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13화 (113/463)

113화

아수라장을 뚫고, 와족의 청년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흉흉한 기세로 보아 마른 비와 바짝 붙어 있는 원승을 경계하는 게 분명했다.

“아직 어린아이다! 비아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걸치는 순간,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죽일 것이야!”

원승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보시오. 소협은 나보다…….”

강하다고 말하려 했지만, 눈이 돌아간 청년들의 귀에 들어올 리 없다.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힌 그들을 멈춰 세운 건 마른 비였다.

“형들? 내가 걱정돼서 온 거야? 고마워. 근데 오해야. 아저씨는 날 도와줬어.”

“……?”

이게 무슨 소리냐?

도와주다니? 적이? 대체 무엇을?

“규가 다친 걸 고쳐줬어. 이 둘은 내 친구야.”

“…….”

친구라고? 누가?

저 남자가? 의식을 잃은 한족 소년이?

찢어 죽여도 모자랄 점창 놈들과 친구는 무슨 놈의 친구?

납득이 갈 리가 없다.

이맛살을 찌푸린 청년이 호통을 쳤다.

“비아야!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그놈들은 적이야! 게다가 그 둘은…!”

전사들을 몇 명이나 해친 자들이다.

산과 대치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놈을 제외하면, 이 전장에서 가장 까다로운 두 명이기도 했다.

“적인 거 알아. 하지만 친구야. 날 도와줬단 말이야. 형들, 말도 안 되는 거 알지만 이번 한 번만 돌아서 줘.”

그래, 잘 알고 있구나.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웃기지 말라며 달려들려는 찰나, 이어진 말이 청년들을 멈춰 세웠다.

“이 둘이 아니었으면 난 벌써 적들에게 잡혀 죽었을 거야. 아버지를 협박할 인질로 쓰이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부탁이야. 이번만 그냥 보내줘.”

마른 비의 눈에는 진심이 그득하게 담겨 있었다.

“…….”

목숨을 살려줬다고?

언제? 어떻게?

이 천둥벌거숭이가 또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청년들의 얼굴이 난처함으로 물들었다.

‘빌어먹을,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란 말이다!’

이토록 진지한 표정의 비아는 처음 본다.

목숨을 구해줬단 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은혜는 은혜로 갚는 게 도리.

하물며 구명지은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있는 대로 인상을 찌그러뜨린 채 갈등하던 청년들이 한발 물러섰다.

“제길. 이거야 원……. 너! 또 마주치면 그땐 사생결단이다. 명심해! 그 꼬마를 데리고 얼른 사라져.”

의식을 잃은 여규.

위험한 상황이다.

적들과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승은 여규를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고맙소.”

목례를 한 원승이 여규를 둘러업고, 마른 비는 원래 정했던 표적을 노려봤다.

‘뭐야? 왜 여태 가만히 있지?’

공유립.

그는 검까지 내린 채 마른 비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 사제의 친구라는 게 저 아이였군.’

열다섯이라고 들었다.

그 연배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발달한 신체와 그 안에 내재된 막강한 기운.

중원의 내로라하는 후기지수들을 몽땅 데려와도 저 소년에겐 안 될 것 같았다.

‘더군다나 저 아이…… 싸움에 능하다.’

나보다 훨씬.

굳이 덧붙이지 않은, 생략된 뒷말이었다.

포위진을 돌파하는 소년의 몸놀림에는 실전을 연거푸 치러낸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능숙함이 배어있었다.

‘……싸워보고 싶다.’

가족에게조차 외면받은 청년은 노골적인 멸시와 천대를 견디며 차곡차곡 무를 쌓아 올렸다.

그 목적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아비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아니, 저자를 꺾고 싶다!’

지금은 아니다.

그것은 고독한 시간을 감내하면서도 스스로를 내리누르기만 했던 청년이 처음으로 표출한 격렬한 감정이었다.

욕하면 들었고, 때리면 맞았다.

시키는 모든 걸 묵묵히 수행했다.

감정? 어찌 괜찮을 수 있을까.

하지만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다.

항상 외부 환경에 맞춰 자신을 죽여 왔던 청년이 비로소 내면의 울림에 응답한 순간이었다.

호승심.

내가 쌓아 올린 무와 상대의 그것을 견주고, 승리한다.

내가 더 위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

저자를 내 발아래 두고 싶다.

당장 뛰쳐나가 검을 휘두르고 싶다!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마른 비를 보는 순간, 공유립은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저 소년이 강해서? 족장의 아들이라? 저자를 꺾어야 전장을 평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도 아니라면, 척 보기에도 자유분방하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 같은 소년의 분위기에 자극이라도 받은 건가?

모르겠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이번만큼은 마음이 가는 대로 나 자신을 위해 검을 들겠다.

지금 이 순간, 공유립의 눈에는 마른 비만이 보였다.

“하아앗!”

무언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또 한 번의 변모를 겪은 청년이 날아올랐다.

“그래! 비겁한 자식! 덤벼라!”

마른 비도 기다렸다는 듯이 땅을 박찼다.

그러나 청년과 달리, 소년을 움직이는 건 순수한 분노였다.

자연기가 전해주는 기운은 무척이나 맑다.

여규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남자였다.

하지만 이번만은 자연기가 틀렸다.

치졸하고, 졸렬하며, 비열한 놈이다.

산과 여울에게 한 행동들을 용서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쁘게 숨을 헐떡이는 여울의 모습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소년이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퀴우우우웅―!

그 순간, 백색의 광휘가 번쩍였다.

인세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초월적인 힘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이, 이게 뭐야?”

“조… 족장님?”

쿠콰콰콰쾅!

와족의 전사들도, 점창의 무인들도.

응락봉의 밑자락을 집어삼킨 빛기둥 앞에서, 전장 전체가 얼어붙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살기를 발산하며 서로를 죽이던 인간들이 일시에 침묵했다.

단둘.

모두의 눈이 너른 하늘에게 돌아갈 때도.

머리 위를 가로지른 가공할 기운에 전장 전체가 전율할 때도.

집중력을 잃지 않은 건 둘 뿐이었다.

서리불꽃이 봉우리를 때리는 순간, 소년의 주먹과 청년의 검이 맞부딪혔다.

저벅, 저벅.

남자가 움직인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살아남은 모두가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호위하듯 따라붙은 대호조차 발걸음 소리가 새는 걸 삼간다.

질식할 듯한 침묵이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챙- 치칭! 퍼벅! 빠악-!

단 한 곳.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도 자제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를 거스르고, 눈치 없게 싸워대는 두 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남자의 행보에 주목했다.

“으… 으으…….”

이 순간, 가장 끔찍한 감정에 휩싸인 자를 고르라면 모두가 이자를 지목할 터다.

공지량의 눈은 애처로울 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내, 냉정해라!’

저자는 힘이 완전히 고갈됐다.

아까 바람 빠진 풍선처럼 주저앉는 걸 보지 않았나.

아무렇지 않은 듯 걸어오고 있지만, 실상은 걸음을 떼는 것조차 버거울 거다.

기감을 퍼뜨려 봐도 좀 전까지의 웅혼했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텅 빈 그릇.

족장은 지금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허, 허장성세다! 저자는 지금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아! 점창의 제자들은 당장 저 야만인 놈을 저지해라!”

저벅, 저벅.

고요히 울리는 발자국 소리만이 공지량의 외침에 답했다.

“뭐, 뭣들 하는 거냐! 내 말이 들리지 않나?!”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아니, 열지 못한다.

침 넘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창백한 적요가 공지량을 나락으로 밀어뜨렸다.

“왜 가만히들 섰나. 끝을 봐야지.”

남자의 한마디.

그것은 이제 움직여도 된다는 제왕의 허락과 같았다.

호흡음까지 내리눌렀던 이들이 일제히 숨을 토하고, 멈춰 섰던 병력들이 떠밀리듯 전투를 재개했다.

하지만 양상은 극과 극이었다.

와족 전사들의 사기는 충천한 반면, 점창의 무인들은 하나같이 울 듯한 표정이었다.

저런 자가 있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다.

그저 본능적으로 발버둥 칠 뿐, 점창 제자들의 뇌리에서 승리라는 두 글자는 완전히 지워졌다.

작열하는 빛기둥을 본 순간, 그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포, 포기하긴 이르다! 병력은 아직 우리 쪽이…!’

여전히 헛된 기대를 품고 있는 건 공지량뿐이었다.

분명 좌측 전장에 남은 병력은 점창이 우세했으나, 곧 파멸을 알리는 최후통첩이 당도했다.

“빌어먹을 새끼들! 다 쓸어버려!”

후방에서 들이친 매서운 눈의 고함이 전장을 울리고,

“늦었다. 지금, 가세한다.”

전방에선 잎의 노래의 치유에 힘입은 우둔한 땅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전사들을 이끌었다.

“오오오! 가자, 형제들이여!”

신이 난 거친 모래의 외침에 진형을 이룬 와족의 전사들이 마지막 한 방울의 자연기까지 털어내며 적들을 깨부쉈다.

“안 돼… 안 된다! 천하제일… 점창은 천하제일문이……!”

평생에 걸쳐 준비한 계획이 와르르 무너진다.

형언할 수 없는 좌절과 열패감에 공지량의 무릎이 꺾였다.

저벅, 저벅.

묘한 일이었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함성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그 발자국 소리만은 모두의 귀에 생생하게 박혀 들었다.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 속에서도, 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은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또한, 접근하지 않는다.

남자가 걷는 길과 그가 당도할 종착지.

공지량에게 향하는 경로엔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웃기지 마라! 내가! 이 공지량이! 이렇게 무너질 것 같으냐!”

그건 숫제 발악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름 근거 있는 저항이기도 했다.

남자의 모든 기력은 소진된 게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네놈을 죽여 승리를 쟁취하리라! 카아압! 분광…!”

짜악!

“이익…!”

짝! 짜악!

시작은 따귀였다.

거침없이 걸어온 남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공지량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짜악!

“흡!”

짜악! 짝!

“큭! 커흡!”

저잣거리 파락호들의 싸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광경이 강대한 무력 집단의 수장끼리 맞붙은 결투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짜악! 짜악!

아무런 내력도 깃들어 있지 않다.

그저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뺨을 가차 없이 후려갈길 뿐이다.

좌우로 정신없이 돌아간 얼굴이 시뻘겋게 부어오를 때쯤, 공지량이 반격을 시도했다.

“이 개 같은…!”

퍼억!

다음은 발이다.

복부를 걷어차인 공지량이 붕 떠올랐다가 나뒹굴고, 배 속에 있는 걸 게워내기 시작했다.

“쿠웨엑…!”

빠악!

토할 틈도 주지 않는다.

성큼성큼 다가가 내뻗은 발길질에 공지량이 토사물과 뒤엉킨 채 땅바닥을 굴렀다.

‘왜, 어째서…!’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내력이라곤 한 줌도 남지 않은 놈에게 왜 무기력하게 얻어맞는 거지?

“자, 잠깐! 이런 건 무인의 싸움이 아니야! 명예… 명예로운 결투를 원한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성큼성큼 다가와 개 패듯이 두드려 팰 뿐이다.

“명예?”

남자가 처음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입은 열렸으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꽉 쥐어진 주먹이 하늘 높이 들렸다.

“네깟 놈이 명예를 논한단 말이냐?”

뻐억!

“크아아악!”

내리꽂힌 주먹이 공지량의 왼손 손가락 마디마디를 잘게 부쉈다.

‘이, 이놈…?’

왜 왼손 손가락인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냥 전신을 다져놓을 생각인 거다.

뼈 하나하나가 잘게 으스러져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릴 때까지.

공지량의 눈가에 시커먼 공포를 동반한 절망이 피어올랐다.

‘왜냐, 어떻게 이런 일이?’

으지직!

너무도 진한 두려움이 통증조차 날려버렸다.

왼손 손바닥이 박살 나는 와중에도 공지량은 불가해한 상황에 대한 반추를 거듭했다.

기술의 노련함?

압도적인 기세?

한계를 초월한 자의 깨달음?

모르겠다.

알 수가 없다.

한 줌의 내력도 남지 않은 자에게 왜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힘, 육체, 내력, 기세, 숙련…….

싸움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것들이지만, 그런 물리적인 조건 따위는 한계를 넘은 자에게 있어 부가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남자는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사, 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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