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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12화 (112/463)

112화

자신이 멈추었듯 여규도 멈췄다.

여규가 멈추지 않았다면?

자신은 죽었을 거다.

내가 손을 거뒀듯 친구도 공격을 중단할 거다?

당연히 그렇게 믿지만,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본능적인 이끌림이었다.

아무리 전장이라지만, 친구를 내 손으로 죽일 순 없다.

설령 그로 인해 죽더라도 그건 내 선택의 결과일 뿐.

마른 비는 도저히 친구를 죽일 수 없었다.

“규야! 정신 차려! 규야!”

무엇이 보고 싶었기에 이런 마주침을 만들어냈는가.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를 아끼는 인간들의 모습에 박수를 치고 있나?

누구도 모를 일이다.

하늘이 던진 가혹한 시험 앞에서, 소년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성미 고약한 운명이 안배한 난관을 가뿐히 걷어찰 뿐이다.

마른 비, 그리고 여규.

전쟁을 겪으며 더욱 공고해진 둘의 관계는 향후 중원을 들썩일 태풍의 전조였다.

우지직!

“으윽! 끅! 끄아아아아!”

아플 거다.

산 채로 안구를 잡아 뜯었으니.

거리감이 안 맞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검이 맞을 리가 있겠나.

그 고통, 내가 덜어주마.

와드득!

목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

칠검의 하나가 또 허물어졌다.

‘이, 이 자…!’

벌써 네 명째다.

노인의 손에 목숨을 잃은 사형제가.

‘인간이 맞긴 한 건가?’

칠검의 수좌.

강백은 떨리는 몸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뭉클뭉클 샘솟는 핏물이 노인의 전신을 뒤덮었다.

검에 난자된 몸뚱이는 상처가 없는 곳을 찾기 힘들 지경이다.

그런데도 움직인다.

끔찍한 살의가 담긴 눈은 대지를 적시는 피보다 붉었다.

‘도저히… 죽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저 정도로 피를 흘렸다면 당장 숨이 끊어져야 정상이거늘.

점점 가중되는 투기가 숨통을 조여 온다.

중원 천지를 떠돌며 무수한 싸움을 거쳤지만, 이런 자는 본 적이 없었다.

강백은 난생처음 검을 놓고 도망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뭘 멍하니 섰나? 계속해야지.”

‘악귀…!’

핏물을 비끼며 그어진 노인의 미소 뒤로, 사신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기, 기죽지 마라! 멀쩡할 리 없다! 이, 일검만 더 먹이면…!”

더듬대는 공지량의 말투는 설득력이 없었다.

“잊고 있었군. 네놈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지.”

탓-!

번갯불이 터지고, 혈인이 쇄도한다.

공지량을 노려보며, 그믐은 말했다.

“피곤하구나. 이만 죽어라.”

“장문인!”

공지량을 향해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살의!

저 귀신같은 노인은 장문인을 먼저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게 틀림없었다.

기동하는 그믐의 측면으로, 칠검 중 살아남은 셋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우뚝.

발이 멈춘다.

살의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돌아간다.

자세가 낮아지고, 피로 물든 양손에는 적들을 격살할 자연기가 담겼다.

‘소, 속임수!’

이미 코앞이다.

노인을 따라잡기 위해 전력을 다해 경신술을 펼친 게 치명적인 독이 됐다.

사냥에 나선 올빼미가 사냥감의 멱을 꿰었다.

“컥…!”

“아악!”

대기를 찢는 극속의 수격(手擊).

그 속도는 마른 비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양손으로 펼친 강습에 칠검의 둘이 허물어지고, 올려 찬 다리에 강백의 턱이 걸렸다.

빠악!

틈을 놓칠 리 없다.

그믐이 내뻗은 수족을 회수하기 전에.

의식을 잃고 무너져 내리는 강백의 뒤에서, 공지량의 검이 날아들었다.

스걱!

“크… 하하하! 멍청한 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말도 제대로 못 잇던 놈이 저토록 의기양양한 꼴이라니.

왼편 쇄골이 잘린 그믐에게 공지량의 검이 쏟아졌다.

촤차차악!

벨 테면 베어라.

어차피 살 생각 따윈 없으니.

즉사할 수 있는 치명적인 급소만 비낀다.

전면을 뒤덮은 검영을 뚫고, 그믐은 전진했다.

쐐애액!

쇄골이 잘려나가 왼편 상반신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른손으로 강습을 펼쳤으나 속도가 모자랐다.

‘검째로 부순다.’

그렇다면 힘으로.

자연기를 때려 부어 증강시킨 파괴력이 부족한 속도를 대체한다.

황급히 검을 들어 올린 공지량의 눈빛이 미미하게 떨렸다.

쩌저저정―!

‘부러지지 않아?’

그믐의 눈썹이 꿈틀댔다.

상서로운 벼락.

귀하디귀한 설화빈철(雪花彬鐵)을 수만 번 두드려 만든 검이다.

수십 년 전, 당대 최고의 철장(鐵匠)이었던 장철이 점창에 선물한 서벽신검은 쉬이 부러뜨릴 수 있는 그저 그런 검이 아니었다.

부상까지 입고, 회심의 일격을 실패한 전사.

안성맞춤의 먹잇감이다.

공지량의 입가에 희열의 미소가 피었다.

“카압!”

서거걱!

팔꿈치 안쪽의 인대가 잘렸다.

깊게 베인 통에 오른팔이 힘을 잃고 떨어져 내렸다.

묵직한 통증과 덜렁대는 팔.

이제 오른팔로는 수저도 집지 못하리라.

“지긋지긋한 노괴물아! 그만 지옥으로 꺼져라!”

아주 신이 났다.

방금 전까지 위축됐던 모습을 떨치려는 듯 공지량의 입에서 우렁찬 기합이 터져 나왔다.

“차아앗! 분광참영(分光斬影)!”

그림자마저 베어낸다는 분광검의 절초가 비산한다.

격렬한 검속이 빛을 쪼개며 날아드는 가운데, 노장의 입술이 열렸다.

“팔을 잘랐다고 싸움이 끝난 건 아니다. 애송아.”

탓-

올곧은 수직 도약.

햇살을 부수는 다섯 줄기 섬광.

그것은 패배를 모르는 섬전의 기예일지니.

“집(集), 중선오격.”

쉬아아악― 쩌정!

일점에 집약된 다섯 번의 발차기가 엄습하는 적의를 짓뭉갠다.

공지량의 손아귀가 찢어지다 못해 터져 나가고, 하늘로 치솟은 손 끝에서 서벽신검이 하늘을 날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글러먹은 이족의 수괴에게 야만의 징벌이 내리꽂혔다.

“지옥은 네놈이 갈 곳이 아니더냐.”

퍼억!

코뼈가 내려앉고,

빠악!

광대뼈가 바스러지며,

우두둑!

이빨이 모조리 뽑혀 나간다.

“카악! 으, 으어어어!”

착지 전에 내뻗은 세 번의 발차기가 밉살스런 면상을 깨부쉈다.

“후우… 훅……. 살려달라는 개소리는 꺼내지도 마라. 이번엔 절대 살려두지 않을 테니.”

딛는 걸음마다 피로 된 발자국이 묻어난다.

쇄골이 잘린 왼편 어깨는 축 쳐졌고, 절반 가까이가 잘린 오른팔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덜렁거린다.

쓰러질 듯 연신 휘청거리는 그믐이지만, 공지량은 감히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저 눈빛.

피로 목욕을 한 듯 시뻘겋게 젖은 육체 위로, 맹렬하게 타오르는 눈이 오금을 저리게 만든다.

살인을 갈구하는 야수.

절대적인 포식자 앞에서, 처분만을 기다리는 피식자로 전락한 공지량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네놈 때문에 죽어간… 모든… 생명들에게… 사죄…….”

쿠욱.

무릎이 접힌다.

눈앞이 흐려진다.

체력이 전소됐고,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안 돼… 마무리를…….’

굳어버린 혀는 말도 뱉어내질 못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걸 끝으로, 그믐은 의식을 잃었다.

“하… 하하! 하하핫…! 으하하하하!”

안도감에 눈물이 고일 지경이다.

꼼짝없이 죽는 줄만 알았다.

비척비척 걸어오다 거꾸러진 그믐을 보며, 공지량은 미친 듯이 웃었다.

‘하늘은 내 편이다! 날 버리지 않았어!’

공지량이 저 멀리 날아가 버린 서벽신검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일대를 마비시켰다.

그것은 재앙이었다.

인간의 몸을 빌어 구현된 대자연의 분노이자, 생존을 허락지 않는 파괴의 손짓이다.

얼음과 불.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기운의 융합은 세상에 존재한 적 없던 필멸의 섬광을 잉태했다.

“서리불꽃.”

콰우우웅―

빛기둥이 쏘아진다.

봉검이 절대 존재해서는 안 될 힘이라 결론지었던 사내의 무력은 또다시 한계를 깨부수고 새로운 경지를 열어젖혔다.

와족 역사상 단 한 번도 출현한 적 없었던 기예.

지난 천 년간 누구도 떠올리지 못했던 발상.

육신의 강도를 높이고, 타격의 살상력을 끌어올리는 수준이 아니다.

궤적에 걸리는 모든 것을 말살시킬 자연기의 응집체가 공간 자체를 소멸시켰다.

“이, 이게 무슨…!”

경악성을 토하는 게 봉검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누구도 받아낼 수 없으리라 믿었다.

초절정에 진입한 자들만의 전유물.

활활 타오르는 적색의 염화 강기(罡氣)는 피나는 수련 끝에 터득한 일생일대의 역작이었다.

거기에 삼십 명의 내공을 더해서 뽑아 올린 여섯 자 길이의 도강(刀罡).

개인의 힘으론 절대 막을 수 없으리라 여겼던 적색의 도가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허! 허허허! 허허…!”

이런 걸 받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존재하리라 상상해본 적도 없는 힘이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온다.

덮쳐오는 거대한 재앙 앞에서 봉검은 넋을 놓았다.

“장로님! 피하십시오!”

무(武)의 경지가 낮아 그 압도적인 힘을 제대로 실감할 수 없는 자들이 오히려 움직였다.

검진을 이탈한 봉검대와 운검대의 검사들이 자포자기한 두 명의 대장로를 양옆으로 밀쳤다.

스아아아악―

그저 희미한 소음이 남았을 뿐이다.

백색의 빛기둥이 훑고 지나간 궤적에는 완전한 무(無)의 길이 펼쳐져 있었다.

공기마저 낱낱이 분해되어 진공 상태가 되었던 공간에 다시금 공기가 들어찼다.

쿠콰콰콰콰쾅!

귀청을 찢는 폭음이 그제야 뒤를 따른다.

곧게 뻗어 나간 섬광은 힘이 다했는지 소멸이 아닌 폭발의 형태로 마감됐다.

창산을 상징하는 열아홉 봉우리.

그 중간에 자리한 응락봉(應樂峰)의 밑자락이 화탄이 터진 듯 붕괴해 있었다.

“다… 다들…….”

한순간에 십 년은 늙어버린 듯한 봉검이다.

건너편에 망연자실하게 무릎 꿇고 있는 운검을 제외하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 어디로 간 거냐…….”

시체는커녕 머리카락 한 올 남지 않았다.

육십 명의 봉검대와 운검대는 문자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이… 이…··! 쿨럭!”

크나큰 충격이 역류하는 기혈조차 멈춰 세웠던 것일까.

혼신을 다한 일격이 강제로 중단됐는데 멀쩡할 리 없다.

봉검과 운검이 고개를 꺾으며 피 뭉텅이와 기침을 토했다.

“후우우우…….”

단 한 수로 전장 전체를 침묵시킨 사내.

너른 하늘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지치는구나.”

말 그대로 모든 걸 쏟아부은 일격이자, 목숨을 건 시도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잎의 노래가 부여한 치유의 기운이 텅 빈 몸을 휘도는 걸 느끼며, 사내가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만 쉬자.”

“그르릉…··.”

저 멀리 튕겨져 날아갔던 대호가 어느새 다가와 너른 하늘의 등을 받쳤다.

그건 지친 벗을 쉬게 하는 배려인 동시에 호위이기도 했다.

“크르르르…….”

호랑이의 울음을 인간이 알아들을 리 없지만, 이 순간만큼은 모를 수가 없다.

살벌하게 번쩍이는 눈은 누구든 다가오면 죽이겠다는 엄포가 분명했다.

“조금만 쉬고…….”

마음 같아선 드러누워 잠들고 싶지만, 아직 그럴 수 없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꼭 마주해야 할 자가 있었다.

“저리로 가자.”

들어 올린 고개.

또렷하게 잡히는 초점.

냉정한 판단을 위해 눌러두었던 분노가 서서히 차오른다.

너른 하늘의 시선 끝에는 혼백이 달아난 듯한 표정의 공지량이 걸려 있었다.

“아저씨…!”

마른 비는 울먹이고 있었다.

뒤늦게 따라붙은 원승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여규를 바로 앉혔다.

“잠시 붙들어 주시오, 소협.”

탁, 타닥, 타탁!

등을 세워 곧게 고정시킨 자세.

원승의 검지가 여규의 경혈(經穴)을 타고 빠르게 내려왔다.

백회(百會), 아문(瘂門), 신도(神道), 명문(命門), 장강(長强)…….

인체의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선.

운기조식 시에 내력을 휘돌리는 혈도의 순서를 거꾸로 짚는다.

들끓던 내기가 가라앉고, 뭉쳤던 울혈이 여규의 입을 통해 왈칵 뿜어져 나왔다.

창백하던 여규의 안색이 차츰 본래의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후우… 급한 대로 조치를 취했으니 안심하시오, 소협. 역류한 내력이 많지 않아 큰 부상은 면했소. 내공의 양이 적은 게 이럴 때는 이점으로 작용하는군. 그리고 사형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단전 하나만큼은 굉장히 튼튼하게 닦여 있소이다. 아마 여 장로… 아니, 사형의 아버님께서 그 부분만큼은 확실히 하고 떠나신 듯하오.”

중원 내공심법의 이치를 모르는 마른 비로서는 원승이 방금 무얼 한 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다만 여규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 걸로 보아 급한 불은 끈 게 분명했다.

마른 비는 원승 덕분에 콧물을 들이마실 뻔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흑…! 다행이야! 고마워, 아저씨!”

원승이 뭐라 답변하기도 전에, 다급함이 묻어나는 음성이 마른 비의 등 뒤에서 다가왔다.

“비아야! 괜찮은 것이냐? 너, 이놈! 당장 뒤로 물러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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