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공지량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는 인간의 이기심과 안위에 대한 집착을 가볍게 봤다.
일성의 총독이 반역의 조짐을 보이는 사안이다.
알고도 시간을 끌었다는 티끌만큼의 의심이라도 받는다면.
이런 중대한 사안을 당장 보고하지 않은 게 알려진다면.
구족이 참살당하고도 남는다.
이미 공지량에게 정보와 뇌물은 건네받았다.
보고하는 즉시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다.
약속대로 두세 달이나 기다릴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두 배를 더 준다고?
아깝긴 하지만, 이걸로도 충분하다.
감찰단의 입장에선 빼먹을 건 다 빼먹었으니 더 이상 한족 따위와 의리를 지킬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배신에 배신.
공지량과 호르찰이 웃는 낯 뒤로 서로에게 비수를 겨누며 암투를 벌였지만, 최종 승자는 운남을 떠나버린 감찰단이었다.
‘안 돼…….’
하늘이 노래진다.
이 보고가 황실에 들어가면 빼도 박도 못 하고 파멸이다.
호르찰이 전쟁을 묵인해주고, 금용 병기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때까지는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게 본래의 계획이었다.
그 후 일거에 호르찰을 쳐냈어야 하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 생각해라.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은 있어. 그래, 저 두 명! 저 두 명만 구워삶으면!’
공지량이 그제야 호르찰의 압송을 지시하는 사내를 바라봤다.
그리고 알게 됐다.
카안의 명을 받고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를.
평생토록 자신을 열등감에 시달리게 한 사내가 거기에 있었다.
‘여휘?!’
저 망할 자식이 왜 여기 있단 말인가!
팔이 박살난 고통 때문에 좌중의 소란을 알아채지 못했던 공지량이다.
뒤늦게 여휘를 발견한 그는 왼팔의 통증도 잊은 채 얼빠진 얼굴로 넋을 놓았다.
‘저, 저놈이 카안의 특사?’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구친다.
하지만 침착해야 한다.
다르게 보면, 이건 기회였다.
‘저놈 성격에 사문을 못 본 체할 리 없다. 호르찰의 징계를 겸해 겸사겸사 사문에 들린 걸 거야. 맞아, 여규! 놈의 아들도 여기에 있지 않은가! 그놈을 제거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좋다. 아주 좋다.
오히려 잘 되었다.
눈엣가시 같던 호르찰이 실각하게 됐고, 여휘의 무력이라면 족장을 막아설 수 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족장이지만, 그 기괴한 주술이 끝나는 순간 무너져 내릴 거다.
점창의 제자들은 아직 움직일 수 있고, 야만족 놈들은 전부 엎어져 있다.
게다가 황명을 동원해 움직일 수 있는 총독부의 관군이 무려 일천!
‘흐흐흐… 흐흐흐흐!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이런 걸 두고 전화위복이라 하던가.
맹렬히 회전한 두뇌는 모든 계산을 끝냈다.
여휘만 움직이면 된다.
여휘가 결정을 내리는 순간, 호르찰은 물론이고 와족까지 한꺼번에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놈을 움직이는 건 어렵지 않다.
어릴 적부터 눈물과 인정에 약한 놈이니까.
사문을 제 몸처럼 끔찍하게 생각하는 놈이니까.
여휘의 관심이 전략 병기에 쏠리기 전에.
주변의 제자들에게 전쟁의 배경을 캐묻기 전에.
그 전에 놈을 움직여야 한다!
공지량이 조금 전까지의 비통한 심정을 되새기며 구슬프게 외쳤다.
“오오오! 여 장로! 언제 귀환한 것이오? 천만다행이오! 그대가, 그대가 와 주었구려!”
“음… 장문인…….”
저 애잔한 눈을 봐라.
뭉개진 얼굴과 완전히 박살난 왼팔.
특히 왼팔은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산산조각 났다.
여휘는 자신의 처참한 모습에 측은지심을 느끼는 게 틀림없었다.
공지량은 내심 끝났다는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겉으론 눈물을 줄줄 흘리며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여 장로! 나는, 나는 억울하오! 이 잔인무도하고 경우 없는 야만인 놈들을 보시오! 정당하게 매입한 토지를 두고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본산으로 쳐들어왔소! 이놈들에게 주요 검대는 물론이고, 아직 여물지도 않은 이, 삼대 제자들까지 학살을 당했소이다!”
“저놈이 끝까지…!”
호르찰이 끌려가는 걸 보며 잠시 침묵했던 너른 하늘이다.
그가 홱 돌며 공지량을 노려봤다.
번뜩이는 호안에는 공지량을 당장 찢어 죽이겠다는 살의와 무지막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 날 것 그대로의 살기에 움찔했던 공지량이 빠르게 말을 뱉었다.
“저, 저것 보시오! 저 흉악한 야만인 놈을! 여 장로, 억울하게 쓰러져간 제자들의 원수를 갚아야 하오! 그대와 남은 병력이라면 충분히…!”
“그쯤 하시오, 장문인. 추하구려.”
북쪽의 숲.
단호한 음성이 공지량의 절규를 끊었다.
“장문인…… 아니, 공지량. 일파의 수장이라는 자가 너무 구질구질하지 않나? 적당히 해라, 이 비열한 새끼야.”
피 웅덩이에 담갔다 뺀 듯 시뻘겋게 젖은 옷.
바람에 펄럭이는 왼쪽 소매.
그리고… 형형하게 빛나는 잿빛의 눈동자.
노인, 설지굉이 숲을 헤치고 나왔다.
“네가 시작한 게 아니더냐. 운남의 알토란 같은 토지들을 손에 넣고 싶어서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토착부족들을 속이고, 윽박지르고, 회유했지. 반발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베어 넘기면서.”
어느 누가 이 시점에 설지굉의 출현을 예견할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공지량의 악행을 떠벌리는 형태로써.
피로 목욕을 한 듯한 모습 때문에 그 등장은 더욱 극적이었다.
설지굉은 공지량의 입을 막은 건 물론이거니와, 전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데 성공했다.
“그뿐이더냐. 와족을 끌어내기 위해 야생 짐승들의 새끼를 납치해서 소수부족의 마을에 던져놨지. 그들의 옷가지를 훔쳐서 체취를 흩뿌리면서. 광분한 맹수들이 그들을 공격하자, 막으러 나선 와족을 습격하고 텅 빈 본거지를 급습하라 지시했지.”
“거, 거짓말이다! 저자가 임무에 실패하고서 머리가 돌아버린 거야! 저놈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설검대를 모조리 잃고 폐인이 된 줄만 알았거늘.
왜 저놈이 이 시점에 기어 나온단 말인가.
그것도 감춰야 할 일들을 폭로하면서!
필사적으로 설지굉의 말을 부인하는 공지량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정예화를 한다고 했던가? 문파에 어울리지 않는 자들을 솎아낸다고? 넌 이, 삼대 제자들이 와족의 상대가 되지 못할 걸 알았다. 하지만 와족에게 피해를 입히고, 그들의 전력을 탐색하기 위해 제자들을 사지에 내몰았지. 정황과… 설검대 절반도 그 희생양이었고. 이번 전쟁에서도 최전선에 선 아군에게 연노를 쏟아붓지 않았나.”
“그, 그건, 그것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불가피한…!”
“흐흐흐, 걸렸군. 덜렁대는 팔뚝이 꽤나 아픈가 봐? 그 영악한 머리가 오늘따라 잘 안 돌아가는구나. 너, 아까는 억울하다 하지 않았던가? 와족이 억지를 부리면서 본산을 침공한 거라며?”
맞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혼백을 빼놓을 듯한 통증과 급박하게 전개되는 상황, 예상치 못한 일들의 중첩.
공지량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 저놈이 왜? 왜 갑자기 이런 짓을…?!’
공지량의 눈에 비친 설지굉의 미소는 악귀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설지굉의 방에서 있었던 일을 공지량이 알 리 없다.
그는 공씨 부자의 방식대로 복수를 다짐했고, 지금 착실하게 이행 중이었다.
잘못 키운 아들 하나가 공지량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도 없지. 네놈이 지난 십 년간 저지른 악행 말이다. 그래, 난 대장로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해결사 노릇을 자처했지. 지위에 대한 욕심 때문에 더러운 짓거리에 동참한 나도 쓰레기지만, 너는 구제 불가능한 오물덩어리다. 너나 나나 이제 죗값을 치를 때가 됐지.”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여기 있는 제자들 대부분이 크던 작던 설지굉이 폭로한 일들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장문인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알고도 모르는 척, 또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 하에 그 흐름에 발을 담갔다.
정도(正道)에 대한 그 작은 외면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사태를 야기한 것이다.
숨 막히는 정적이 대기를 짓눌렀다.
“……저 말이… 사실이오, 장문인?”
여휘는 큰 충격에 휩싸인 얼굴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없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여휘는 설지굉의 증언이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난 수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믿을 수 없게도.
지금의 점창은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자랑스러운 사문이 아니었다.
“흐흐, 흐흐흐…….”
넋 나간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웃음에 담긴 게 자포자기에 가까운 감정이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발작적인 외침이 뒤를 따랐다.
“사실이냐고? 사실이냐고 물었나! 그래, 사실이라면 어쩔 테냐! 충격받은 척하지 마라, 여휘! 제 잘난 맛에 사는 네놈은 모른다! 사문을 떠나 오랑캐의 발이나 핥던 놈은 그런 얼굴을 할 자격도 없어! 네가, 네가 뭘 안단 말이냐! 그 모든 건 오직 점창을 위해…!”
“아니. 그건 점창을 위한 게 아니외다. 장문인.”
휑하니 비어버린 중앙 전장, 봉검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노인의 안색은 창백했다.
뒤틀린 기혈이 준 내상보다, 봉검대와 운검대가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한 것보다, 정도를 저버린 사문의 행동에 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 일에 가담했다는 걸 시인하듯 고개를 떨군 제자들의 모습이 노구에 남은 한 줌의 기력마저 앗아간 게 틀림없었다.
힘겹게 들어 올린 노인의 눈동자는 중요한 무언가가 뽑혀나간 것처럼 텅 비어있었다.
“점창을 위해서라는 말은… 비겁한 변명이자 자기 합리화요. 장문인의 행동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위한 것이오. 진정으로 사문을 생각했다면 그런 잘못된 방법을 택했을 리 없지. 그 선택으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과, 앞으로 점창이 짊어져야 할 업……. 그 무게를 어찌 감당할 생각이오? 장문인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거요.”
맥이 풀려버린, 독백에 가까운 어조였다.
공지량에게 하는 말이지만, 그것은 모든 점창의 제자들에게 건네는 질책이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파묻었다.
그러나 끝까지 뉘우침을 모르는 인간도 있었다.
“하! 고고한 척 점잔이나 빼는 늙은이! 당신이라고 다를 것 같은가? 천만에! 네놈도 마찬가지다! 너희들이 사문을 위해 대체 무얼 했단 말이냐! 지금의 점창은 내가 키운 것이야! 이 공지량이 만든 것이란 말이다! 내 것이다! 이건 내 것이야! 누구도 나를 비난할 자격 따윈 없다!”
폭주다.
벼랑 끝까지 몰린 독사가 본성을 드러냈다.
스스로를 범이라 여겨왔지만, 도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비열하고 이기적인 성정은 한 마리 독사를 떠올리게 했다.
아니, 그런 비유는 멀쩡히 자연을 누비는 뱀에 대한 모독일지도.
공유환이 연무장 한가운데서 울부짖었듯, 공지량 또한 전장의 한복판에서 내재된 광기를 가감 없이 토해냈다.
“그래. 끝까지 제가 옳다 이거로군.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그 생각 그대로 가지고 뒈져라.”
뻐어어억!
“커헉…!”
개 짖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헛소리를 왜 들어주고 있는가.
이런 놈은 그냥 맞아야 한다.
혹시 모르지.
피똥을 질질 쌀 때까지 처맞다가 뒈지면, ‘아, 내가 잘못했나 보다.’ 깨닫고 다음 생엔 인간으로 환생할지도.
이놈은 인간의 껍질을 쓰고 있을 뿐, 금수만도 못하다는 게 매서운 눈의 생각이었다.
빠아악!
한 방에 죽이지 않는다.
이런 놈한텐 자연기도 아깝다.
그래서 매서운 눈은 그냥 냅다 후려 찼다.
“카악!”
턱이 돌아가고, 광대뼈가 함몰된다.
정강이가 분질러지고, 바스러진 왼팔의 뼛조각이 근육을 찔렀다.
쇠방망이나 다름없는 혹독한 발길질이 공지량을 산 채로 망가뜨리고 있었다.
“자, 잠깐…!”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나섰던 여휘가 주춤했다.
저대로 놔두면 죽는다.
분명 죽어 마땅한 일을 저질렀지만, 동문이자 사형제다.
그리고 일파의 장문인이다.
저렇게 모두의 앞에서 개처럼 두들겨 맞다가 죽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하지만… 말릴 명분이 없다.
“목숨……. 목숨만 살려줄 순 없겠소?”
여휘에 비해 한층 차분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음성에선 더욱 깊은 침통함이 묻어났다.
푸른색의 창대를 지팡이 삼아 딛고 일어선 운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