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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08화 (108/463)

108화

명확한 역할 분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점창의 무인들이다.

서벽신검을 들어 올린 공지량이 우렁차게 외쳤다.

“후인들은 오늘을, 점창이 천하제일문으로의 도약을 시작한 역사적인 날로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손으로 그 모든 영광을 움켜쥔다! 가자!”

욕망 대 생존.

그 본질은, 대의를 가장한 야욕과 존립을 위한 투쟁으로 늘려 쓰는 게 가능하다.

핏물에 잠겨 익사 직전인 대지에 또다시 선혈이 흩뿌려졌다.

‘지난날이…….’

쐐액! 쾌애액-! 스파팟!

사방을 에워싸고 검날이 엄습한다.

고작 일곱 자루의 검이지만, 촘촘히 공간을 메운 검격은 한 치의 빈틈도 허용치 않았다.

공유환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여섯 명의 일대 제자들.

그리고 천하 구파의 장문인.

손수 가르친 직전(直傳) 제자들과 공지량이 펼치는 합격진은 매서운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후회스럽구나.’

천하를 뒤진다 해도 이 일곱 명의 합공을 받아낼 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

위태로운 순간들이 시시각각 피부를 저몄지만, 노장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경천(驚天)의 무력이다.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큼.

경악 어린 일대 제자들의 표정이 그 증거였다.

‘안이했다. 그리고 나태했다.’

하지만 그믐은 자책했다.

하늘이 빚어놓은 그릇을 꽉 채운 무력이다.

사람마다 지닌 재능의 종류가 다르듯 같은 재능 안에서도 한계는 제각각이기 마련이다.

스스로 느끼기에, 그믐은 아버지 하늘이 자신에게 허락한 최대치의 무력을 달성했다고 여겼다.

‘비겁한 변명이었지.’

누구보다 잘 안다.

지난한 일이지만, 한계 따위 얼마든지 깨부술 수 있다는 걸.

30년 전,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자신의 그릇은 가득 차 있었다.

목숨이 오가는 실전을 겪으며, 더 이상 키울 수 없으리라 여겼던 능력들이 쭉쭉 뻗어 나가는 걸 느꼈다.

자신을 가두었던 틀이 부서지는 느낌은 한계를 돌파한 자만이 깨우칠 수 있는 감각이었다.

부단한 단련, 끊임없는 참오, 목숨을 건 실전, 한순간의 깨달음, 또는 기연.

정해진 그릇을 넓히는 계기는 무수하다.

평생을 정진해도 한계를 넘지 못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지만, 자신은 이미 한 번 경험한 바 있다.

‘자만한 게야.’

아이들에게 입버릇처럼 자만에 빠지지 말라 일렀거늘.

안주한 건 자신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여겼다.

이십 년 동안 중원을 왕래하면서도 한 번도 무력에 있어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다.

한계에 이른 무력.

그 너머를 엿보기 위한 노력을 중단했다.

‘아냐. 그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그것이겠지.’

성난 그믐.

어둔 날개를 길들이고 개명하기 전, 부모가 준 본래의 이름이다.

그 이름에 어울리던 불같은 성정이 지금처럼 유하게 변한 이유.

사냥과 전투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된 계기.

‘그날’의 기억은 그믐의 가슴에 평생 빼낼 수 없는 가시처럼 박혀있었다.

날아드는 검날들 틈에서, 그믐의 눈이 먼 과거를 그렸다.

* * *

“전 부족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떠날 겁니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덜컥 내려앉은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가버리라 호통쳤지만, 뒤돌아주길 바랐다.

아들.

하나뿐인 아들의 입에서 부족을 떠나겠다는 선언이 나왔을 때, 나는 휘청이는 몸을 가누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저는 전사가 되지 못할 거예요. 아니, 될 생각도 없어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내죠. 아버지 말씀처럼 사내라 불릴 자격조차 없어요.”

그 말을 끝으로, 녀석은 영영 떠나갔다.

재능은 썩 나쁘지 않았다.

당시 부족 최고의 전사였던 내 눈에는 차지 않았지만, 성년식을 준비하는 또래에 비해 앞섰으면 앞섰지, 절대 처지지 않았으니까.

동갑내기에 매서운 눈과 우둔한 땅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

오직 힘만이 남자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자 지상 최고의 가치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때다.

6년 전에 있었던 점창과의 전쟁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던 터라 더욱 그랬다.

“전 상인이 되고 싶어요. 아버지.”

무더운 여름날, 알음알음 전해진 한족들의 서적을 노상 끼고 살던 녀석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생계를 위해 물물교환을 하는 소수부족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인이란 게 무엇인지도 모를 때였다.

그 의미를 듣고, 녀석이 보물처럼 애지중지하던 서책들을 모조리 불살랐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성년식을 앞두고 조금이라도 힘을 키우진 못할망정 뭐가 어쩌고 어째?

우둔한 땅과 매서운 눈이 무섭게 성장하는 모습이 보이지도 않나?

연상도 아니고, 동갑내기한테 밀리는 게 용납이 된단 말인가!

자부심. 투쟁심. 호승심. 향상심!

남자라면 모름지기 내가 최고라는 생각과 모든 적을 발 앞에 무릎 꿇리겠다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뒤처지는 꼴은 볼 수 없으며, 조금이라도 강해지기 위해 불철주야 단련해야 한다.

전사는, 아니 남자는 강해야만 한다.

고작 서책 따위가 없어졌다고 대성통곡하는 게 꼴 보기 싫어서 뒤돌았다.

성년식 3일 전이었다.

녀석이 야생으로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렀고, 어느덧 3년이 지나 아들이 귀환했다.

표현은 안 했지만, 내심 기대가 컸다.

누구의 핏줄인데 강해지지 않았겠는가.

옆에는 이제 갓 스물이 된 너른 하늘이 서 있었다.

히죽 웃으며 동생들의 귀환을 기다리는 녀석은 즐거워 보였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를 놈이지만, 2, 3년만 지나면 녀석에게 부족 최고의 전사라는 호칭을 내주어야 할 게 틀림없었다.

너른 하늘이 부족 역사상 최강의 전사로 자리매김하리란 건 그때부터 이미 예견된 미래였다.

성인이 되었으니 아들놈을 붙잡고 본격적으로 단련시킬 계획이었다.

너른 하늘, 이 괴물 같은 놈을 따라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삼대 무력 집단.

수리의 눈, 또는 나무표범의 수장.

딱 거기까지 올려놓을 생각이었다.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삼 년 만의 해후가 반가운지 아들놈은 활짝 웃었지만, 난 웃을 수 없었다.

저 몸!

나름 단련은 한 모양이지만, 빈약하기 그지없다.

근육은 여물지 않았고, 장기에 알맞게 특화시킨 육체 발달의 흔적이 없었다.

삼 년 동안 야생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했다면 저따위 몸을 하고 나타날 리 없었다.

“너…… 그동안 대체 뭘 한 거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가까스로 입을 뗐다.

아들은 이런 내 반응을 예상했는지 당황하지 않았다.

큰 결심을 한 얼굴로 모두를 돌아봤다.

“모두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부족원들이 아들에게 시선을 모았다.

“제가 한족들의 문자를 배우고, 그들이 역사를 통해 남긴 유산과 지식을 습득하는 걸 좋아했다는 거, 기억하실 거예요.”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가.

괴짜라고 수군대고, 훌륭한 전사가 되지 못할 거라고 걱정했다.

내 심정을 눈치챈 이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라 다독였다.

“전 지난 삼 년간 대리와 곤명을 드나들었어요.”

웅성- 웅성-

성년식 기간 중 도시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건 오래도록 이어져 온 금기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뒤에 이어질 말을 예상했다.

정신이 아찔해지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환청처럼 메아리쳤다.

“저는 상인이 되고자 합니다. 세상은 넓어요. 운남 밖에는 다양한 인종과 문명이 존재하죠. 저는 돈을 벌고 세상을 떠돌며 와족과 외부의 세계를 연결시키고 싶어요. 성년식 기간 중에 도시에 드나들면 안 된다는 것, 압니다.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전 이 꿈을 꼭 이루고 싶어요. 비록 전사가 되지 못한다 해도….”

“반려수는 어디에 있냐.”

이미 내 목소리는 완전히 가라앉아 짐승의 그것처럼 그르렁대고 있었다.

“……아버지. 꿈을 이루기 위해서, 당당해지기 위해서 지난 삼 년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어요. 나름의 성과도 이루어냈고요. 조금만 제 말씀을 들어주시면….”

“반려수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

“……없습니다.”

짜악!

정신이 들었을 때, 난 이미 아들을 잘근잘근 다져놓은 후였다.

“너 같은 놈은 전사가 아니다! 아니, 사내가 아니다! 내 아들이라 칭하지도 마라! 난 너 같이 한심한 놈을 아들로 둔 적 없느니…!”

일주일 후.

아들은 부족을 떠났다.

“들어주지 그러셨어요! 그토록 하고 싶은 일이라는데! 아니, 입을 열 기회라도 줬으면…!”

잎의 노래는 오열했다.

꼭 전사가 되어야만 하느냐고, 모든 이가 당신처럼 힘만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당신도 떠나는 걸 말리고 싶었으면서 왜 가만히 있었냐고, 왜 붙잡지 않았냐고 절규했다.

“…….”

대체 그게 무엇이냐.

문자? 역사? 문명? 교류?

그게 무엇이기에 네가 부족을 떠나고 부모를 등지면서까지 갈구했던 것이냐.

한어를 배웠다.

문자를 습득했다.

역사를 읽고, 문화를 체험했으며, 세상 밖으로 나갔다.

바다를 보고, 초원을 누볐으며, 설원을 걸었다.

이족(異族)과 교류하고, 문물을 거래하는 한편, 운남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진귀한 경험을 쌓았다.

그럴 만했다.

아들이 추구한 것은 인생을 걸 만한 일이었다.

머뭇거릴 시간 없이 당장 달려들어도 평생이 걸릴 지난한 꿈이었다.

와족과 세상을 연결할 다리가 되겠다는 꿈은 진실로 값진 미래였다.

‘어디 있는 거냐.’

중원으로 간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중원은, 한족들이 천하라 일컫는 저 북방의 땅은 운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넓었다.

수리의 눈이 갖는 정보력은 운남, 그것도 맹수들과 소수부족의 추이에 국한될 뿐이다.

인원도 없고, 자금도 없으며, 연고도 없는 중원에서 아들을 찾는 것은 해양 한가운데 가라앉은 돌멩이를 찾는 것과 진배없었다.

지난 이십 년간 끊임없이 중원으로 나갔다.

항상 실망을 안고 돌아올 뿐이지만, 예상치 못한 보람도 생겼다.

아들이 하려 했던 것.

자라나는 부족의 아이들에게 청죽림, 그리고 운남을 넘어선 또 다른 세상을 들려주는 것.

아비가 깨뜨렸던 아들의 꿈은 어느덧 아비의 소망이 되어 있었다.

* * *

‘모든 게 변명이다.’

피잇-!

예리한 검 끝이 광대뼈를 스친다.

강피가 뚫리고, 철골이 잘렸다.

눈앞의 적들은 목숨을 빼앗기에 충분한 힘으로 압박해오고 있었다.

‘한계에 달했다, 이 이상은 어렵다.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단련을 게을리한 것.’

피잇- 핏! 촤악!

‘오랜 평화에 젖어 전투에서 눈 돌린 것.’

쒜엑! 쒜에엑-! 슈슉!

‘그날의 일을 핑계 삼아 본분을 잊은 것.’

적들의 검이 몸을 건드리는 경우가 잦아졌다.

움직임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뜻이며, 점점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후회스럽구나. 그릇을 더 넓히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전성기 시절의 기량만 유지를 했더라면…!’

전투 화장을 발동하고도 이 꼴이다.

전쟁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적들을 쓰러뜨리기는커녕 백중세를 유지하는 게 전부다.

아니, 서서히 밀리고 있다.

공지량과 칠검이 알았다면 환장할 노릇이지만, 일 대 칠로 싸우면서도 그들을 제압하지 못하는 상황에 그믐은 참담함을 느꼈다.

휘오오오―

“……?!”

갑자기 육신에 스며든 이 기운.

“이것… 설마?!”

끝이 아니다.

세 번에 걸쳐 중첩되는 대자연의 기운.

그믐의 눈이 커졌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런 터무니없는 축복을 내리려면 잎의 노래가 무엇을 감수해야 하는지.

“이… 이……!”

후회를 거듭하며 살아온 인생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큰 회한이 휘몰아친다.

전쟁을 빠르게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잎의 노래에게 이런 부담을 지운 거다.

강하지 못해서.

안이했고, 게을렀으며, 나태했기 때문에!

“으아아아아아!”

절규에 가까운 노장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의 부르짖음에 호응하듯 중앙 전장에서 막대한 자연의 기가 대폭발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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