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삼십 년 전의 와족을 기억하오. 그 모습에 변함이 없다면, 그리고 당신 같은 남자가 전쟁을 결심했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소. 허나 주위를 둘러보시오. 양측의 피해가 너무도 막심하지 않소이까. 점창에 과오가 있다면, 나 여휘의 이름을 걸고 바로 잡을 터이니 이쯤에서 손을 물리는 게 어떠….”
“닥쳐라! 누구 맘대로 그런 결정을 내리는 거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호르찰이 소리쳤다.
“장군? 그렇다면 네놈, 황실 소속의 군인이 아닌가! 원 황실이 임명한 총독이 야만인에게 모욕을 당했는데 그만둔다고? 네놈, 제정신인 게냐?!”
볼살을 푸들거리는 호르찰이 노기를 가라앉히기 힘든지 씩씩댔다.
원은 중원의 역사를 장식한 역대의 제국을 통틀어 군부의 힘이 가장 막강한 나라 중 하나다.
광활하지만 척박한 북방의 대지는 몽골족을 끊임없이 이동해야만 하는 유목민족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남의 것을 약탈해야만 생존이 가능한 전투민족으로 다듬었다.
모든 성인 남성이 말과 활, 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전사인 그들은 무력으로 세계를 제패했으며, 그 특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군부의 권한은 어느 기구보다도 막강했다.
그래서 뭐?
장군이 뭐가 어떻단 말이냐.
자신은 총독이다.
십호장, 백호장, 천호장을 넘어 만 단위의 병사를 부리는 게 장군이라지만, 일성을 다스리는 총독에는 비할 수 없다.
한데 자신을 핍박한 적을 보고도 응징하기는커녕 이쯤에서 그만하자고?
게다가 저 얼굴!
이놈은 한족이다.
비천한 출신성분으로 어떻게 장군이라는 직위까지 올라갔는지 모르지만, 고깝기 그지없었다.
아마도 무력이 제법, 아니 상당히 뛰어난 것이겠지.
저 야만족의 수괴를 저지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놈을 다그쳐 저 괴물을 막고, 점창의 무인들과 총독부의 관군을 휘몰아쳐 쓰러진 야만인들을 몰살시킨다.
이 위기만 넘기고 나면.
방금 전의 행동을 빌미로 이 주제 모르는 한족 놈을 좌천시키고야 말리라.
그 짧은 와중에도 호르찰의 두뇌는 약삭빠르게 구르고 있었다.
“뭔가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군.”
하지만 호르찰의 예상과 달리 여휘의 눈은 싸늘하기만 했다.
“뭐, 뭐라? 이런 시건방진 한족 새끼가 감히! 네놈이 장군이란 직위를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닥치시오. 호르찰 총독!”
또 다른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여휘를 따라오느라 헉헉댔던 사내가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혼혈? 잡종 교배로 태어난 더러운 피까지 나를 능멸하려 드느냐? 이 미친 것들이 도대체가…!”
지나치게 비대한 체구 때문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 호르찰은 끊임없이 막말을 내뱉었다.
“잡종……. 뭐, 맞는 말이지. 아버지는 몽골족. 어머니는 한족. 그 때문에 진급도 번번이 누락 됐으니까.”
씁쓸한 말투로, 사내는 시인했다.
하지만 크게 괘념치 않는 표정이었다.
출신성분으로 인해 평생을 차별에 시달려왔지만, 그런 건 더 이상 그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여휘를 만난 이후 세상을, 그리고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졌으니까.
사내가 분개한 이유는 자신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여휘를 함부로 대하는 호르찰 때문이었다.
처척!
여휘와 단둘이 있을 땐 조잘조잘 수다스럽던 그가 한순간 돌변했다.
절도 있게 붙인 뒤꿈치와 곧게 편 허리.
그러모은 주먹이 허벅지 옆에 붙고, 눈빛은 예기를 담고 빛난다.
군인 특유의 엄격함을 전신에 담은 그가 호르찰을 노려봤다.
“예를 갖추시오, 총독. 그분은 그냥 장군이 아니시니까. 초원을 떨쳐 울리는 두 개의 이름. 바투와 무칼리. 모르진 않겠지? 그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분이란 말이오. 당신 눈앞에 계신 분은 황실 삼대 무장 중 하나이자 시위군단(侍衛軍團)을 통솔하시는 여휘 대장군이시오.”
경악이 또 한 번 좌중을 휩쓸었다.
입을 떡 벌린 호르찰은 실신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만 단위가 아니다.
전장에 서면 경우에 따라 수십만에 이르는 병력을 통솔할 권한까지 지니는 게 대장군이라는 직책이다.
더군다나 시위군단.
황성인 대도를 수호하는 근위대가 바로 그들이다.
시위군단은 카안과 황족들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친위대 ‘케식’과 더불어 카안의 안위를 책임지는 최후의 방패나 다름없었다.
‘그 시위군단을 통솔한다면…!’
저 남자에 대한 카안의 신뢰가 얼마나 두터운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눈앞에 있는 한족 놈은 그야말로 군부의 정점에 이른 남자였다.
‘자, 잠깐. 황실 삼대 무장이라고?’
들었다. 들어봤다. 아니, 알고 있다.
압도적인 무력과 불굴의 용맹으로, 뛰어드는 전장을 모조리 평정하여 카안의 총애를 받는 세 명의 맹장들.
몇 안 되는 대장군 중에서도 발군의 공적을 세운 세 명을 추려 황실을 대표하는 삼대 무장에 임명했다고 했다.
극히 이례적으로, 아니, 전무후무하게도 한족 출신의 남자가 그 한 자리를 꿰차서 황실이 술렁였다는 것도 들었다.
‘그게 이자라고?’
맞다. 여휘!
마주칠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까맣게 잊었지만,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호르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총독 따위의 직책으론 비벼볼 수도 없는 태산 앞에서 지금 무슨 망발을 늘어놓은 건가.
당장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권력이 최고의 가치이자 힘이라 믿고, 그것이 전부인 호르찰이기에 더 큰 권력 앞에서 비굴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몸을 일으킨 그가 곧바로 납작하게 엎드렸다.
필사적으로 용서를 비는 그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사, 사죄를…! 제가, 제가 감히 대인을 몰라뵙고…!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라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명하신다면 쓸모없는 이 눈깔이라도 빼버릴 터이니 부디 용서를…!”
방금 전까지 핏대를 세우며 막말을 내뱉던 자가 두려움에 떨며 고개를 조아린다.
하지만 여휘의 표정은 통쾌하기는커녕 씁쓸하기만 했다.
무수히 보아온 광경이다.
자신이 한족이라고 무시했다가, 직위를 알게 되면 간이라도 빼줄 듯 납작하게 엎드린다.
권력에 빌붙고, 그 힘에 기생하며, 출신성분에 따라 고귀함과 비천함을 분류하는 자들.
약한 자에게는 끔찍하게 잔인해지고, 강한 자에게는 추잡할 정도로 비굴해지는 자들.
이런 놈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무공을 지닌 자신도 이런 취급을 받는데,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민초들은 얼마나 큰 수탈과 고통에 시달릴 것인가.
수년간 중원을 떠돌던 그가 황실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였다.
홀로 무력을 통해 민초들을 구제하는 것보다 체제 하에서 권력을 등에 업고 그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편이 훨씬 많은 숫자를 구할 수 있다.
수많은 동포들이 권력에 빌붙은 변절자라 손가락질했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으니까.
그럼에도 복잡한 감정이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건 여휘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대가 나에게 한 언행은 개의치 않는다.”
“하, 하오면 용서해 주신다는…!”
“자네가 용서를 구해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니지.”
호르찰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고, 여휘의 고개가 돌아갔다.
“오람. 그걸 내게 주게.”
“예, 장군.”
사내, 원의 정예기병대 천인장 오람이 품에 고이 간직했던 무언가를 꺼내 여휘에게 건넸다.
황금색 비단으로 장식된 두루마리가 풀리고, 낭랑한 음성이 창산에 내려앉는다.
“운남 총독 호르찰은 카안의 명을 받들라.”
“카, 카안의…!”
질겁한 호르찰이 오체투지하며 땅바닥을 뚫을 듯 머리를 처박았다.
“운남 총독 호르찰은 들어라. 그대는 황실의 대변자로서 짐의 백성을 편안케 하라는 중대한 임무를 망각하고, 십 수 년간 사익을 위해 민초들의 고혈을 쥐어짜 왔다. 짐이 모르는 바 아니나, 운남에서만은 각지에서 출몰하는 반역의 무리들이 준동치 않았기에 그간 눈감아 주었다. 허나 최근 몇 년간 그대의 욕심이 도를 넘었고, 심지어 장강 이남의 역적 무리들과 결탁하려 한다는 감찰단의 보고가 있었다. 이에 그대를 파면하고, 진상을 규명토록 할 터이니 그대는 모든 걸 내려놓고 황실에서 파견한 감찰관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지어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고개를 처박은 호르찰은 그대로 끊어질 것만 같은 정신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왜? 어디서… 어디서 잘못된 것이냐? 그토록 조심했는데 왜…!’
십 수 년간 눈감아 주었다?
개소리!
저건 그냥 하는 말이다.
알고 있었다면, 그 오랜 세월 동안 가만히 놔뒀을 리 없겠지.
각 성의 총독들을 감시하기 위해 은밀히 파견되는 감찰관.
하지만 운남을 담당하는 놈들의 면면은 익히 알고 있다.
정해진 시기가 지나 새로운 놈들로 교체될 때마다 가장 공들여 매수하는 게 그놈들이니까.
대부분의 관리들이 그렇듯 썩을 대로 썩었기 때문에 정체를 파악하는 게 어렵지, 알기만 하면 그다음은 일사천리다.
심지어 이번 놈들은 몇 년 전에 부임해오자마자 자신이 감찰관임을 넌지시 내비치기까지 했다.
‘뭐냐, 대체 어디서?’
새어 나갈 곳이 없다.
이 일을 아는 건 자신과 그들에게 줄 막대한 뇌물을 제공한…….
‘서, 설마 저 새끼가?!’
호르찰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킥킥킥. 피둥피둥 살찐, 탐욕스런 돼지 새끼.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았느냐?’
산산이 바스러진 왼팔을 부여잡고 땅바닥을 구르던 자.
공지량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고통에 울부짖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니 누군가 황명을 낭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자신이 바라마지않던, 호르찰의 실각이었다.
‘그러게 적당히 욕심을 냈어야지.’
호르찰이 찾아오기 두어 달 전.
전쟁으로 인한 소란을 묵인해 달라는 청을 위해 직접 뇌물을 들고 찾아간 다음 날이다.
지금은 저 멀리 청해성(靑海省)에 부임해있는 운남의 전 감찰단을 응목대주가 방문했다.
호르찰은 그들과의 연이 끊겼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이 작업을 위해 계속해서 끈을 놓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자신의 손에 떨어질 뇌물과 향응에만 관심이 있지 의리 따윈 없는 놈들이었다.
수년에 걸친 접대로 그렇게 만들었다.
‘호르찰 총독의 비위 행위를 황실에 보고해주십시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며 거절했지만, 그들은 지석인이 꺼내놓은 금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고 했다.
그야말로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론 모자랐다.
‘걱정 마십시오. 우리의 일들은 새어나가지 않을 겁니다. 비교도 안 될 건수가 있으니까요.’
놓칠 것 같으냐.
호르찰이 장강 이남의 불온세력들과 접촉하려는 시도는 촉각을 곤두세운 응목대에게 걸려들었다.
그리고 그건 감찰대가 돈 몇 푼 받고, 향응, 접대에 취해 거짓 보고를 올린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한 대사건이었다.
그걸 보고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탄탄한 지위가 보장된다.
그리고 자신이 지석인에게 딸려 보낸 뇌물.
“일이 성사되는 날, 이것의 두 배를 더 드리겠습니다.”
운남의 전 감찰단은 제의를 단박에 수락했다.
‘감히 날 쥐고 흔들려 해? 더러운 몽골 오랑캐 놈이…!’
한데… 무언가 이상하다.
자신이 이렇게 빨리 일을 벌여 달라 했던가?
‘아니, 아니지. 저들이 지금 와서는 안 되는데?!’
호르찰의 등장 덕분에 족장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카안의 특사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통증에 적응하고, 살았다는 안도를 느낄 만큼 의식이 제자리를 찾았을 때, 호르찰은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그 통쾌한 광경에 마음껏 웃어 젖혔건만.
통증 때문인가?
왜 진작 떠올리지 못한 거지?
공지량의 고개가 전장 뒤편으로 홱 돌아갔다.
‘이런 빌어먹을!’
연노와 상노.
철제 방패와 수백 자루의 창, 그리고 철질려.
박살난 전쟁 물자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안 돼!’
중원 본토에선 개인 병장기를 패용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한데 이런 대규모의 군용 병기들을 현장에서 걸리다니!
그것도 카안의 특사에게!
‘이… 이 망할 자식들이 왜 벌써 보고를 한 거지? 전쟁이 마무리되는 서너 달 후에 장계를 올려 달라 신신당부했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