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어느 순간 전쟁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
그리고 누구도 감히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벌어지는 일방적인 구타.
모든 희망이 꺼져버린 공지량이 생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살려 주시오. 내가, 내가 잘못했소. 제발, 제발…!”
와지끈!
“끄아아아아!”
불가해는 더 큰 공포를 유발한다.
대항을 포기하자 삶에 대한 집착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미칠 듯한 통증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새하얗게 만드는 고통에, 공지량은 처절히 울부짖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다는 걸.
점창은 또다시 패배했다는 걸.
자신들의 수장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점창의 제자들이 검을 떨궜다.
“멈춰라!”
이대로 끝난다면 차라리 깔끔하련만.
듣기 싫은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양측이 생을 걸고 맞부딪힌 전장을 불협화음이 비집었다.
모두의 고개가 돌아간 곳에선, 비대한 남자가 호화찬란한 가마에 앉은 채 웃고 있었다.
전후
《“그걸 왜 나한테 묻나?”
남자는 초췌했다.
오랜 수감생활이 육신의 기력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간 모양이었다.
과거에는 비대하다 못해 굴리면 데굴데굴 굴러갈 것처럼 뚱뚱했다고 했다.
홀쭉하게 팬 볼과 뼈의 윤곽이 드러날 정도로 앙상한 몸은 그를 기억하는 자들의 증언을 무색케 했다.
“당시 전쟁의 현장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과거의 편린이 궁금한 자의 호기심 정도라고 해두지요.”
“젊은 나이에 할 짓이 더럽게 없나 보구먼.”
“…….”
불쾌함을 숨기지 않는 침묵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가 과거에 벌였던 일들을 상기해보면 호감은커녕 일말의 동정심도 생기질 않았으니까.
듣고 싶은 말이 있어 먼 길을 찾아왔지만, 필요한 대화 이외에는 주고받고 싶지 않았다.
“뭐, 좋아. 이야기 좀 들려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다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법. 자넨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나?”
“없습니다. 그런 건.”
“뭐야?”
웃기는 놈이다.
당연히 무언가를 준비해왔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뭘까.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이자가 아니라도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은 부지기수다.
그저 제3자로서 전장 전체를 관망했던 소감과 전쟁의 막바지에 끼어들었다가 낭패를 본 소회가 듣고 싶을 뿐이었다.
좀 더 욕심을 내자면, 마주쳤던 모든 이들이 찬탄을 아끼지 않는, 와족의 전대 족장이자 수왕의 아버지란 인물에 대해서도.
하지만 이따위로 나오는데 대화를 지속할 생각은 없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나를 보며,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 표정……. 정말이군. 이봐, 젊은이. 아직 풋내기라 뭘 모르는 모양인데 모름지기 거래라는 건…….”
“호르찰.”
더 이상 헛소리를 들어주기 힘들다.
이제는 멸망해버린 원(元)의 운남 총독이었던 남자.
그리고 원 말기에 축출되어 십여 년간 유폐되어있는 남자.
나는 주저 없이 그의 말을 잘랐다.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네깟 놈에게 아쉬운 게 있어서 방문한 게 아니야. 네가 가치 있는 무언가를 쥐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라. 그딴 이야기 듣지 않아도 그만이야. 네놈이 아니어도 들려줄 사람은 넘쳐나고.”
말문이 막힌 그에게 한마디 쏘아준 뒤, 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창살 안에서 죗값을 뉘우치며 마저 썩어가라고. 그럴 수도 없겠지만,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놈을 갈아 마시고 싶어 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뚜벅, 뚜벅.
매정한 발소리가 지하 뇌옥을 울렸다.
다급해진 목소리가 멀어지는 나를 붙잡았다.
“자, 잠깐만! 젊은이! 왜 이리 성급한가! 다른 건 필요 없네! 허리춤에 있는 그거면 돼!”
“……허리춤?”
내려다본 곳엔 육포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그래! 그걸 내게 주게! 아까부터 그 냄새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 그럼 내가 기억하는 모든 이야길 다 들려주지!”
남자의 눈엔 원초적인 욕구가 이글거렸다.
식탐.
십수 년을 멀건 죽만 먹어오다 고기 냄새를 맡았으니 눈이 돌아갈 테지.
설령 그게 바짝 마른 육포 쪼가리라도 말이다.
나는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뇌옥을 나서려던 발걸음을 되돌렸다.
“호르찰. 북방 초원의 언어로 탐욕이란 뜻이라지? 온갖 부귀영화를 탐했던 자가 고작 육포 조각 하나를 두고 애원하는 꼴이라니.”
그는 내 조롱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창살 밖으로 손을 휘저으며 주머니가 열리길 고대할 뿐이다.
나는 그의 눈앞까지 다가가 육포 한 조각을 꺼내 씹으며 말했다.
“내가 만족할 만한 이야기를 서둘러서 떠올리는 게 좋을 거야. 마침 나도 배가 고프거든.”
호르찰의 얼굴이 애처로울 만큼 일그러졌다.》
혼세록(混世錄) 대담 편
「전(前) 운남 총독 호르찰」
삭월 월목대주 비아인 저
* * *
“헉, 헉! 크헉… 카학!”
불규칙적으로 끊기는 호흡을 다스리기 위해 몇 번이나 숨을 들이마셔 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골절된 흉부의 뼛조각이 가슴을 찌르고, 묵직하게 남은 통증이 호흡을 방해한다.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의 숲.
간신히 전장에서 이탈한 공유환은 땅에 엎어진 채 연신 피를 뱉어내고 있었다.
“후우, 후욱……. 괜찮으십니까, 대사형?”
마른 비에게 가슴을 얻어맞고 널브러져있던 공유환을 여기까지 업고 온 자.
땅바닥에 주저앉은 호국영이 기진맥진한 얼굴로 공유환을 돌아봤다.
“후우… 지금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 꼬맹이… 불과 십여 일 만에 어떻게 그렇게 강해질 수가 있는 건지……. 저도 놈을 잡기 위해 달려들었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맹렬히 회전하던 그 정권!
사형제들을 방패 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목숨을 잃었을 거다.
마른 비의 주먹이 날아들던 순간을 떠올리자, 호국영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더 끔찍한 건 그 야수였지.’
족장의 아들도 강했지만, 전장을 정리하기 위해 남았던 백호는 살아 움직이는 하얀 악몽이었다.
앞발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고르고 고른 이, 삼대 제자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갔다.
사형제들이 저항하는 동안 도망치지 않았다면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터.
푸른빛으로 번쩍이는 맹수의 안광은 손 쓸 수 없는 공포, 그 자체였다.
“컥… 흐욱, 카학!”
호국영이 지난 상황을 되새길 때까지도 공유환은 여전히 호흡 곤란을 겪고 있었다.
‘안 되지, 안 돼. 죽어선 안 된다.’
자신도 토혈을 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었다.
제 몸을 빼내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공유환까지 업고 나온 건 그를 살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공유환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그가 죽었는데 혼자만 살아남았다면 장문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
모르긴 몰라도 일전의 거래가 온전히 이행되진 않을 게 뻔했다.
“대사형. 다행히 부러진 뼈들의 상세는 그리 심각하지 않습니다. 급한 대로 뒤틀린 기혈부터 바로 잡으시면 됩니다. 명문에 진기를 주입할 테니 받아들이십시오.”
한족 출신의 정통 제자들이 수련하는 운봉청명공과 호국영이 연마한 백족천인공은 뿌리를 달리하는 심법이다.
하지만 지난 백 년간, 점창은 백족 고유의 무공을 완전히 흡수하는 데 성공했고, 그건 내가심법에 있어서도 상통하는 지점을 이끌어냈다는 뜻이었다.
호국영의 진기는 큰 저항 없이 공유환의 육체에 스며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상세를 호전시킬 수 있었다.
“쿨럭, 쿨럭…! 이… 이 새끼야!”
퍼억!
난데없이 날아든 오른발.
복부를 걷어차인 호국영이 붕 떠올랐다 나동그라졌다.
“크헉!”
무방비로 얻어맞은 일격은 호국영의 속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이, 이 미친 새끼가 갑자기 왜?!’
억울함과 분함이 버무려진 눈초리가 공유환을 향했다.
“네놈, 네놈 때문이다! 이 멍청한 새끼야! 네가 애초에 그 야만족 놈을 막았으면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컥!”
울화를 이기지 못한 게 틀림없다.
겨우 바로 잡은 기혈이 다시 틀어졌고, 공유환은 한 사발은 됨직한 피를 토했다.
“이… 개 같은! 그딴… 더러운 원숭이에게 이런 모욕을…!”
핏발 선 눈은 영락없는 광인의 그것이었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지난 일로 정상이 아니란 건 알았지만, 이건 완전히 미친놈이 아닌가!’
목숨을 살려준 데에 고마워하기는커녕 제가 부족해서 패한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성질대로 내지르는 저 손 속.
호국영은 살의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안 돼…. 참아라. 참아야 한다!’
점창이 아니면 갈 곳이 없다.
그리고 자신은 빛나는 미래에 대한 약조를 받아놓은 상태다.
마른 비가 난입한 직후 전장을 이탈한 호국영은 설마 점창이 패하리란 생각은 꿈에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악! 이런 씨바알! 으아아아!”
핏발 선 눈과 연신 입으로 뿜어져 나오는 피.
하지만 공유환은 그런 것 따위 염두에 두지 않고 울부짖었다.
상세의 악화보다 당장 끓어오르는 분노를 토해내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다.
광인이 토해내는 메아리가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그 개새끼! 죽인다!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사지를 토막토막 잘라서 운남의 들개 밥으로 주고 말 테다! 아아악!”
“사지 절단. 들개 밥. 좋지. 전형적이지만 나쁘지 않은 복수의 방법이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광인의 발작을 끊었다.
그 음성엔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았고, 그래서 비할 데 없이 섬뜩했다.
“감히 어떤 새끼가?!”
고개를 돌린 곳엔 한쪽 소매가 휑한 회색 눈의 노인이 서 있었다.
“설지굉?!”
눈이 돌아가니 뵈는 게 없다.
공유환은 자신이 동네 친구 이름 부르듯 설지굉을 불러 젖혔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네놈이 왜 여기 있나!”
“대… 대사형!”
설지굉의 무서움을 잘 아는 호국영은 조마조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착 가라앉은 저 눈빛.
왜 하필 지금 여기에 나타났는지도 의문이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아니, 그런 걸 다 떠나서 건방지게 이름을 불러대고, 네놈 어쩌고 하는 걸 저 노인이 용납할 리 없다.
하지만 호국영의 예상과 다르게, 설지굉은 웃었다.
“호오… 우리 대공자께서 화가 많이 나셨나 보구려. 평소와는 많이 다른 듯한데…… 어인 일인지 물어도 되겠소이까?”
저 웃음!
보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쫙 돋는다.
‘아, 안 돼…! 이자, 이자 설마…?’
안색이 새파래진 호국영이 공유환과 설지굉을 번갈아 봤다.
좋지 않다.
이건 정말 좋지 않다.
한데 이 미친놈은 지금 상황을 읽지 못하고 있다.
그때, 전전긍긍하는 호국영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히는 말이 터져 나왔다.
“너 이 새끼! 멀쩡히 움직일 수 있는데 어디 처박혀 있던 거냐! 사문 전체가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데 장로라는 새끼가…! 당장 튀어 나가서 싸우지 못하겠나!”
‘미, 미쳐도 곱게 미칠 것이지, 이 정신 나간 새끼가…!’
호국영의 얼굴은 이제 파란 걸 넘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가만! 맞아… 늙은이, 네놈 때문이다! 멍청하게 너와 설검대가 꼬마를 놓치는 바람에 내가 모욕을 당하지 않았나! 밥값도 못하는 쓰레기들 같으니라고!”
뚜벅, 뚜벅.
발광하는 공유환의 옆으로 설지굉이 다가왔다.
그의 귀 옆까지 바싹 다가선 노인이 그제야 입술을 열었다.
“길바닥 출신. 거들먹. 조아리는 꼴.”
“뭐라고?! 갑자기 무슨 개소리를…!”
“정황과 설검대. 죽을 수밖에 없는 사지로 보냈다고?”
“……!”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확 든다.
주체할 수 없이 치솟던 울화가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씻겨 나갔다.
커질 대로 커진 공유환의 동공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다, 당신…! 아니… 서, 설검 장로님… 그때, 의, 의식이 있었…!”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뱉지 못했다.
아니, 정신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설지굉이 어떤 인간인지 그제야 떠올린 공유환이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서… 설검 장로님……. 제, 제가 흥분하는 바람에 실언을…!”
“살려는 주겠다고 했었지, 아마?”
“아, 아니 그것은…!”
“고맙지만, 난 아니야.”
서걱!
검이 휘둘러지고, 길쭉한 무언가가 하늘을 날았다.
공유환은 곡선을 그리며 하강하는 익숙한 물체를 멍하니 바라봤다.
‘내…… 팔?’
끔찍한 통증이 엄습한 건 직후였다.
“끄, 끄아…! 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