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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07화 (107/463)

107화

마른 비가 살려낸 불씨가 마침내 화염으로 번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때맞추어 불꽃을 더 크게 피워 올릴 강력한 우군이 도착했다.

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동남쪽 언덕.

짙게 드리운 음영을 뚫고, 연녹색 옷자락을 사박거리는 여인이 푸른 빛 죽장을 높이 들어 올렸다.

“어머니 대지께 바라오니 상처 입은 생명들을 치유하소서.”

휘오오오―

잘게 뭉쳐 날아든 연녹색 자연의 기운이 드넓은 전장에 내려앉는다.

아침 햇살을 가르며 명멸하는 그것은 대낮에 출현한 반딧불이의 날갯짓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 이것!”

신체의 자연 치유력을 증대시키는 이 기운!

그녀다.

부족 유일의 주술사 잎의 노래가 전장에 당도했다.

“할멈이다! 할멈이 오셨어!”

“굽은 뿔이 죽… 는 바람에 쓰러지셨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 벌써 움직이셔도 되는 건가?”

전사들과는 다르다.

대자연의 기운과 공명하며 영적인 영역을 탐구하는 주술사의 특성.

반려수와의 교감 역시 일반 전사들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하물며 반백 년.

기나긴 세월을 함께 한 벗의 죽음은 그녀의 정신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아버지 하늘이시여. 당신의 아들딸들에게 적들을 부술 가없는 용기를!”

“어머니 대지시여. 당신의 요람에서 비롯된 자들이 대자연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연녹색 기운에 이어 주황과 노란빛 기운이 연이어 전장에 스민다.

전사들이 입을 떡 벌리며 경악했다.

“하, 하나가 아니야?”

“이런 광범위 주술을 세 개나?!”

“이래도… 괜찮으신 거야, 할멈?”

치유. 고무. 그리고 감각 증폭.

단일 개체가 아닌, 전장 전체에 들이붓는 술력의 파도다.

몸이 정상이어도 펼치기 힘든 대단위 축복이 연달아 쏟아져 내렸다.

“오… 오오오!”

“모, 몸이!”

바닥을 쳤던 체력이 차오른다.

당장 전투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효과가 뚜렷해지리라.

이는 미미하게나마 전투 화장의 지속 시간을 늘리는 결과로 이어질 게 틀림없었다.

적들의 창검을 헤칠 용기가 샘솟고, 날아드는 검날을 감지할 감각이 극대화된다.

잎의 노래가 선사한 자연의 축복은 전투 화장의 효능과 맞물리며 전사들의 기량을 대폭 끌어올렸다.

“쿨럭! 컥…!”

“하, 할멈!”

운남 남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부족의 영묘에서 창산까지.

어언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을 검은 수리 전사의 등에 업혀 이동한 잎의 노래다.

그것만으로도 가뜩이나 손상된 정(精) · 기(氣) · 신(神)이 더욱 망가지기에 충분하거늘.

말릴 틈도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전장을 내려다본 그녀는 광범위 주술을 연달아 퍼부었다.

“무리하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검은 수리 전사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발만 동동 굴렀다.

주술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게 있다.

전장의 상공에 응집되었던 그 어마어마한 기운.

잎의 노래가 지고한 술력을 지니고 있다한들 절대 남발 가능한 주술일 리 없다.

생명.

그녀는 자신의 생명력과 맞바꾸어 주술을 펼친 게 틀림없었다.

“……보아라.”

한 움큼 토해낸 피를 소매로 닦아내며,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흐릿해진 눈동자는 전장의 끄트머리를 향해 있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아이들마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이 늙은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것뿐이야. 전쟁을 빨리 끝낼수록… 목숨을 잃는 사람은 줄어든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 하겠느냐.”

안다. 그 심정을.

왜 모를까.

그 마음을, 거기서 비롯된 희생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붉어지는 눈시울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검은 수리 전사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잎의 노래는 전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또한, 때가 되었지.’

한 달 전, 동쪽에서 반짝인 힘의 태동.

그것은 새로운 술력의 발현이자, 어머니 대지가 그녀에게 전하는 귀띔이었다.

주어진 소명을 마치고 그 품으로 귀의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전언이나 다름없었다.

대대로 부족의 주술사는 한 명이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차세대 술사가 힘에 눈을 뜨면 기존 술사의 생명은 서서히 스러진다.

그건 달이 지고 해가 뜨듯 자연스런 섭리였다.

‘다행히도 어머니 대지께서 이 힘을 사용할 기회를 허락하셨구나.’

푸릇한 생명을 하나라도 더 살리기 위한 일이다.

당장 이 자리에서 숨이 끊어진다 해도 서슴없이 이리했을 거다.

아까울 게 무엇인가.

평생토록 쌓아 올린 술력과 남은 생명력을 이렇게 태울 수 있어서 여한이 없다.

연신 피를 토해내면서도 잎의 노래는 웃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서둘러 전쟁이 마무리되기를.

하나라도 많은 목숨이 살아남기를.

흐려지는 그녀의 눈이 전장의 끝자락, 어머니 대지가 점지한 차기 술사를 담았다.

“좌전방! 발 밑! 산이 오빠, 피해요!”

퀴아악-! 서걱!

검날이 앞머리를 가르고 지나간다.

눈앞을 스치는 검날에도 산은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부릅뜬 눈으로 검의 궤도를 역추적할 따름이다.

빠악!

짧게 끊어친 주먹이 암습에 실패한 응목대원의 안면을 뭉갰다.

과하게 힘을 쓸 필요가 없다.

적절한 시점.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유효타.

암습자를 침묵시킨 산이 곧바로 빠지며 자세를 낮췄다.

턱밑까지 끌어올린 두 주먹 위로 날카로운 안광이 빛난다.

성년식을 떠난 마른 비가 야생을 헤매는 동안, 산은 와족 고유의 대인 전투 자세를 완벽히 몸에 붙였다.

“걸음이 오빠! 후퇴해요! 그쪽은 사지야!”

“알았다! 여울아!”

맑은 여울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안개 걸음과 청년 전사 셋이 지체 없이 뒤로 빠졌다.

스스스-

부서진 상노의 잔해 속.

인간이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는 비좁은 공간에서 검은 옷의 남자가 유령처럼 솟아올랐다.

“…….”

땅 밑.

무질서하게 흐트러진 화살 더미 아래.

피 칠갑을 한 채 죽어 나자빠진 줄 알았던 시체까지.

안개 걸음이 전진하는 경로를 따라 한발 앞서 잠복해있던 응목대원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저 계집이 문제다.”

후방에 남아 연노와 상노 부대를 지휘하던 11조 부 조장 준해가 이를 갈았다.

‘감각이 뛰어난 건가?’

지석인을 따라나선 정예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곳에 남은 응목대 역시 어수룩한 자들이 아니다.

후방의 하늘에서 내리꽂힌 급습.

맹금류들과의 연계.

연노를 쥐었던 이, 삼대제자들이 죽어나가던 말던, 상노를 조작하던 삼십 명의 응목대는 반전하여 적들을 요격했다.

처음 몇 번은 성공했으나, 여울이 적극적으로 전장에 개입하는 순간 상황은 급변했다.

‘어디에 숨건, 어떤 공격을 준비하건 모조리 알아챈다. 느껴지는 힘은 형편없는데, 어떻게…!’

게다가 야만인 소녀를 보좌하듯 좌우를 막아선 덩치 큰 녀석과 길쭉한 녀석.

얼굴로 보아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놈들이 분명한데, 정면으로는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었다.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저 계집부터 처리해야 해. 다른 놈들은 공격을 받기 전까진 우리 위치를 가늠하지 못한다.’

“살아남은 이, 삼대 제자들은 전부 적에게 달려들어라!”

준해의 명령에 연노 부대의 잔존 인원이 악을 쓰며 돌진했다.

‘정면? 와라! 절대 지지 않는다!’

전장에 스며들어 투지를 고양시킨 이 힘.

불굴의 기개가 샘솟고, 기력이 회복되며,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다.

그리고 전투 화장.

산은 누가 오든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휘휘휙-!

견제타로 쓰던 왼 주먹 한 방에 적들이 펑펑 나가떨어진다.

휘돌아 전진하는 어깨에 대기가 요동치듯 울린다.

이것이 고위급 전사들이 보는 풍경이다.

의지가 향하는 대로 춤추는 육신의 이끌림!

산은 흡족하게 웃었다.

쒜엑- 쒝! 쒜에엑―!

“엇?!”

미소가 지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살아남은 응목대 이십 명이 분투 중인 청년 전사들을 뛰어넘어 한꺼번에 여울에게 쇄도했다.

소녀의 티 없는 눈망울이 커다래졌다.

“안 돼! 여울아!”

산의 외침이 터져 나오고,

“저 계집을 잡아라! 저년만 없애면…!”

득의에 찬 준해가 명령을 내리는 순간,

“너 지금 여울이 누나한테 욕한 거야?”

새하얀 섬광과 함께 소년이 당도했다.

“뭐, 뭔…?!”

흠칫하며 고개를 돌린 준해가 마지막으로 본 건, 급속도로 확대되는 주먹이었다.

빠악!

안면이 함몰되어 추락하는 준해가 땅에 닿기도 전에,

“커허헝!”

백색 영수의 발짓에 피에 물든 검은 옷들이 흩날렸다.

“비켜! 이 새끼들아! 어디서 시시껍적한 것들이 우리 애들을!”

빠바바바바박!

뒤이어 당도한 매서운 눈과 와족의 전사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숨 돌릴 틈 없이 몰아치는 그들의 진격에 후방 전선의 잔존 인원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쓸려나갔다.

“시간이 없어! 우린 바로 간다! 비아, 넌 청년 전사들과 함께 뒤꽁무니를 쫓아오는 놈들을 막아라!”

“알겠어요, 아저씨!”

우측 전장에서 불붙은 화염이 후방마저 집어삼켰다.

질풍처럼 휘몰아치는 와족 전사들의 돌진은 그믐이 있는 좌측 전장, 공지량의 뒤통수를 향해 있었다.

“…….”

한순간에 정리되어버린 상황에 멍해진 청년들이다.

눈만 끔뻑이던 산이 달라붙은 입술을 겨우 뗐다.

“어… 비아, 네가 왜…….”

“여기서 튀어 나오냐고? 그렇게 됐어! 쟤는 내 친구 흰둥이! 정신 차려, 형! 적들이 와!”

묵직하게 가라앉은 기세.

지금껏 돌파한 적들에 비해 느껴지는 기운 자체는 강하지 않다.

하지만 그들과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감지되는 무리였다.

상대가 되지 않는 걸 뻔히 알면서도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결연함? 비장함?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단한 의지가 여기까지 전해져왔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저들은 죽음을 각오했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여기까지 달려오며 매서운 눈 아저씨에게 들었다.

지금 육신에 차오르는 충만한 기운은 할멈이 발동한 주술의 영향이라고.

그리고 그건 십중팔구 할멈이 자신의 생명력을 깎아 이룩한 한시적 기적이라고.

‘절대 물러서지 않아.’

울컥 치솟는 격정을 다스리기 힘들다.

항상 부족의 아이들을 자상하게 맞이하던 잎의 노래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전쟁이, 서로가 죽고 죽이는 이 상황이 너무나 싫다.

하지만 먼저 공격받았고, 적들은 와족의 말살을 원한다.

싸우지 않으면 식구들이 죽는다.

선택지는 명료했다.

그렇다면 전력을 다해 이 전쟁을 끝낼 뿐.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덤비면, 죽인다!”

마른 비의 일갈은 적들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었다.

소년이 처음으로 죽인다는 말을 입에 담은 순간이기도 했다.

말아 쥔 주먹과 날 선 살의.

마음을 굳힌 마른 비가 적들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 눈은 곧 커다래졌고,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적들의 최전선.

마을을 나와 처음으로 마음을 준 친구, 여규가 달려오고 있었다.

종전

전진하는 어깨가 방패와 사람을 통째로 날리고, 올빼미의 부리를 모방한 양손이 적들의 명치를 꿰뚫었다.

하늘에서 진짜 올빼미가 하강하여 진형을 헤집으며, 수직으로 솟구친 다섯 줄기 섬광이 점창을 대표하는 일곱 자루의 검 중 하나를 분질렀다.

그믐올빼미.

항거 불능의 무력으로 적들을 압살하는 전대의 노장은 과연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릴 자격이 있었다.

단신으로 방패와 창검의 벽을 허물고, 풍검대를 돌파했으며, 점창 칠검 중 하나를 일수에 격살했다.

그 압도적인 무위를 코앞에서 목도한 공지량이 넘어가지 않는 침을 억지로 삼켰다.

‘30년 전. 그때와 같다!’

짙푸른 기운이 서린 눈동자.

실로 맞받기 버거운 위압감이다.

공지량을 더욱 주눅 들게 만드는 건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그믐의 태도였다.

연륜? 관록? 경험?

거칠고 사나운 기세만을 내비치던 젊은 날과는 다르다.

이 야만족 노인에겐 단순한 힘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다.

‘괜찮아. 기죽지 마라. 그때의 내가 아니다.’

그땐 어렸고, 약했으며, 미숙했다.

목숨을 걸어도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는 야만 전사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과 같았다.

지금은 어떤가.

상대의 무위는 여전하다.

하지만 자신도 강해졌다.

일대일로도 충분히 검을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저 기묘한 기운의 증폭만 없었다면 조심스레 승리를 점쳐볼 정도로.

눈앞의 노인은 더 이상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늘부로 지긋지긋한 망령을 떨쳐낸다!’

혐오스러운 과거의 잔재다.

저자를 죽이고, 우측 전장을 평정한 후 여세를 몰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자신과 칠검의 여섯, 봉검가와 운검가의 무인들, 그리고 풍검대.

전력은 충분했다.

“칠검은 나를 보좌하라! 합격진으로 저 늙은이를 잡는다! 풍검대는 방패와 장창을 도와 전면의 야만인들을 차단하고, 봉검가와 운검가는 하늘을 주시하라! 저 괴조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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