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전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너른 하늘의 달변은 그들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었다.
“뭐야? 저 양반이 저렇게 말을 잘했던가?”
매서운 눈이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원래 이런 건 할아범의 몫이었는데…….”
‘아차!’
전투가 이어지고,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이 시답잖은 소릴 늘어놓는 바람에 잠시 잊었다.
매서운 눈이 피투성이가 된 그믐에게 달려갔다.
“할아범! 괜찮소?!”
“의식은 없지만, 아직 살아 계십니다. 하지만 부상이 너무 심각하여 이대로는…….”
그믐의 상세를 돌보던 검은 수리들이 말끝을 흐렸다.
할 수 있는 조치를 모두 취했음에도 그믐의 기식은 엄엄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매서운 눈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저 개새끼를 단박에…!”
이미 수장끼리의 승부는 났다.
나중에 한소리를 듣더라도 지금 당장 목줄을 따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
매서운 눈이 너른 하늘의 발치에 널브러져 있는 공지량을 노려봤다.
“이, 이렇게 나오면 뒷감당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포기할 수 없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는 건 너무나 아깝다.
너른 하늘에게 주눅이 들었으면서도, 호르찰은 구질구질한 협박을 계속했다.
“네놈. 총독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 땅을 다스리라 명받았다면서?”
그 끈질긴 추잡함에, 너른 하늘도 인내심이 끊어졌다.
쾅!
“크아아아악!”
공지량의 왼팔을 짓밟아 으스러뜨린 그가 호르찰이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한데 이게 뭐 하는 짓거리냐? 소수부족들이 당하는 걸 몰랐을 리 없을 텐데. 여태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란 말이지?”
서서히 차오르는 붉은 기운.
너른 하늘조차도 더 이상은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양보는 할 만큼 했다. 이게 정녕 네놈들의 뜻이라면 맞서 싸울 뿐. 할 말이 있다면, 왕이든 황제든 카안이든. 직접 내 앞에 와서 따지라고 전해라.”
쾅!
전사의 육신이 하늘을 난다.
어찌 모를까.
원 황실과 맞붙는 건 달걀로 바위치기나 다름없다는 것을.
하지만 물러서야 할 때가 있고, 그래서는 안 되는 때가 있는 법이다.
억울하게 당한 소수부족들의 한은 누가 갚아준단 말인가.
빼앗긴 터전을 누가 되찾아줄 수 있단 말인가.
비열한 암수에 쓰러져간 형제, 자매들의 복수는?
설령 부족 전체가 위기에 빠지더라도 지금은 물러설 수 없다.
아니, 물러서면 안 된다.
그것은 모든 전사들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순간부터는… 네놈들도 적으로 간주한다.”
콰콰캉!
호르찰에게 다가가는 길.
넋 놓고 있던 점창의 무인들이 일거에 쓸려나갔다.
너른 하늘의 진노를 느낀 것일까?
어느새 합류한 푸른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짙은 포효를 토했다.
전사들도 움직였다.
“족장님을 따라라!”
“다 쓸어버려!”
가만히 있었으면 공지량이 목숨을 잃는 걸로 마무리될 수도 있었을 텐데.
호르찰이 끼어드는 바람에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그를 노려보는 점창 무인들의 눈엔 원망과 살의가 완연했다.
“이런 빌어먹을…!”
“으아아아! 도망쳐!”
진형이고 뭐고 없다.
지휘자들 전원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고, 사기는 바닥을 친 지 오래다.
등 돌린 점창의 무인들이 불에 놀란 메뚜기 떼처럼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주, 죽는다…!’
돌진해오는 너른 하늘의 무시무시한 위용에 호르찰의 얼굴이 사색이 됐을 때,
키이이이잉―
무언가가 끊기는 감각이 전사들의 뇌리를 스쳤다.
풀썩- 풀썩- 쿵- 쿠쿵-!
날아올랐던 와족의 전사들이 줄 끊어진 연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전투 화장의 시간이…!’
오래 버틴 거다.
이만큼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잎의 노래의 축복이 아니었다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반려수들까지 일제히 힘을 잃고 쓰러지자 호르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 하하…! 카하하하하! 이게 뭐냐?!”
영문은 모르겠지만 힘이 다한 게 틀림없다.
절호의 기회였다.
“총독부의 병사들과 점창의 무인들은 지엄한 명을 받들라! 이 야만인들을 모조리…!”
“큰 착각을 하고 있군.”
뻐어억! 빠악!
촤아악-! 추학!
분쇄되는 뼈와 흩날리는 살점.
너른 하늘과 푸른 눈은 한 점 흔들림도 없이 서 있었다.
“푸른 눈. 너는 힘을 잃은 전사들을 돌봐라.”
“크릉.”
신이 났던 호르찰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이놈들을 쓸어버리는 건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수장급들은 전투 화장을 늦게 발동한 데다, 기본적인 체력 자체가 다르다.
반전한 푸른 눈과 아직까지 멀쩡한 우둔한 땅, 매서운 눈, 거친 모래 등이 곳곳에서 쓰러진 전사들을 지켰다.
푸화하학!
붉은 피가 일직선으로 줄줄이 솟구친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한순간에 치워버린 너른 하늘이 호르찰의 면전에 당도했다.
“으, 으…! 으아아악!”
가마꾼들이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쳤다.
가마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나뒹군 호르찰이 흙투성이가 되어 부들부들 떨었다.
“끼어들어서는 안 될 곳에 끼어든 네놈의 어리석음을 탓해라.”
그때!
쉬아아아악―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날아들고,
쩌저저정!
은빛 찬란한 빛줄기를 흩날리는 검이 너른 하늘의 정권을 가로막았다.
“……?!”
위엄 어린 독수리가 수놓인 흑색 군복의 소매가 충돌의 여파에 휘날린다.
그리고 올곧은 정광이 자리한 두 눈.
주먹을 막아선 검날 아래,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너른 하늘을 직시하던 눈이 번쩍였다.
차차창!
사납게 요동치는 검날이 바윗덩이 같은 주먹을 밀어냈다.
“음.”
훌쩍 물러난 너른 하늘이 옅은 신음을 흘리며 난입한 사내를 노려봤다.
“누구냐?”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부드럽게 휘돌린 검 끝이 지면을 향한다.
그 자세는 일견해도 당장은 부딪힐 의사가 없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난리가 벌어진 건지. 그리고 당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물어야겠소.”
쉬아악―
사내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비범한 경공이 좌중의 눈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뒤늦게 나타난 자는 도착하자마자 무척이나 힘겨운 듯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이리 빨리 가시면 저로서는 따라잡기가…… 응?”
허리를 굽히고 호흡을 고르던 사내가 땅바닥에 널브러진 호르찰을 봤다.
그리고 눈썹을 추켜 올렸다.
“그 특징적인 외모……. 혹시 호르찰 총독?”
“그, 그렇소만…….”
사내의 얼굴이 갑자기 활짝 피었다.
“오오! 총독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이리로 오신 겁니까? 제가 오해를 했습니다!”
하지만 너른 하늘을 막아선 중년 사내는 묘한 표정이었다.
“그럴 리가 있나. 와보니까 있는 걸세.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군.”
“……알고 오신 게 아니라면…… 곤명에 들르기 전에 대리부터 온 건 명백히 순서에 위배되는 행동입니다, 장군.”
수하로 짐작되는 고지식한 사내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리고 그의 말끝에서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를 잡아낸 점창의 무인들과 총독부의 관군들이 술렁였다.
“뭐라고? 장군?”
“장군이라니?”
“방금 장군이라고 한 게 맞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히 수군대기 시작한 좌중 사이에서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 어…? 어어엇!”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게 시작이었다.
곧 여기저기서 비명에 가까운 탄성이 이어졌다.
“자, 잠깐! 저… 저자! 아니, 저분은…!”
십 년에 가까운 외유.
원 황실에 투신했던 사내가 돌아왔다.
공지량이 그토록 흔적을 지우고자 노력했던 사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당대의 점창제일검.
“여 장로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을 홀로 뚜벅뚜벅 걸어온 남자다.
그 뜻을 짐작한 강호의 협사들이 그에게 별호를 헌상하였으니, 바로 점창의 외로운 검이라.
점창고검(點蒼孤劍) 여휘.
십좌에 이름을 올린 사내의 등장이었다.
‘어디서 이런 자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여휘는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아까의 폭발. 이자가 틀림없다!’
아직까지 살갗 표면에 우둘투둘하게 돋아난 소름이 가라앉지 않는다.
무더운 기후 속에서도 군복을 벗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느낀 순간이었다.
‘그 기운…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무엇이었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사십여 년간 습득한 무공 지식을 샅샅이 훑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생각에 잠긴 여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대기를 떠도는 외기를 받아들이고, 불순물을 걸러내어, 체내에 쌓는 것.
흡기(吸氣), 정제(精製), 축적(蓄積).
내공을 쌓는 축기의 과정이다.
중원에서 일컫는 내공심법의 요체이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심법에 따른 고유의 특징이 채색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향이며, 색깔인 동시에, 느낌이다.
‘폭발을 일으켰던 그 기운…….’
농밀했다.
믿기지 않을 만큼.
순수했다.
자연의 그것에 한없이 가깝게.
또한, 파괴적이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전율에 온몸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전장을 가로지른 새하얀 빛기둥.
그건 평생토록 느껴보지 못한 이질적인 무엇이었다.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저자, 악 대협보다 강하다. 대원수보다도 더!’
협검 악경.
초원의 혼 오스트갈.
여휘가 직접 보았던 이들 중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이 시대의 최강자들이었다.
‘저 외양과 터무니없는 무력. 와족인가……?’
운남 전체, 아니, 천하를 뒤져도 이 시대에 저런 원시적인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자들은 드물다.
그리고 초월적인 무력.
떠오르는 건 와족밖에 없었다.
‘왜 이들과 또 부딪히게 된 거지?’
자문자답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소리 내어 물을 뿐.
“점창의 제자 여휘라 하오. 뜻이 있어 잠시… 아니, 오랜 기간 사문을 비웠지. 들뜬 마음을 안고 돌아왔는데 이런 상황이로군. 왜 전쟁이 벌어진 건지, 당신이 총독을 해하려 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당신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겠소?”
여휘가 질문을 던질 때, 너른 하늘 또한 그를 가늠하고 있었다.
‘맑다.’
어두운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밝고도 정대한 기운이 담백하게 전해져 온다.
도와 창을 든 두 명의 노인과 더불어, 오늘 마주친 이들 중 가장 청정한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전쟁에 대해 정말 모르고 있군.’
자연기는 그가 선한 사람이라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마주치지만 않았다면 당장 술이나 한잔하자고 제의하고 싶을 만큼.
하지만 적으로 만났고, 그렇다면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줄 이유 따윈 없었다.
전쟁을 마무리 지어야 할 상황에서 앞을 막아선 자.
게다가 엄청난 강자다.
평생토록 마주친 이들을 통틀어 첫 손가락에 꼽을 만큼.
당장 달려들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너른 하늘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는 이름을 밝히는 것뿐이었다.
“너른 하늘. 와족의 족장이다. 궁금한 부분이 있다면 직접 알아보라. 바로 수긍하게 될 테니. 그럼 이제 거기서 비키도록. 그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으니까.”
너른 하늘이 그랬듯 여휘 또한 눈앞에 있는 사내의 본성을 꿰뚫었다.
자연기라는 속일 수 없는 증거로 여휘를 파악한 너른 하늘과 달리, 발달된 오감과 기감, 그리고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지만.
‘이자는…….’
이유 없이 움직일 남자가 아니다.
사사로운 욕구에 흔들릴 자도 아니다.
거짓을 말할 자가 아니며, 섣부른 폭력을 행사할 사람도 아니었다.
야생의 맹수와 같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지만, 그 바탕은 더없이 정명하고 순후할 게 틀림없다.
필시 평소의 모습은 넉넉하고 온화하리라.
자연의 품 안에서 편안히 휴식을 취하는 맹수처럼.
누군가 건드려선 안 되는 걸 건드린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장문인!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요?’
여휘의 눈길이 저 멀리 땅바닥을 기고 있는 남자에게 닿았다.
왼팔이 산산조각 난 고통으로 인해 공지량은 아직까지도 여휘의 귀환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끄… 끄어어… 사, 살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살려 달라 울부짖는 저 모습.
천하 구파 수장으로서의 체통 따윈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었다.
그 비참한 광경에 애잔함이 일지만, 지금은 그를 돌볼 때가 아니었다.
여휘가 다시금 너른 하늘과 눈을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