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치유란 조화를 되찾는 과정이다.
극도로 끌어 올려진 육신의 감각이 절묘한 균형의 지대를 더듬었고, 폭발을 두려워 않는 용기는 조화의 지점을 찾은 순간, 서로 다른 두 힘을 과감하게 합쳤다.
바우웅―
‘……해낸 건가?’
눈부시게 타오르는 백색의 광휘.
미친 듯이 날뛰던 종전의 기운이 무색하게도, 너른 하늘의 주먹에 담긴 기운은 더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하지만 느껴진다.
맞닿은 주먹에 장착된 초월적인 파괴력이.
‘성공이다!’
“커헝…!”
뾰족하게 형성된 점창 진형의 첨단부.
시간을 벌기 위해 달려들었던 대호가 저 멀리 튕겨져 나가는 게 보였다.
‘고생했다. 푸른 눈.’
음과 양.
얼음과 불.
대자연을 노니는 기운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기운 두 가지가 지금 하나로 합쳐졌다.
“서리불꽃.”
콰우우웅―!
와족 역사상 전무후무한 필멸의 기예가 공간을 삼켰다.
* * *
찌르륵- 찌륵-.
산새의 평화로운 지저귐이 귓가를 노닌다.
우거진 녹음이 눈을 즐겁게 하고,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고된 여정을 다독였다.
“좋구나.”
중년 사내가 숲의 청정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의 얼굴에선 설렘이 묻어났다.
“확실히…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좋은 곳이군요.”
각진 얼굴과 다부진 체격.
청년에서 중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남자가 숲의 구석구석을 쓸어봤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형형하게 번쩍이는 눈빛은 아름다운 정경을 감상하는 이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위험을 사전에 색출하기 위해 주변을 탐색하는 호위무사 같다.
이맛살을 찌푸린 중년 사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자네, 여기까지 와서도 그럴 건가? 그리 날 세울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나. 자네가 성실한 건 알고 있네만, 과해. 항상 그렇게 긴장하고 있으면 피곤하지 않나?”
“아랫것들이 없기 때문에 제가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아니, 수하들이 있어도 긴장을 늦출 순 없지요.”
“그래… 고맙긴 하네만, 중원의 끝자락에 있는 이 땅에 무슨 위험이 있겠나. 좀 더 편히 여행을 즐겨도 된다네.”
“여행이라니요! 오고 가는 여정 또한 임무의 일환입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런 안이한 마음가짐으로 임하셔서는…!”
융통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남자다.
게다가 윗사람에게조차 직언을 서슴지 않는 저 언행.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이런 점 때문에 이 친구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런 강직함과 철두철미함이 그의 장점이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피곤함을 유발한다.
그의 휘하에 있는 천 명의 장정들이 안쓰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오! 다 왔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숲이 끝났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원시의 자연.
한 달여 만에 접한 문명의 자취를 보며, 깐깐한 사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가 곤명입니까? 온종일 밀림만 보다가 반갑긴 합니다만, 생각보다는 규모가…….”
“아니. 여긴 대리일세.”
“……?”
고개를 휙 돌린 사내의 눈에 짓궂은 미소가 들어왔다.
“볼 일이 있어서 먼저 좀 들렀네.”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어디까지나 임무를 우선적으로…!”
“내 맘일세. 며칠 늦는다고 그자가 사라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어허. 이럴까 봐 내가 혼자 온다고 하지 않았나. 수행원 같은 건 필요 없대도.”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엄중한 시기에 저 하나 따라온 것도 따지고 보면…!”
“아아, 그만해. 자네가 내 부인이라도 되는가? 계속 그렇게 잔소리할 거면 돌아가게. 난 여길 먼저 들러야겠으니.”
“으으… 이건 순서에 위배되는…!”
쿠콰콰콰콰쾅!
대리 너머, 열아홉 봉우리가 이해를 내려다보는 푸른 산.
그 산으로 오르는 중턱에서 천지를 뒤집을 폭음이 울렸다.
“이, 이게 무슨…?!”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던 사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중년 사내의 얼굴도 더 이상 경직될 수 없을 만큼 딱딱하게 굳었다.
쐐애애액―!
꼿꼿하게 서 있던 중년 사내의 몸이 섬전처럼 쏘아졌다.
“저, 저도 같이…!”
수하로 보이는 남자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날렸다.
* * *
“우리가 간다! 안전한 곳에 있어라, 비아야!”
“어, 어? 형들?”
달려오는 친구를 보고 마른 비의 평정이 흔들린 사이, 산과 안개 걸음을 필두로 한 청년 전사들이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안전한 곳에 있으라고?’
반려수를 길들였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다.
그들에게 있어 마른 비는 아직 성년식도 끝마치지 못한, 지켜줘야 할 동생일 뿐이다.
마른 비를 한 명의 전사로 인정하고 전선 한가운데 투입했던 매서운 눈에 비해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고, 힘도 부족한 청년들이 오히려 그를 전선의 뒤로 물리는 묘한 풍경이 그려지고 있었다.
‘날 보호하려고 하는구나.’
무시하는 게 아니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거다.
마른 비가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고맙네.’
힘의 강약 따윈 중요치 않다.
형, 누나들은 자신이 더 강하다는 걸 알아도 이렇게 했을 거다.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연장자로서 위험에 앞서 뛰어드는 솔선수범과 동생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
지휘자의 입장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매서운 눈과 인간적인 도의를 우선시하는 청년들 간의 차이이기도 했다.
‘고마운데… 그렇다고 가만있을 순 없지.’
아직도 전장에서 맞닥뜨린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생각은 나중에. 일단 가세한다.’
적들에게 뛰어든 청년들의 뒤를 쫓아, 마른 비가 움직였다.
‘수월하다!’
적들과 맞붙은 순간, 산은 체감할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싸우던 적들에 비해 훨씬 상대하기 편하다.
여울이 아니면 위치를 잡아내기 힘들었던 암습과 녹록치 않은 무력.
그들과 비교하면 지금 들이친 자들은 몇 수 아래였다.
‘훨씬 상대하기 편하다!’
공유립과 함께 움직인 이, 삼대 제자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
일대일로 이기기 힘들다는 건 변함없지만, 최전선에서 달려들던 무지막지한 야만 전사들에 비해 이들은 아직 숙련되지 않았다.
덩치 큰 자와 호리호리한 자.
맨 앞에서 날뛰는 두 명만 제외하면 나머진 그럭저럭 상대할 만했다.
「중앙! 물러라!」
약관을 갓 지난 나이에 광범위 전음이라니!
음파가 불안정해서 흔들리긴 하지만, 충분히 뜻을 전달할 정도는 된다.
귓가를 파고드는 공유립의 전음에 중앙에 포진한 제자들이 뒤로 쑥 빠졌다.
“뭐냐? 도망가는 거냐!”
싸워본 바, 확연한 우위다.
적들은 힘에 눌려 후퇴하는 거다.
인간끼리의 대규모 전쟁이 처음인 와족 청년들이 전술을 알 리 없었다.
“쫓아라! 성인 전사들의 배후를 노리는 놈들이다! 여기서 정리한다!”
청년 전사들이 후퇴하는 점창의 제자들을 뒤쫓고,
“지금이다! 감싸라!”
공유립의 지시가 떨어졌다.
촤라라락!
뒤로 물러선 중앙과 달리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좌우의 인원들이 앞으로 전진하며 전사들을 둘러쳤다.
따라 들어온 청년 전사들이 포위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개개인의 전력으론 이길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형을 유지하며 합공한다!”
공유립은 이미 전장을 움직이는 지휘자였다.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포위진을 완성한 점창의 공세에, 사방에서 공격을 받는 전사들의 피해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둘.’
와족의 어지간한 성인 전사보다도 거세게 날뛰는 자가 둘이다.
저 둘만 잡으면 이 전장을 정리할 수 있다.
산과 안개 걸음을 바라보는 공유립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여규! 원승!”
“네, 사형!”
진형의 좌우익에서 청년 전사들을 포위했던 여규와 원승이 몸을 날렸다.
전방의 공유립과 후방의 여규, 그리고 원승.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세 명의 합공으로 강자들을 빠르게 처리한다.
사방팔방으로 날뛰며 전장을 휘젓는 야만 전사.
첫 표적은 안개 걸음이었다.
빠바박!
행동 하나하나를 훑는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린 안개 걸음이 다가오는 공유립을 노려봤다.
‘이놈은…!’
흔들림 없는 눈빛과 정제된 기도.
사방에 널린 약해빠진 놈들과 달리 이놈은 진짜다.
번갯불이 터지고, 삽시간에 거리를 좁힌 안개 걸음과 공유립이 충돌했다.
채채채채챙!
소낙비, 그리고 분광검.
둘 다 빠름이라면 양보할 생각이 없다.
눈으로 잡기 힘든 공방이 오가고, 쾅! 하는 충격음과 함께 막상막하의 접전을 펼치던 안개 걸음이 거리를 벌렸다.
‘강하다!’
짧은 공방이지만, 적의 힘을 가늠하기엔 충분했다.
놀랍게도 자신이나 산이 아니면 막을 수 없는 놈이었다.
‘이놈은 무조건 제거해야 해!’
안개 걸음이 재차 날아오르려는 찰나,
휘리릭―
흉험한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검이 배후를 덮쳤다.
“뭐냐!”
차차차창!
급선회하며 뻗은 안개 걸음의 다리가 원을 그리며 날아드는 검날을 모조리 상쇄했다.
‘엇?!’
서른 중반쯤으로 보이는 한족 사내.
그 뒤편에서 번뜩이는 안광!
사일검, 해를 쏘아 떨어뜨릴 쾌속의 찌르기가 빛을 토했다.
“큭!”
찌이익-!
엄청난 속도다.
심장을 노리며 날아든 검을 가까스로 흘리자마자,
“전장이니 힘을 합친 걸 이해하리라 믿소.”
촤아악!
등줄기를 저미는 검날이 불에 타는 듯한 작열감을 선사했다.
‘빌어먹을! 밤이만 같이 왔어도…!’
후방 하늘에서 시도하는 급습에 지상을 거니는 반려수들을 데려올 순 없었다.
앞쪽 전장 어딘가에서 싸우고 있을 흑표범의 모습이 안개 걸음의 망막을 스쳤다.
공유립의 검이 흐르는 방향으로 팽그르르 튕겨져 나간 안개 걸음이 저 멀리에 툭 떨어져 내렸다.
‘회전? 그 와중에 몸을 비틀어서 검을 흘렸단 말인가!’
공유립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하지만 저 사내는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을 거다.
검날을 타고 또르르 흐르는 피는 붉었다.
“걸음아!”
멀찍이 떨어져서 싸우던 산이 친구의 부상에 비명을 질렀다.
“바로 저자에게 간다.”
공유립의 입술이 열리는 순간,
「이놈은 내꺼야. 눈독 들이지 말게.」
산의 후방, 숨죽이고 있던 그림자가 솟구쳤다.
‘한 놈은 잡아야 한다. 상노와 연노 부대를 모조리 잃고서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면 난 끝이야!’
참으로 질긴 생명력이다.
마른 비에게 얻어맞고 얼굴이 함몰되었던 준해는 겨우 몸을 추스른 후 은신해 있었다.
동료가 쓰러지는 걸 보며 고개를 돌린 덩치 큰 야만인.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기척을 감추고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쾌애애액!
산의 심장을 노리고 솟구쳐 오르는 검날은 서늘했다.
‘음습한 기운!’
준해의 암습을 눈치챈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산이 오빠!’
사방이 포위된 난전의 상황에서 여울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와족 무리의 중앙에서 전투에 힘을 보태던 그녀는 산을 노리는 희미한 암기(暗氣)를 포착했다.
“안 돼!”
좀 더 강한 힘이 있었다면.
더욱 빠른 몸놀림이 가능했다면.
그랬다면, 다른 방법이 있었을 텐데.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날아드는 칼날을 몸으로 가로막는 것뿐이었다.
푸우욱―
날붙이가 육신을 파고드는 소리는 섬뜩했다.
고개를 돌린 산의 눈이 커졌다.
“여울아아아!”
“이, 이 계집이!”
산의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암습에 실패한 준해가 그대로 검을 전진시키기 위해 힘을 더하는 찰나,
“이 새끼가!”
꽈앙!
마른 비에 의해 한 차례 뭉개졌던 얼굴이 아예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바스러졌다.
안면이 박살난 준해의 숨이 끊어졌다.
“여울아! 이, 이걸 어떻게 해야…!”
복부를 관통한 검.
하얀 검날을 새빨간 피가 물들인다.
떨리는 손으로 상처를 막아보지만,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오는 피는 멈추지 않았다.
“왜… 왜…?”
“오…빠……. 괜찮아요? 안 다쳤어?”
산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다친 건 내가 아니라 너 아니더냐.
왜 내게 괜찮냐고 묻는 거냐.
이 지경이 되어서도 나를 먼저 걱정하는 거냐.
이런 상황에서도 그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
산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여울을 안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살 거다. 살 수 있어. 걱정하지 마라. 내가 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