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19화 (119/463)

119화

“하?”

살의를 거두지 않은 눈이 노인을 향했다.

매서운 눈이 고개를 모로 튼 채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냐는 표정이었다.

“말도 안 된다는 걸 모르지 않소이다. 장문인은… 죽어 마땅하지.”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런 소릴 하는 거요?”

다른 자였다면 당장 달려들어 부숴놨을 거다.

하지만 두 노인은 적이라도 함부로 대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자연기가 말한다.

눈앞에 있는 망종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인간이라고.

저토록 깨끗하고 밝은 느낌을 주는 자는 정말 흔치 않다.

매서운 눈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단박에 유추할 수 있었다.

게다가 너른 하늘과 맞서며 보여준, 드높은 기상과 강대한 무력.

뼛속까지 전사인 매서운 눈에게 봉검과 운검은 존중을 보낼 수밖에 없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달라질 건 없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공지량이란 놈이 저지른 짓은 도저히 용서 가능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막말을 내뱉지 않는 것만으로도 매서운 눈은 최대한의 인내를 발휘하고 있었다.

“누구나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가오. 때론 무언가에 과도하게 얽매여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지. 장문인의 행동에는 나 또한 분노를 금할 길이 없소. 그 때문에 해를 입은 무고한 이들을 생각하면 더욱. 허나… 그도 불완전한 사람이 아니겠소이까. 저지른 죄를 참회하며 살아갈 기회를 주기 바라오.”

“이 지경까지 와서 그게 할 소리…!”

풀썩.

소진된 기력과 심신에 가해진 충격.

일어서는 것도 벅차했던 운검이다.

엎어질 듯 쓰러진 그가 와족 전사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진심을 다한 노인의 사죄가 전장을 울렸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오. 장문인 직에서 해임될 것이고, 모든 권한은 박탈될 것이외다. 전신을 부숴놔도 좋소. 목숨만, 그저 목숨만 붙여주길 바라오.”

“그게 무슨 의미가….”

“의미가 있소. 속죄를 하려면 살아 있어야 하니까. 침상 위에서 꼼짝을 못 하는 몸이 되더라도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어떤 면에서 그건 편히 죽는 것보다 못한 일이 되겠지. 처분은 맡기겠소이다. 목숨만, 부디 목숨만 붙여주길 바라오.”

엄격한 말이다.

아군이기 때문에 살려달라는 말이 아니었다.

벌레처럼 꿈틀대는 것밖에 못 할지라도, 살아남아 자신이 저지른 죄를 평생토록 참회하라.

오늘부로 권좌의 자리에서 굴러 떨어져 모든 걸 잃을 공지량에게는 더욱 가혹한 말이었다.

“또 한 가지. 아직 어린 제자들에게 자신의 스승이자 장문인이었던 자가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소. 그 기억은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퍼억!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오른손을 들어 올린 운검이 진기를 응집하더니 자신의 단전을 내리쳤다.

“대, 대장로님!”

점창 제자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운검의 입에서 한 줄기 피가 흘렀다.

“크윽…! 염치없게 맨입으로… 자비를 구하지 않소이다. 원하신다면 무공만이 아니라 목숨까지 드리겠소. 점창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죄, 절절히 통감하는 바요. 아이들도 잘못을 저질렀으나 그들은 장문인의 지시를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오. 부디… 푸릇한 생명들이 주어진 삶을 살아갈 수 있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오.”

쿵!

노인의 이마가 대지에 닿았다.

진심을 담은 사죄가 전장에 번진다.

평생을 함께한 벗이자 동료.

봉검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퍼억!

“아, 아아…!”

“장로님…!”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잘못된 걸 알면서도 왜 거부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자신들 때문에 하늘 같은 사문의 어른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평생토록 쌓아 올린 무공을 전폐시켰다.

봉검의 무릎이 땅에 닿을 때, 살아남은 모든 점창의 제자도 무릎을 꿇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과거에 대한 후회이자 참회였다.

“어긋난 것들을… 바로잡을 것이오. 토지를 비롯하여 점창이 빼앗은 모든 것을 돌려주고,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사죄하겠소이다. 그들이 원래의 삶을 되찾을 때까지 할 수 있는 바를 다하겠소. 그리고… 모든 대외 활동을 중단하겠소. 와족이 허락할 때까지 점창은 무기한 봉문(封門)에 들어갈 것이오.”

더 이상 공지량은 문파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

그렇다면 차기 장문인이 정해질 때까지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할 권한은 두 명의 대장로에게 있었다.

봉검과 운검은 곧바로 무기한 봉문을 선언했다.

와족이 허락지 않는다면 점창은 앞으로 문파의 이름을 건 어떤 활동도 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

이들이 벌인 일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건 변함이 없다.

하지만 진심으로 사죄하고 자비를 구하는데 계속해서 몰아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침묵을 지키던 너른 하늘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매서운 눈은 공지량을 내려다봤다.

“쓰레기 같은 놈이 인복은 있구나. 네놈에겐 아까운 사람들이야.”

그 와중에도 의식은 잃지 않았나 보다.

엎어져 있던 공지량이 벌레처럼 꿈틀댔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살려둘 수 없지.”

파르르 경련하는 육신.

곧 닥쳐올 죽음 앞에서, 공지량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만.”

하늘에서 시선을 거둔 너른 하늘의 말이었다.

봉검과 운검의 고개가 퍼뜩 올라왔다.

“죽이지는 마라. 매서운 눈.”

“……이놈을 살려둔다고요? 안 됩니다, 족장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놈만은…!”

절대 안 된다.

휘말린 자들은 몰라도 이놈만은 용서해선 안 된다.

너른 하늘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매서운 눈은 다리에 자연기를 응집했다.

“매서운 눈. 난… 피로 피를 씻는 연쇄의 고리가 끊기길 바란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겠지.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라. 내가 너희 모두가 보는 앞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다면, 너는 이들을 용서할 수 있겠느냐?

아니다.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 있는 수백의 인원을 몰살하지 않는 한 복수는 계속되겠지. 아니, 이들을 전부 죽인다 해도 이들과 관련 있는 누군가가 또다시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을 노릴 것이다. 그럼 우리의 아이들 또한 복수에 나서겠지. 난 그런 미래를 원치 않는다.”

공지량을 짓밟기 위해 들어 올린 매서운 눈의 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원한. 증오. 살의. 그리고 복수.

복수는 한순간이다.

반면 원한의 굴레는 영원하다.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당한 건 이쪽인데 왜 멈추어야 하는가.

‘차라리… 죄다 죽여 버리면…….’

혹여 살아남은 누군가가 있더라도 감히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잔인하게 몰살시킨다.

그러면, 원한의 고리를 강제로 끊을 수 있지 않을까?

“매서운 눈.”

어느새 다가온 너른 하늘이 갈등하는 전사의 어깨를 짚었다.

붉게 충혈된 눈이 너른 하늘을 돌아봤다.

“저항을 포기한 자들. 사죄하며 무릎 꿇은 이들을 죽일 수 있겠느냐?”

“……쉽진 않지만 못할 것도 없지요.”

“그럼 아직 어린아이들은? 아녀자들은? 갓 태어난 젖먹이들은?”

“…….”

“힘으로 원한을 끊으려면 그리해야 한다. 이들과 연관된 자들까지 찾아내 죽여야 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겠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까지 말이야. 그럴 수 있겠느냐?”

“…….”

“그래, 할 수도 있겠지. 그럼 비아나 산, 걸음이, 노을이…….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시킬 수 있겠느냐?”

그건… 어렵다.

내가 하는 건 몰라도 자라날 아이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건 어렵다.

아니, 그렇게 해선 안 된다.

“할아범은 나에게 참지 말라고 했다. 정작 본인은 삼십 년 전에 이들을 용서했으면서 말이야. 난… 이제야 그 모순을 이해할 수 있겠구나. 아마 그건 내 망설임을 덜어주기 위한 말이었을 뿐, 할아범의 본심이 아니었을 거다. 할아범도 과거에 다음 세대인 우리를 염두에 뒀던 거야. 피로 덮이는 길이 아닌, 다툼 없는 미래를 물려주기 위해서.”

‘그렇지 않습니까, 할아범?’

성난 그믐.

그의 젊었을 적 모습을 기억한다.

때론 자신조차 오싹함을 느꼈을 만큼 그 살의와 투기는 대단했다.

적들에게 무자비하기로 유명한 그가 전쟁에서 이기고도 적들을 몰살하지 않고 돌아왔을 때.

부족원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한참을 수군댔었다.

“……매서운 눈.”

“후우… 훅…!”

발에 힘을 풀었다 뺐다 하는 모습에서 그의 갈등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빌어먹을.’

이 발을 내려찍는 순간, 두 집단의 미래는 바뀐다.

머리로는 너른 하늘의 말을 이해하지만, 감정을 가라앉히는 게 어렵다.

언제나 그렇듯, 용서는 끔찍할 만큼 어려웠다.

“젠장!”

쾅!

들어 올린 발이 공지량의 머리 옆을 찍었다.

놀라서 움찔거리는 놈을 두고, 매서운 눈은 뒤돌았다.

그리고 너른 하늘은 공지량을 내려다봤다.

“공지량이라 했지? 난 안다. 넌 다른 이들과 달리 살려줘도 고마워할 놈이 아니야.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언제까지고 원한을 간직한 채 일을 꾸미겠지.”

“아, 아니오! 절대 그렇지 않소이다! 살려만 준다면 다시는…!”

“그래. 죽이진 않으마. 네놈도 인간이라면 너를 위해 무릎 꿇은 저들을 기억해라. 널 위해 희생한 노인들에게 감사해라. 그리고 너로 인해 피해 입은 이들에게 평생을 사죄하며 살아가라.”

살려줄 것 같은 분위기다.

눈물콧물을 쏟아내며 애걸하던 공지량의 얼굴이 환해졌다.

“허나, 네가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겠지.”

“대, 대가라면…!”

그냥 놔주는 게 아니었나!

너른 하늘이 엎어진 공지량을 뒤집었다.

“단전이라고 했던가. 배꼽 밑에 자리한 기운의 응집체. 너희가 힘을 축적하는 곳이 여기랬지.”

“자, 잠깐…!”

꽈아앙!

뭐라 말할 틈도 없었다.

무쇠 같은 주먹이 내리꽂히고, 공지량이 새우처럼 등을 굽히며 부들부들 떨었다.

“커, 커어어…!”

끔찍한 통증이 밀려온다.

단전이 깨지는 감각은 육체가 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아니, 고통이 문제가 아니다.

육신에 충만했던 기운이 산산이 흩어지는 상실감.

혼백이 빠져나간다면 이런 느낌일까.

공지량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어… 커어…! 으어어…….”

그때 너른 하늘이 손을 칼날처럼 세워서 공지량의 발목을 향해 휘둘렀다.

“끄아악!”

발목의 뒤가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양다리의 근맥이 으깨지며 잘려나갔다.

공지량은 상실의 공포에 질려서 눈의 초점을 잃은 채 바닥을 기었다.

너른 하늘이 꿈틀대는 공지량에게 싸늘히 말했다.

“넌 속죄 같은 걸 할 놈이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힘을 잃었으니 이제 허튼짓은 못 하겠지. 식구들 덕분에 부지한 목숨, 감사히 여기며 살아가라.”

감사? 말은 그리했지만 이놈은 절대 고마워할 놈이 아니다.

그런 걸 알만한 인간이라면 애초에 이런 짓을 벌이지도 않았겠지.

안다. 하지만 살려준다.

용서해서가 아니다.

아직까지도 가슴을 채운 분노는 식지 않았다.

그럼에도 살려주는 건 아이들을 위해서다.

미래를 위해서다.

끝없이 되풀이될 증오와 원한의 고리는 어느 한쪽이 먼저 끊어야 한다.

더구나 저들은 진심으로 사죄했고, 존장들이 스스로 희생하는 모습을 보였지 않은가.

‘그래도…… 쉽지 않군요. 할아범.’

식지 않은 전투의 열기와 켜켜이 쌓인 분노, 증오, 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심장이 격하게 뛴다.

그 모든 것을 내리누르며, 너른 하늘은 돌아섰다.

“지금 보여준 그 마음을 잃지 않길 바라오. 선대가 그랬듯, 한 번 더 당신들을 믿어보겠소.”

미래를 선택한 전사의 결정에, 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불신의 기색이 완연한 자들도 있었다.

아직까지 와족을 그저 피에 굶주린 야만인들이라 오해하고 있는 자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을 같은 땅에서 살아왔음에도 그들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너무나 없었다.

“우린 피의 굴레를 여기서 멈추고자 하오. 증오와 원한의 고리를 끊고 싶소.”

어느덧 머리 꼭대기에 오른 해가 찬연히 세상을 비춘다.

인간의 피로 얼룩진 대지와 달리 하늘은 시리도록 맑고 싱그러웠다.

“전쟁은…… 끝났소.”

위대한 전사의 음성이 지친 인간들의 가슴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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