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왼팔이 잘려나간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인의 생존 본능은 그 와중에도 검을 잡았고, 점창식 발검이 노인을…!
“느려 터졌군.”
서거걱!
“끄… 끄어… 끄어어어…!”
지저분한 눈물이 앞을 가리는 와중에도 잘려 나간 오른손 팔목만은 한눈에 들어왔다.
“자네가 이런 경험은 처음일 것 같아서 내 일러주지. 원래 이런 건 한 번에 많이 자르면 안 돼.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마디마디를 잘라가는 거야. 그래야 최대한 오랫동안 고통을 선사할 수 있거든.”
서걱- 서거걱!
“크아아악!”
설지굉의 왼손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공유환의 상처부위를 짚었다.
“오. 깜빡할 뻔했군. 지혈을 하는 수고도 마다해선 안 된다네. 안 그러면 출혈 과다로 죽고 말지. 지금쯤 통증을 경감시키는 혈도도 눌러줘야 해. 고통이 뇌가 견딜 수 있는 한계치를 넘으면 충격으로 죽어버리거든.”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그래서 더 큰 공포를 선사하는 미소가 그어졌다.
“때론 한없이 강해 보이지만, 인간이란 참으로 나약한 동물이지.”
슈각! 서거걱!
피가 섞인 침을 질질 흘리며, 눈을 까뒤집은 공유환이 경련했다.
‘이, 이게…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짓이란 말인가…!’
잔인무도한 광경을 코앞에서 지켜보는 호국영은 혼백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끔찍한 공포에 사로잡힌 호국영은 누런 오줌을 실금한 것도 깨닫지 못했다.
스윽.
무감한 회색빛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호국영을 향했다.
“서… 설검 장로님. 저, 저는 아무런 말도…. 사, 살려 주십…!”
“예전 같으면 가차 없이 목을 쳤겠지. 목격자를 살려두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니까. ……이젠 아니야. 가라.”
“제, 제발…! ……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살려준다고?
장문인의 아들을 산 채로 써는 장면을 목격한 자신을?
호국영은 눈만 끔뻑거리며 설지굉을 바라봤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그리고… 알고 있겠지?”
“예… 예! 그럼요!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가 전쟁이 끝나고 합류한 겁니다!”
“그렇군. 그리고… 일전에 대리에서… 사제들 앞에서 무안을 주고 무시했던 것. ……미안했다.”
“……예?”
넋을 놓은 호국영의 대꾸에 설지굉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못 들었으면 됐다. 당장 꺼져라.”
“예, 예! 장로님! 감사, 감사합니다!”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을 듯 연거푸 인사한 호국영이 죽을힘을 다해 경공을 펼쳐 멀어져갔다.
“자, 우린 계속해야지? 저쪽도 꽤나 재미난 광경이 펼쳐지고 있더군. 늦지 않게 가봐야 하지만, 걱정은 하지 마라. 난 짧은 시간 내에 널 원하는 데까지 조각해줄 수 있거든.”
“끄… 끄윽… 주… 죽여…!”
“아차. 혀를 못 깨물게 해야 한다는 걸 깜빡했군. 내 수제자와 공들여 키운 제자들의 목숨값. 네 몸에 천천히 새겨줄 터이니 만끽하며 가거라.”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이 창산을 감싼 북쪽 숲을 울렸다.
* * *
“전원,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라! 특히 공 장문인을 핍박하고 있는 야만인! 당장 손을 멈춰라! 더 이상의 폭력은 내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야!”
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북동부의 언덕.
전장의 추이를 관망하다 나선 호르찰은 자신만만했다.
물경 천에 가까운 총독부의 관군이 호화로운 가마를 호위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예상치 못한 횡재를 한 자의 흡족함이 떠올라 있었다.
“오… 오오오! 대인! 살려, 살려 주십시오!”
체면이고 뭐고 없다.
죽음의 문턱을 넘기 직전,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발견한 공지량이 목놓아 애걸했다.
‘흐흐흐. 당연히 점창이 이기리라 예상했는데……. 아주 좋군. 이런 의외의 전개라니.’
공지량은 철저히 숨긴다고 숨겼겠지만, 대량의 군용 물자가 점창으로 흘러 들어가는 걸 포착한 지는 꽤 됐다.
세간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점창은 큰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며, 당장 황실에서 가만 놔둘 리 없었다.
자신이 덮어주고, 눈감아주기로 약조했다?
무슨 소리.
자신은 ‘소란’을 묵인해주기로 했지, 그런 금용(禁用) 병기의 사용은 허가한 적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는 순간 덮쳐서 옴짝달싹 못 하게 옭아매려 했거늘. 이건 군용 병기의 사용 문제를 넘어 목숨을 구해주는 꼴이로구먼. 공 장문인. 자넨 이제 죽을 때까지 내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야.’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다.
지금도 운남의 왕처럼 군림하고 있지만, 이제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오늘부로 운남 전역의 알짜배기 땅들을 실질적으로 손에 넣게 될 테니까.
‘처음 이 오지로 파견됐을 때는 하늘을 저주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운남의 총독이 된 게 하늘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천하 정세를 살피는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원은 곧 무너진다.
그리고 초원 출신인 자신이 한족들이 세울 나라에서 득세하는 건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원의 잔당으로 내몰려 참수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허나 난세엔 언제나 기회가 열려 있는 법.
새로운 천하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누가 되든 건국 세력은 백 년에 걸쳐 새겨진 원의 흔적을 지우기 바쁠 것이며, 저항군을 제압하고 중원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게 틀림없다.
그 말은 중원 남서쪽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오지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뜻이었다.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막강한 세력을 일구어 놓는다면.
천하가 뒤집히기 전에 건국에 일조했다는 적당한 명분만 새겨 넣는다면.
운남을 다스리는 한 명의 제후로서 지위를 보장받는 게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리라.
황실에 발각되면 끝장날 위험까지 감수하며 강남의 불온 세력들과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는 이유였다.
“뭐냐, 너는?”
묵직한 힘이 실린 음성이 호르찰의 기분 좋은 망상을 깼다.
호랑이의 야성을 그대로 옮겨놓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만족의 수괴!’
호르찰이 한순간 바싹 말라버린 침을 꿀꺽 삼켰다.
천하를 제패한 몽골의 전사들이 경외해 마지않는, 모든 초원 전사들의 스승 오스트갈을 먼발치서 알현한 적이 있다.
붉은 갈기를 휘날리는 전투마에 올라, 두터운 참마도(斬馬刀)를 한 손으로 비껴든 그 모습.
천하를 오시하는 유일무이한 무장의 위용에 감히 고개조차 들어 올리지 못했었다.
‘이 야만인…….’
병장기를 지닌 채 카안을 알현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가 오스트갈이다.
그가 살심을 품는다면 누구도 막아낼 수 없기 때문에 병기를 맡기는 짓 따윈 무용하다는 카안의 지시였다.
그건 북방 초원에서 천하 최강으로 추앙받는 위대한 전사에 대한 예우이자 신뢰의 표시이기도 했다.
‘어쩌면 오스트갈 님보다 더…!’
강하다.
무(武)는 모르지만, 사람 보는 안목만은 최고라 자부한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알겠다.
믿을 수 없게도, 이자는 초원 최강의 전사보다도 강한 힘을 지닌 게 틀림없었다.
‘초월적인 무력……. 인간이라 보기도 힘들군.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일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가 수백의 식솔을 거느린 수장이며, 운남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일개 부족의 족장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대기(大器)는 반드시라고 해도 될 만큼 책임감이 강하다.
자신이 품어 안은 자들을 버리지 못한다.
‘거기에 돌파구가 있지.’
저자가 마음먹고 달려든다면 천 명의 관군 따윈 손짓 몇 번에 쓸려나갈 터.
하지만 절대 그리하지 못할 거다.
“본인은 천하의 주인이신 토곤테무르(타환첩목이妥懽貼睦爾) 카안의 명을 받고, 운남을 다스리라 파견된 총독 호르찰이다! 네놈들이 감히 카안의 대지 위에서 멋대로 전쟁을 벌이고도 무사하리라 생각하는가!”
어느 누구도.
황실의 권위를 등에 업은 자신에겐 대들지 못한다.
공지량을 보라.
구파일방이니 뭐니 하는 한족 칼잡이들의 수장 중 하나지만, 찍소리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당연하다.
감히 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힘 따윈 존재하지 않으니까.
황실이 임명한 총독을 건드리는 건 황실을 거스르는 거나 마찬가지며,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순간, 원 황실의 추살대가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목을 딸 테니까.
책임질 사람들이 있는 너른 하늘의 입장과, 그와 관련된 모두를 몰살시키고도 남을 힘.
호르찰이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설 수 있었던 이유였다.
‘흐흐흐. 무력 따위가 아니다. 권력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이니라.’
점창의 무인들이 질겁하여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걸 보며, 호르찰은 여유 있게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뭐라? 용납? 감히?”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목소리가 전장의 후방에서 들려왔다.
“저 집돼지가 지금 뭐라고 꿀꿀대는 겁니까, 족장님?”
“지, 집돼…!”
호르찰의 볼살이 떨어져 나갈 듯 푸들댔다.
“대체 무슨 짓을 하면 비계가 그렇게 덕지덕지 붙을 수 있는 거냐? 너, 니 발로 걸을 수는 있냐?”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남자가 물었다.
호르찰이 노호를 터뜨리려는 순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무, 무슨 놈의 눈빛이…!’
살점을 도려낼 듯한 안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와 심신을 위압한다.
족장의 눈이 압도적인 위엄과 항거할 수 없는 패력을 드러낸다면, 이자는 오직 하나뿐이다.
살기.
백전을 겪은 전사들조차 마주보기 버거워하는 매서운 눈의 안광을 호르찰이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이 무지한 놈들이 운남 구석에 처박혀 살아서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인데…!”
“안다, 카안. 중원 족장.”
‘엄청난 덩치…!’
이번 목소리는 전장의 전방에서 들려왔다.
먼 곳에서도 단번에 시선을 끌어당겼던 거인!
두 눈을 의심케 할 몸집의 남자가 호르찰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르찰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눈빛의 남자가 거인에게 면박을 줬다.
“넌 싸울 때 아니면 말하지 말랬지. 위에 사는 애들은 족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잖아. 왕이니 황제니 하는 거 할아범한테 못 들었냐, 멍청아? 그리고 카안인지 가안인지 하는 건 저 꼭대기 넓은 풀밭에 사는 애들의 대가리를 말하는 거다.”
“오오~ 과연 부족장!”
전사들이 매서운 눈의 식견에 감탄을 내뱉고, 그가 우쭐해 할 무렵, 거인이 말했다.
“지금 한족 땅, 풀밭에 살던 애들이 백 년째 먹었다. 그리고 왕, 황제, 카안, 족장. 별 차이 없다. 무리의 수장, 대가리를 말하는 거다.”
매서운 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걸 보며, 우둔한 땅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눈깔, 무식하다.”
몽골의 신성한 대지인 북방 초원이 꼭대기 넓은 풀밭으로, 천하의 주인인 카안이 원시부족의 족장과 동급으로 격하됐다.
원의 뿌리는 초원이고, 서방 세계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한다는 사실 따위, 와족의 전사들은 관심 없었다.
지금 어디 사는지가 중요할 뿐.
중원의 족장.
원의 초석을 쌓아 올린 전대 카안들과 달리, 당대의 카안은 일 년의 대부분을 초원이 아닌 중원의 대도(大都)에서 머무르니 우둔한 땅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다.
“이, 이 무엄한 것들이! 감히 카안을 능멸하고도…!”
이놈들이 제정신인가?
원 황실이 임명한 일성(一省)의 총독을 앞에 두고 이토록 긴장감이 없다니?
화가 머리끝까지 난 호르찰이 고함을 지르려는 찰나, 좌중을 평정하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만.”
호르찰이 입을 다물고, 너른 하늘은 입술을 열었다.
“북쪽의 땅을 그대들의 수장이 지배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이 시대의 가장 강성한 세력이라는 것도. 한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우리는 침략을 받았고, 우리의 터전을 침범한 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너에게 묻겠다. 죄 없는 소수부족들을 해하고, 그들의 터전을 짓밟았으며, 우릴 죽이고자 칼을 들이민 자들을 용서하란 말인가?”
“그, 그건…!”
“카안의 땅이니 뭐니 하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는 하지도 말라. 이곳은 누구의 땅도 아니다. 그저 터를 잡고 살아가는 순박한 이들이 있을 뿐. 굳이 너희식대로 소유의 여부를 따진다면 이곳은 우리 토착부족들의 땅이 되겠지. 너희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문서를 만들고 날인을 찍고 하는 번잡한 과정을 거친 게 아니더냐. 한족들이 이야기하는 대의와 명분이 모두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전장의 모두가 너른 하늘의 입을 주목했다.
잠시 입술을 축인 남자의 눈이 빛났다.
“잡소리 집어치우고, 이만 꺼져라.”
“우오오오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