호랑이를 반려수로 삼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데 강하단 말이지.’
다 필요 없다.
열등이고 뭐고 간에 홀로 각성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끝났다.
더군다나 푸른 눈의 혈통인 게 확실하다면야.
싸우지도 않고 인간을 따라온 점.
벗을 내버려두고 저 혼자 좌충우돌 날뛰는 모습.
위대한 혈통을 타고났으나 영 정상은 아니라는 것.
마른 비와 판박이다.
매서운 눈이 스리슬쩍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저를 꼭 닮은 희한한 놈을 주워 왔구만.’
외톨이를 데려왔을 때, 그믐이 혀를 차며 했던 말이지만 매서운 눈은 기억하지 못했다.
“부족장! 준비가 끝났소이다! 돌파하겠소!”
거친 모래의 보고를 들으며, 매서운 눈의 입술이 열렸다.
“꼬맹이. 쓸 수 있겠냐?”
마른 비가 매서운 눈을 올려다봤다.
“잘 들어라. 아무리 강한 짐승도 머리를 잃으면 끝이야. 전사들이 충돌하는 순간, 너와 나는 적들의 머리를 친다.”
거친 모래와 검은 수리 고위 전사는 전투를 지휘해야 한다.
그믐이 장담했던, 마른 비의 괄목할 만한 성장.
산과 안개 걸음이 그렇듯 놀랍게도 느껴지는 기운은 어지간한 성인 전사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믿어본다.
“지휘자를 말하는 거죠?”
“그래. 저놈, 그리고 저놈이다.”
“쓸 수 있어요.”
실전에선 처음이지만, 부단히 연습해왔다.
할 수 있다.
그리고 해내야만 한다.
마른 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좋아. 믿겠다, 꼬맹이. 준비해라!”
‘할아범 말대로 네가 재능이 있다면, 여기서 보여 봐라!’
매서운 눈이 질겁하며 진형을 추스르는 지석인과 호검대주를 바라봤다.
방패?
바위 곰이야말로 와족의 최일선을 담당하는 방패이자 도끼다.
창?
나무표범은 적들의 심장을 꿰뚫을, 살아 움직이는 창날이다.
비수.
검은 수리의 암습은 적들이 알아채기도 전에 목덜미를 찢는다.
바위 곰. 나무표범. 수리의 눈.
비로소 하나의 진형을 이룬 와족 전사들의 투기가 범람하는 강물처럼 적들을 덮쳤다.
“오오오! 형제들이여! 적들을 깨부숴라!”
거친 모래의 함성은 요격의 봉화일지니.
“죽지 마라, 꼬맹이!”
매서운 눈과 마른 비의 신형이 바람을 타고 흘렀다.
“크허어어엉!”
따로 말하지 않아도 뜻은 전해졌다.
전장을 휘젓던 백호가 한 발 앞서 허공으로 도약했다.
“음?!”
점창을 대표하는 검대의 수장.
호검대주는 백전을 거친 절정의 무인이었다.
반전한 그의 손에서 검이 뽑혀 나왔고, 후방에서 날아든 백호의 발톱과 마주쳐갔다.
쩌저정!
“크읍!”
검을 쥔 손에 핏줄이 도드라지고, 이마에는 푸른 힘줄이 솟는다.
내리찍은 발톱과 호검대주의 검날이 부딪히며 쇠붙이가 갈리는 굉음을 울렸다.
“뒈질 시간이다. 이 새끼야.”
매서운 눈도 적들의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뒤꿈치에 막강한 자연의 기운이 담겼다.
허공을 격하고 떨어져 내리는 분노는 불을 머금은 벼락이니, 전장에 선 자들은 우레가 밀려오는 환청을 들었다.
하지만.
떨어져 내리는 맹격 앞에서, 지석인은 웃었다.
“정보는 곧 힘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아둔한 놈. 그 기술을 쓸 줄 알았다.”
설검대주와 싸웠을 때를 시작으로, 불벼락은 여러 차례 노출된 기예다.
대비를 안 했을 리 없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내리꽂는 뒤꿈치 내려찍기.
강력한 만큼 빈틈도 크며, 시야와 움직임이 제한된다.
엄청난 속도로 치고 들어와 공격을 받는 자의 회피를 제한하지만, 시전자도 공격 궤도를 제외하면 무방비나 다름없다.
“쳐라!”
스파파파팟!
점창 제자들 틈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응목대 전원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그래. 너도 쳐라, 외톨이.”
패애애애액-!
그것은 매서운 눈의 주위를 공전하는 자줏빛 천체(天體)와 같았다.
쾌속하게 휘도는 늑대의 발톱이 허공에 뜬 인간들의 골육을 폭죽처럼 터뜨렸다.
“저 짐승이이이!”
사력을 다한 일검이 뿜어졌지만, 애초에 전면전은 지석인의 특기가 아니다.
뻐엉! 하는 폭음과 함께 공지량의 곁을 20년간 지켰던 수족의 머리가 터졌다.
“정보는 개뿔. 싸움은 대가리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거다. 멍청아.”
사뿐하게 착지한 매서운 눈이 중얼거리며 옆을 돌아봤다.
마른 비의 뒤꿈치가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그그긍!
기술.
아직까지 힘과 속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백호에게 부족한 것이다.
인간이 강대한 짐승들을 꺾을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푸른 기운이 이글거리는 발톱을 측면으로 흘린 호검대주가 검을 휘둘렀다.
분광검의 묘를 실은 참격이 그어지고, 백호의 어깨에 묵직한 상흔이 남았다.
“크아앙!”
통증에 울부짖은 백호가 재차 달려들려는 찰나, 소년의 일격이 떨어져 내렸다.
‘집중해! 확산형이 아니야. 응축시킨 자연기를 일점에 가두어 터뜨린다!’
진정한 불벼락의 구현이다.
도약, 회전, 체중, 가속도, 그리고 자연기.
쓸 수 있는 모든 걸 집약한 마른 비의 뒤꿈치가 호검대주를 덮쳤다.
“카아아압!”
쩌저저저정! 콰쾅!
‘막았어?!’
절정의 경지에 발 들인 무인은 녹록치 않았다.
검기를 수 겹 덧댄 방어형 기의 방벽이 물리적 타격을 상쇄했고, 우위에 선 내공으로 불벼락의 폭발력을 내리눌렀다.
“크어엉!”
휘악!
불벼락의 충격력에 주춤했지만, 호검대주는 그 와중에도 등 뒤에서 날아든 백호의 앞발을 피해냈다.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은 마른 비의 움직임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이 우직한 무인은 기합성 외에는 일언반구도 없이 싸움에 집중할 뿐이다.
지그시 밟은 오른발을 축으로, 꿈틀대는 어깨가 이어질 참격을 예고했다.
이미 착지한 마른 비의 눈은 그의 몸을 수직으로 타고 오르며 가상의 선을 그리고 있었다.
‘꼬마가 한 발 빠르다! 뭔지는 몰라도 수직으로 올라오는 공격. 피해내고 역공으로 절단한다!’
설지굉과의 싸움에서 느낀 바가 없는 걸까?
또다시 투로를 읽혔다.
호검대주가 중선오격의 간격에서 몸을 빼내려는 찰나, 마른 비의 왼발이 빠르게 쏘아졌다.
시선은 여전히 중선오격의 투로를 따르고 있었다.
빠악!
짧고 간결한 단타가 축이 되는 오른발을 후려쳤다.
중선오격의 예고는 눈속임일 뿐.
허초까지 갈 필요도 없이 투기와 시선만으로 적을 속여 넘긴다.
마른 비의 의도를 간파할 능력이 안 되는 하수들에게는 무용한 짓이지만, 고수들과의 대결에선 이처럼 유용하다.
설지굉과의 목숨을 건 전투는 마른 비에게 고수들을 격침시킬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크헉!”
예상치 못한 일격.
내공을 둘러쳤을 리 만무하다.
발끝에만 자연기를 집중시킨 족도(足刀)가 호검대주의 정강이뼈를 분질렀다.
휘청거리는 육체.
올빼미 사냥, 강습이 턱 끝을 스치자 의식을 잃은 호검대주가 무너져 내렸다.
“후우…….”
백호 없이 혼자 달려들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어쨌든 이겼다.
무려 점창을 대표하는 검대의 수장을 상대로.
열다섯.
소년은 이미 전사라는 호칭을 짊어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럴 수가!’
매서운 눈은 진심으로 놀랐다.
자신이 저 나이 때 저 정도의 적을 꺾을 수 있었을까?
어림도 없다.
외톨이와 함께라면?
승산이 높아지긴 하겠지만, 그 역시도 자신 없다.
정보 운운하며 암습밖에 할 줄 모르는 멍청이와 달리 마른 비가 눕힌 자는 전면전에 특화된 전사였다.
놔두면 껄끄러워지는 암습자를 빠르게 처치하고 가세하려 했건만.
소년은 자신의 벗과 함께 적의 수장 중 하나를 멋지게 눕혔다.
‘차기 족장은… 비아가 되겠군.’
산과 안개 걸음도 엄청나게 강해졌지만, 이 녀석한텐 안 된다.
저녁노을? 글쎄…….
그 꼬맹인 좀 기대가 되지만, 지금 비아의 움직임을 보니 아무래도 어려울 듯싶다.
“오오오오오!”
매서운 눈과 마른 비가 적장을 거꾸러뜨리는 사이, 거친 모래가 이끄는 와족의 전사들은 우측 전장을 완전히 제압했다.
온전한 진형을 이룬 와족 전사들의 돌파력은 가공하기 그지없었다.
대파된 점창 진형이 무너지고, 수많은 이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땅에 몸을 누였다.
지휘자를 잃고 지리멸렬한 무인들이 사색이 되어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동한다! 빙 둘러서 후방을 정리하고 할아범이 있는 좌측 전장의 배후를 들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