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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09화 (109/463)

109화

“후욱, 후욱…!”

고갈됐던 체력이 차오르고, 흘러내리던 피가 멈춘다.

날카로워진 감각은 등 뒤에서 날아드는 검의 궤적을 잡아냈고, 활성화된 동체시력은 검날에 맺힌 핏방울이 비산하는 모습 하나하나를 두 눈에 새겼다.

가슴을 꽉 채운 투지.

전의(戰意)가, 적을 향한 살의가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른다.

‘물러 터졌다.’

안이했던 시절은 투심마저 퇴색시켰는가.

목숨을 돌보지 않고 악귀처럼 적을 격살하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건가.

연륜? 전사로서의 관록?

나의 피해는 최소화하며 적을 압도하는, 전장에 선 자라면 누구나 꿈꿔 마지않을 노련함?

개소리.

완연한 개소리다.

싸움판에 뛰어든 자.

땅바닥을 구르고, 이빨로 적을 물어뜯으며, 적의 안구를 손가락으로 후벼 파는 처절함이 있어야 한다.

적을 갈가리 찢으려는 살의만이 머릿속을 꽉 채워야 한다.

자신의 안위를 염두에 두는 순간, 육신은 생존을 갈구하며 소극적인 전투를 펼친다.

‘모든 걸 던져라. 그때 그 시절처럼!’

적들에게 경외감을 선사했던 여유로움.

뜻한 대로 국면을 이끌던 전투 운영을 버린다.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생물의 본능적 방어 기제를 걷어낸다.

키이이잉― 뚝!

전투 화장이 촉발시킨 광전사의 본능과, 의식을 명료하게 유지하던 냉철한 이성.

그 모순된 균형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던 육신의 제어가 끊어졌다.

내 목숨을 원하나?

좋다. 죽어주마.

단, 이 목을 줄 터이니 네놈들의 그 알량한 목숨도 모조리 내놔라.

푸른 불꽃이 타오르던 두 눈에 핏빛 광기가 차올랐다.

과거의 후회를 더 큰 회한이 집어삼킨다.

광기에 몸을 맡긴 노장이 공지량과 칠검을 덮쳤다.

쿠콰쾅!

태산을 쪼갤 듯한 주먹에 파봉진이 출렁인다.

쩌저정!

바다라도 가를 것 같은 뒤꿈치가 수운진을 뒤틀었다.

촤차차창!

공기를 찢는 야수의 발톱에 대도를 모아 쥔 양손이 통째로 튕겨 나갔다.

“카아아악!”

‘내가 이런 괴성도 지를 수 있었던가?’

찰나에 목숨이 오가는 전투 중에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는 게 신기하다.

노인이 발작적으로 무릎을 쳐올렸다.

뻐어억-!

대호의 머리가 하늘로 치솟는 걸 보며, 봉검은 황급히 뒤로 몸을 뺐다.

“후욱- 쿨룩, 쿨룩! 헉, 허억…!”

기침이 터질 만큼 호흡을 가누지 못하는 게 대체 몇십 년 만인지.

지난 전쟁 이후로 처음인 듯하다.

머리를 동여맨 동곳이 뜯겨 나가 산발이 된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봉검은 검진 안에 갇힌 일인일수(一人一獸)를 바라봤다.

‘말도 안 된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야! 어찌 일개인이 이런 얼토당토않은 힘을…!’

‘최소’ 조장급이다.

무력만을 놓고 봤을 때, 각기 삼십 명으로 구성된 봉검대와 운검대의 무인 전원은 지금 당장 주력 검대의 조장을 맡아도 될 실력을 지니고 있다.

최소.

그 말은, 평균적인 무력은 조장급을 한참이나 웃돈다는 뜻이다.

부귀영화와 세속적 쾌락을 마다한 채 오로지 무(武)에 일생을 바친 남자들.

몇몇은 호검대와 풍검대의 대주를 상회하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극소수는 장로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삼십 년 전, 저 무시무시한 회효조차 살아남은 모든 전사들이 집결하기 전까지 두 검대와의 전투를 피했거늘.

혼자서, 아니 짐승 한 마리 데리고 백중세를 이룬다고?

이런 건 존재해서는 안 되는 힘이다.

“후우, 후욱…!”

사내 또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놈들……· 강하다.’

파봉진과 수운진의 결합.

정교하게 설계된 두 개의 합격진을 중첩시키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한 치만 삐끗해도 오히려 검진을 펼치는 자들을 자멸로 몰아넣을 수 있다.

검진을 창안한 게 봉검가와 운검가이기 때문에, 그리고 검진의 구성원들이 뼈를 깎는 고련을 거듭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크나큰 위험을 감수하며 펼친 보람이 있었다.

푸른 눈과 함께 하는 너른 하늘을 가둘 정도의 단단함과 엄밀함.

초조해진 전사가 승부수를 던졌다.

“푸른 눈! 동시에 간다!”

쾌액! 슈아악―!

인간은 좌우로.

짐승은 상하로.

눈부신 경신술이 봉검의 눈을 흔들었다.

이쪽이라고 손발을 못 맞출 것 같으냐.

고공에서 내리꽂힌 푸른 눈과 수평으로 움직인 너른 하늘이 만난다.

일인일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웅혼한 자연기가 공명했다.

퀴우우웅―!

힘의 극대화.

중첩되어 뻗어 나가는 그것은 혼을 공유한 인간과 야수의 합격기일지니.

짙푸른 자연기가 대지를 흔들고, 강렬한 십자포화가 점창 검진을 덮쳤다.

“강력한 게 온다! 내력을 집중하라!”

파봉진은 봉검에게, 수운진은 운검에게.

휘도는 경력이 정교하게 설계된 기로(氣路)를 타고 흐르니, 눈덩이가 구르듯 점점 몸집을 불린 내력의 응집체가 두 노인의 등, 신도혈(神道穴)을 타고 전이됐다.

“차핫!”

“카아아압!”

붉은빛 도와 푸른빛 창날은 끌어모은 기운을 발출하는 출구다.

화마를 벨 홍염의 가르기와 빙벽을 꿰뚫을 청빙의 찌르기가 밀려오는 푸른 해일에 마주쳐갔다.

“큭…!”

“커헝!”

막대한 기운이 사위를 휩쓴다.

주르륵 밀려난 전사와 야수가 신음을 토했다.

입술을 타고 흐르는 피를 주먹으로 닦아내며, 너른 하늘이 고개를 들었다.

‘뚫리지 않는다. 이것마저 통하지 않다니…….’

62명의 최정예?

단순히 떼로 달려드는 것이라면 쓸어버리는 게 어렵지 않다.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이 진형.

힘의 집중과 증폭을 가능하게 하는 공능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토록 고전하는 건… 푸른 눈과 싸웠을 때 이후로 처음이구나.’

성년식. 그리고 애뢰산.

푸른 눈은 단순한 각성을 넘어 강대한 힘을 축적한 상태였고, 녀석과 싸우며 죽을 고비를 숱하게도 넘겼다.

하지만 그 시절의 자신은 십 대 중후반이었다.

성장을 마치지도 못한 상태였다.

육체가 완성된 이후, 무수한 싸움을 거쳤지만 한 번도 힘이 모자라다고 느낀 적은 없다.

지금은 버겁다.

펼칠 수 있는 모든 기예를 쏟아부었지만, 적들의 방벽은 탄탄했고, 전사들은 계속해서 쓰러지고 있었다.

초조한 건 봉검만이 아니었다.

난생처음, 너른 하늘도 조바심이란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음?”

휘오오오―

따스한 대자연의 기운이 연달아 내려앉는다.

온몸을 감싸 안듯 휘도는 기운에선 술력 특유의 느낌이 감지됐다.

‘……할멈!’

그믐이 그랬듯, 너른 하늘 또한 대번에 상황을 짐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좌측 전장에서 이질적인 광기가 치솟았다.

‘할아범마저…!’

적들의 피와 살을 갈구하는 살의가 충천한다.

살육의 나날을 후회하는 노장이 다시는 꺼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과거의 편린을 끄집어냈다.

할멈의 희생 앞에서 결단을 내린 게 틀림없었다.

‘각오가 부족한 건…… 나였던가.’

최선을 다했지만, 지닌 능력의 범위 안에서 전투를 벌였을 뿐이다.

그 이상의 무엇.

적들의 궤멸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질 각오가 부족했다.

“푸른 눈. 날 지켜다오.”

너른 하늘이 꾹 눌러 감았던 눈을 떴다.

지금껏 적들을 침묵시켜온 기예들이 통하지 않는다.

도박을 걸 시점이었다.

수차례 도전했으나 실패만을 거듭했던 미완의 기술.

전투 화장. 대자연의 축복. 목숨을 걸 각오.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

아니, 해내야만 한다.

전사의 두 주먹이 가슴 앞에 모였다.

봉검은 경악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62명의 내공을 모은 일격을 받아넘기다니!’

기로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안 되기 때문에 끌어모을 수 있는 양은 정해져 있다.

허나 절대로 개인이 받아낼 수 있는 공격이 아니다.

무림 역사상 최강의 진법이라 일컬어지는 소림의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에도 밀리지 않으리라 자부해온 검진이거늘.

‘십좌……. 십좌가 와도 이럴 수는 없다!’

천하 정도 문파의 힘이 집결된 정도맹(正道盟)의 정점이자, 하늘이 내린 검이라고까지 불리는 천검(天劍).

일신에 지닌 무력만으로 사도 방파들의 연합체인 사도련(邪道聯)의 하늘이 된 패군(覇君).

고통받는 한의 민초들을 위해 단신으로 원 황실에 저항하며 협의의 화신이라 추앙받는 협검(俠劍).

장담할 수 있다.

현시대 최강자로 거론되는 누가 와도 방금 전의 일격을 받아낼 순 없다.

봉검은 눈앞에서 숨을 고르는 운남 오지의 야만족 사내가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이라는데 목을 걸 수 있었다.

‘하지만… 흔들렸다!’

불안정한 기도.

불규칙적으로 들썩이는 어깨.

내상을 입은 듯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무력에 경외감마저 들지만, 결국 개인으론 집단을 당해낼 수 없다.

‘이런 힘은 존재해선 안 된다!’

직접 검을 마주해보니, 눈앞의 사내가 헛된 마음을 품을 자가 아니란 건 알겠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

이런 자가 작심하고 세력을 일구어 중원으로 치고 올라간다면?

아니, 그 전에 사문과 인접한 지역에 이런 통제 불가능한 괴물을 풀어두어선 안 된다.

공지량과는 다른 이유지만, 봉검 또한 싸움을 거치며 너른 하늘을 제거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공감했다.

“첨진(尖陣)! 다시 힘을 집중시켜라! 이번 공격으로 족장을 쓰러뜨린다!”

너른 하늘을 둘러쌌던 무인들이 포위를 풀고 봉검과 운검의 뒤로 모였다.

원형으로 빙 둘러 전이하는 내력이 아니다.

일직선으로 내공을 전달하고, 충돌의 순간 뒤를 받친다.

점창은 이번 일격에 사활을 걸었다.

“가자!”

봉검과 운검을 필두로 점창 최강의 무력집단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화산열해(火山熱海).’

대리의 서쪽, 보산에 인접한 등충(騰沖).

이제는 활동을 멈춘 불의 산이 있는 곳.

머나먼 과거, 산이 쏟아낸 화염과 불의 강이 천지를 불살랐다 했다.

와족의 선조들이 어머니 대지의 노여움이라며 두려워한 재해의 끝에 남은 건, 새카맣게 타버린 땅과 두텁게 가라앉은 재뿐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위대한 자연은 죽음의 땅에서 다시금 생명을 꽃피웠고, 온갖 지형과 기후가 공존하는 운남에서도 극히 희귀한 장소를 만들어냈다.

‘더운 물이 솟아오르는 못.’

깊은 골짜기, 그 위치를 아는 와족의 전사라면 꼭 들러서 몸을 푸는 뜨거운 샘이 존재한다.

다른 전사들은 감지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너른 하늘은 느낄 수 있었다.

‘산천을 녹여버릴 불의 기운.’

선조들의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얼마나 깊은 곳일지 짐작도 되지 않지만, 땅은 아직도 불을 품고 있었다.

전사들이 몸을 담근 뜨거운 물은 그 열기에 덥혀진 게 틀림없었다.

‘떠올려라.’

대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자연기의 특성.

불 또한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지저를 흐르는 불의 물길.

그 특징을, 감각을, 기운을 모방한다.

너른 하늘의 왼 주먹에 대자연의 화기가 담겼다.

‘매리설산(梅里雪山).’

운남 최북단, 새하얀 깃털의 독수리가 제왕으로 군림하는 그곳.

사시사철 녹지 않는 만년설로 뒤덮인 고산에서의 싸움을 기억한다.

하얀 깃을 때려눕히며 느꼈던 대자연의 한기.

전사의 오른 주먹에 시릴 듯한 냉기가 깃들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왼 주먹은 위로, 오른 주먹은 아래로.

굳게 쥔 주먹의 손가락 마디 부분을 맞대니, 그 형상은 중원에서 일컫는 태극이라.

음양의 결합은 만물 생성의 근원일지니 대자연을 아우르는 생멸(生滅)의 이치가 두 주먹에 담겼다.

‘항상 여기서 실패했다!’

불과 얼음.

지나치게 강렬한 상극의 기운이다.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극상성의 기운들을 맞닿게 하는 것.

폭발적인 반발력이 터질 건 예정된 이치였다.

찍어 누른다.

그리고 조화의 지점을 찾아 융합한다.

그 절묘한 힘의 배합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누구도 본 적 없는 경지가 눈앞에 펼쳐지리라!

그그그그긍―!

‘크으윽!’

너른 하늘의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두 기운은 광포하게 서로를 밀쳐냈고, 폭발하려는 힘을 억지로 가둬두는 팔뚝이 떨어져 나갈 듯 경련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두 주먹.

융합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과거에 그랬듯 대폭발과 함께 치명적인 내상을 입을 거다.

그 끝은 자멸.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크아아아앙!”

방해하지 마라.

엄습하는 적들을 막기 위해 푸른 눈이 날아올랐다.

‘제발!’

그그극! 그그그긍―!

전투 화장, 그리고 대자연의 축복.

지금 해내지 못한다면 영영 해낼 수 없다.

“으윽… 큭! 크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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