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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11화 (111/463)

111화

채채챙! 촤아악-!

‘여인… 이었나…!’

누군가가 준해의 검을 가로막는 건 봤다.

한데 그게 여인이었다니.

전사들을 돌파해 산의 앞까지 다다른 공유립의 눈이 흔들렸다.

‘전장이다. 감상에 빠지지 마라.’

검이 치켜 올라가고, 여울을 한쪽 팔로 안아 올린 산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이자…… 여인을 살리려 한다. 쉽게 처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하지만 생각과 달리 검이 움직이지 않는다.

여인은 사내를 위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고, 사내는 불리함을 감수하면서도 치명상을 입은 여인을 홀로 놔두지 않는다.

승리를 위해 아군을 제물로 삼는 자들과 그들이 야만인이라 손가락질했던 이들.

어느 쪽이 더 인간다운가.

자문해 볼 필요도 없다.

공유립을 더욱 참담하게 만드는 건, 이런 광경을 보고도 기회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떠올린 스스로의 모습이었다.

“용서하시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사형제들이 죽소. 비겁하고, 부질없는 말이지만… 진심으로 미안하오.”

“……의외로군. 괜찮아. 이해한다. 덤벼라.”

산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사라지고, 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려…놔요. 오빠.”

“시끄러. 입 열 힘도 아껴라. 넌 내가 살린다.”

여울을 끌어안은 채로는 결국 둘 다 죽을 뿐이다.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내려놓을 수 없다.

그사이 공격을 받기라도 하면?

또는 전장의 틈바구니에서 눈먼 발에 밟히기라도 한다면?

‘여울이는 날 위해 목숨을 걸었어.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책임진다.’

기회를 잡은 자의 머뭇거림과 죽음이 뻔히 보이는 길을 고집하는 자의 어리석음.

닳고 닳은 무인이라면 뭐 하는 짓들이냐고 비웃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순수했고, 그렇기에 빛났다.

콰콰쾅!

이 잠시간의 머뭇거림을 공유립은 후회할까?

확실한 건 그의 망설임이 산과 여울에게는 생을 구할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이 자식들! 당장 비켜!”

마른 비.

하얀 섬광을 동반한 소년이 적들의 파도를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건…?!’

검을 쥔 공유립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이자가 문제가 아니야. 어마어마한 게 온다!’

“크아아앙!”

전장에서 떨어져 방진을 형성하고 있을 때부터 한눈에 들어오던 그 짐승!

파죽지세로 전장을 헤집은 백호가 고공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커헝!”

인간들의 숲을 내려다보는 백호의 눈에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른 비가 잡혔다.

처음 보았을 때도 벗은 백 수십 명에게 쫓기고 있었다.

싸움판에 뛰어든다고 해서 따라왔더니만 이건 뭐, 가관이다.

개미 떼처럼 바글바글한 저 인간들을 보라.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기에 사방이 적인 거냐.

게다가 힘든 길만 골라 다니며 좌충우돌 부딪혀댄다.

해맑았던 첫인상과 달리, 벗은 사고뭉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보기와 달리 성격이 매우 안 좋은 걸지도.

마른 비가 알았다면 억울해할 일이지만, 백호는 참으로 피곤한 인간을 벗 삼았다고 투덜대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관계를 맺어버린 것을.

네가 원하는 게 저 앞에 있는 곰 같은 인간에게 가는 것이냐?

좋다. 보내주마.

공중에 뜬 백호의 몸 주변으로 푸른빛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스르르륵―

아비가 검치호에게 쓰러지기 전, 새끼들을 모아놓고 선보였던 재주다.

야생의 정점에 군림하도록 하늘이 부여한 육체.

각성을 이루며 받아들인 대자연의 기운.

원시림을 누비며 단련을 거듭한, 푸른 눈 혈통 고유의 기술이 세상에 나왔다.

휘휘휘휘휙―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허공을 수놓는다.

눈이 잡아낼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선 극속의 이동은 잔영을 남길 뿐이니.

분리되듯 여럿으로 나뉜 대호의 잔상들이 멍하니 굳은 지상의 인간들을 향해 내리꽂혔다.

“하, 하늘! 하늘을 봐라!”

육중한 몸집과 새하얀 털빛이 긋는 궤적.

그리고 쉴 새 없는 고속이동이 이루어낸 착시.

그것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유, 유성우?”

적들은 당황했으며,

“우와아아! 멋지다!”

마른 비는 탄성을 내질렀다.

꽈과과광!

“끄악!”

“아아악!”

“내, 내 파아알―!”

넋을 빼놓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다가드는 현실은 참혹하다.

백호의 잔영들이 작렬한 지점.

포위망을 구성했던 점창 무인들의 육신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제멋대로 뜯긴 팔다리가 허공을 휘돌고, 공기 중에 퍼지는 핏물이 뜨거운 김을 피워 올렸다.

“크아아아앙!”

아비규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이 갈 길을 열어젖힌 맹수가 포효했다.

“으…… 끔찍해.”

맹수의 발톱과 이빨이 지니는 살상력은 인간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육편이 꽃잎처럼 휘날리는 참혹한 광경 앞에서, 마른 비가 인상을 찌푸렸다.

“컹?!”

백호의 표정도 확 구겨졌다.

저기까지 가야 한다며?

기껏 길을 열어줬더니만 그게 할 소리냐?

낮게 그르렁대는 울음은 불만 어린 투덜거림이었다.

“아, 아냐. 끔찍하지만, 전쟁이니까……. 도와줘서 고마워. 그보다 흰둥아! 방금 네 이름 정했어!”

“?”

백호의 옆까지 다다른 소년이 씩 웃었다.

“별비. 방금 별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 같더라고. 멋졌어.”

백호의 어깨를 툭 친 마른 비가 뻥 뚫린 길을 내달렸다.

“이쪽, 맡길게! 전사들을 도와줘. 포위만 아니라면 우리가 이길 거야. 부탁한다!”

제 할 말만 던지고 휙 떠나버린 마른 비다.

덩그러니 남겨진 백호는 벙찐 표정이었다.

평생 불릴 이름인데 좀 고심하고 지어야 하는 거 아닌가?

흰둥이도 그렇더니만, 원래 이렇게 꽂히는 대로 막 짓는 거야?

하여튼 처음부터 끝까지 즉흥적인 데다 제멋대로인 인간이다.

그나저나, 별비?

흐으음. 별비라…….

방금 전의 기술이 멋있었다 이거지?

이 몸의 늠름한 자태를 담기엔 한참 모자라지만, 그 정도면 뭐.

이쯤에서 타협하도록 할까.

하긴, 흰둥이만 아니면 된다.

뭐가 됐든 그런 품위 없는 이름보단 나을 테니까.

“그라랑, 그릉.”

누가 봐도 흡족한 표정과 울음소리였다.

자신도 모르는 새 마른 비를 닮아가고 있다는 걸 흰둥이는, 아니 별비는 깨닫지 못했다.

퍼버벅! 푸콰캉! 쩌엉!

삽시간에 목표에 가까워진다.

별비가 초토화시킨 전장의 끝자락을 넘으니, 저 앞에 여울을 끌어안은 산이 보인다.

그리고 검을 든 채 이쪽을 바라보는 자.

우측 전장에서 별비와 함께 쓰러뜨린 중년 사내를 제외하면, 오늘 맞닥뜨린 적들 중 가장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

그의 갈등이 바람을 타고 전해져 왔다.

‘뭐야, 그 표정은? 산이 형을 공격할지, 날 막을지 고민하는 거야? 여울이 누나를 안고 있어도 방어에만 집중하는 형을 쉽게 쓰러뜨리진 못할걸? 그전에 내가 먼저 도착한다. 둘을 해치게 놔두지 않아!’

친구를 보고 흔들렸던 결심.

마른 비의 눈에 다시금 살의가 스멀거렸다.

‘비겁한 놈.’

전장에 가까워졌을 때, 마른 비는 보았다.

산의 등을 노린 암습자를.

몸을 날려 대신 칼을 맞은 여울을.

기다렸다는 듯이 둘에게 가까워지는 저 남자를.

저자가 암습을 지시한 게 틀림없다.

그리고 상처 입은 여울과 그런 여울을 챙길 수밖에 없는 산을 손쉽게 죽이러 온 거다.

만약 여울이 나서지 않았다면, 산이 죽거나 다쳤겠지.

뭐가 됐든 자신이 싸우는 게 아니라 남의 손을 빌려 일을 처리하는 자다.

아무리 전장이라지만, 저런 비열한 짓거릴 벌이다니!

마른 비는 공유립을 제대로 오해하고 있었다.

“여울이가 다쳤어! 산아아! 당장 비켜라! 이놈들!”

“어림없는 소리! 사형께는 못 간다!”

여규와 원승은 산을 돕기 위해 달려드는 와족의 전사들을 정신없이 차단하고 있었다.

‘음? 이 느낌! 센 놈이 온다!’

주먹과 발이 인간을 때려눕히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경험이 풍부한 원승은 전투 중에도 짬짬이 주변을 살필 여유가 있었고, 여규보다 한발 앞서 적의 기운을 느꼈다.

또한 여규가 작은 키 때문에 주변을 둘러볼 수 없는데 반해, 그는 곧바로 적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저 소년은?!’

확연하게 달라진 기운이다.

고작 십여 일 만에 뿜어내는 기세가 이토록 변할 수 있는 건가?

설검대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경이로울 따름이다.

급속한 성장을 이룬 와족의 소년이 포위망을 가르고 있었다.

‘살아남았구나!’

소년이 추격대에게 쫓겨 대리를 떠난 이후, 어린 사형은 하나뿐인 친구에 대한 걱정으로 몇 날 며칠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건 설검 장로가 한쪽 팔을 잃은 채 복귀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협의를 저버린 자들.

인질로 쓰기 위해 어린 소년 하나를 여럿이 핍박한 자들.

같은 사문이지만, 동정심은 일지 않았다.

소년이 무사히 빠져나가서 정말 다행이었다.

‘부족원들을 도우려고 돌아왔구나!’

끔찍한 악전고투를 치렀을 건 자명한 사실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살아남았음에 안도하며 깊은 곳에 꽁꽁 숨었을 거다.

정말 대단한 소년이었다.

‘어찌 됐든 사형을 저쪽으로 가게 해선 안 돼.’

원승.

그는 좀 더 서둘렀어야 했다.

수많은 인파 가운데서도 돋보이는 탁월함을 여규가 감지하지 못할 리 없었으니까.

“원 사제! 이쪽을 막아줘! 사형께 다가오는 적이 있어! 내가 막을게!”

“자, 잠깐만! 사형, 그쪽은…!”

원승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여규는 이미 적을 향해 몸을 날린 후였다.

‘아까 쓰러진 날렵한 자와 공 사형과 대치 중인 덩치 큰 자. 그 둘을 뛰어넘는 기세야. 일격에 쓰러뜨리지 못하면 승산이 없다!’

제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세월이 뒷받침되지 않은 이상 내력의 일천함은 숨길 수 없다.

벌써부터 허덕이기 시작한 내공을 박박 긁어 이 한 수에 담는다.

뒤?

그런 건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저 공유립에게 다가드는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할 뿐.

‘구곡전척(九曲箭剔)!’

실전은 도약의 발판이다.

홀로 수련할 때는 계속해서 막혔던 초식이지만, 이제는 펼칠 수 있다.

아홉 번의 변화를 보이며 민활하게 휘어지는 화살이 적의 뼈를 바르고자 불을 뿜었다.

시야 너머, 무언가가 날아든다.

“커허…!”

복부를 때리자 허물어지는 점창의 제자.

이자가 쓰러지고 시야가 열리는 순간, 검이 날아들 거다.

마른 비의 눈빛이 번쩍였다.

‘변화를 가미한 쾌검? 강해!’

판단은 찰나였고, 몸은 본능을 따라 흘렀다.

동시 발동한 구름 걷기와 낙엽 가누기로 타점을 흐리고, 강습으로 명치를 꿰뚫으면 끝.

마른 비는 앞으로 벌어질 싸움의 결과가 잡힐 듯이 보였다.

스르륵- 쿵!

시야가 열리고, 적을 똑바로 주시하며 최속의 일격을…!

‘규?’

살의를 담았던 눈동자가 흔들린다.

엄습해오는 검날 앞에서, 마른 비는 평정을 잃었다.

‘비아?’

눈이 커진 건 여규 또한 마찬가지다.

그토록 고대하던 재회다.

친구가 무사하길 간절히 기도했다.

‘난데없이 왜 여기서…!’

얄궂은 운명은 흉험한 전장 한복판에서 소년들을 시험하고 있었다.

‘안 돼! 규가 죽어!’

필살의 의지를 담은 일격이다.

하필 노린 곳은 명치였고, 어정쩡하게 타점을 바꾼다 해도 가슴이 꿰뚫린다.

공격과 방어를 일제히 멈춘 마른 비가 왼편으로 전신을 틀었다.

“크윽!”

슉―!

관자놀이.

첨예하게 빛나는 칼끝이 마른 비의 두개골 한 치 앞에서 멈췄다.

“쿨럭…! 컥!”

그것은 기술의 숙련도와 육체 활용 능력의 차이였다.

또한 일구어놓은 무의 경지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했다.

급제동을 걸고도 별다른 손상을 입지 않은 마른 비와 달리, 뻗어 나가던 내력을 강제로 멈춘 여규는 기혈이 역류했다.

울컥 피를 뿜으며, 여규가 무너져 내렸다.

“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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