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완패로구나.’
너른 하늘의 선언을 들은 봉검은 속으로 탄식했다.
무력에서도.
배포에서도.
그토록 강조해마지않았던 성품에서조차.
‘모든 면에서 졌어.’
두말할 여지없는 점창의 패배였다.
잃어버린 무공?
하나도 아깝지 않다.
제자들의 목숨과 사문의 미래를 얻을 수 있다면, 그깟 무공 따위 백 번이든 천 번이든 내던질 수 있다.
오늘을 기점으로 점창은 달라질 거다.
진정한 명문 정파의 저력은 금력이나 무력 따위에서 비롯된다는 게 아님을 깨달았을 테니까.
처음 검을 든 시절에 품었던 그 푸르른 마음을 떠올렸을 테니까.
멀리 돌아갈지라도 우직하게 바른 길을 걷는 고집.
올바른 가치와 인간다움을 간직하는 것이 정파인이 추구해야 할 바임을 제자들은 되새겼을 것이다.
“고맙소.”
여휘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였다.
군문에 몸담은 후, 카안을 제외하고 이토록 극진한 예를 표한 일이 있었던가.
대원수를 알현할 때도 등을 굽히는 정도가 전부였다.
대장군은 제국을 대표하는 군부의 정점이며, 아무에게나 허리를 숙여선 아니 됨이 당연할진대.
하지만 이 순간, 여휘는 온 마음을 담아 너른 하늘에게 예를 표했다.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길 바라겠소.”
너른 하늘은 예의 형식을 빌려 표출된 그 마음을 온전히 받았다.
“뜻한 바가 있어 오랜 기간 사문을 돌보지 못했소이다. 허나 사문은 언젠가 돌아올 나의 집이자 고향이라오. 식구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마땅히 그 무게를 함께 짊어져야 하는 법. 다신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리오.”
“믿겠소. 그 약속.”
너른 하늘과 여휘.
상대의 능력과 됨됨이를 알아본 거목들이다.
발 디딘 터전이 다를 뿐, 둘은 삶을 영위하는 방식에서 유사한 점이 많았다.
오늘 처음 만났지만, 서로에게 감탄하고 친밀감을 느끼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두 남자의 시선이 뜨겁게 교차했다.
여휘가 말했다.
“나중에…… 한 수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마다하지 않겠소. 전후 처리가 끝나고 몸이 회복되는 대로 날을 잡읍시다.”
원만하게 흐르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전투 화장의 여파로 쓰러졌던 와족의 전사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완전한 탈진으로 의식을 잃은 자들을 제외하면, 상당수의 전사들은 너른 하늘의 종전 선언을 들었다.
점창이 그렇듯 와족 또한 여전히 적개심과 앙금을 간직한 이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원한의 고리를 끊어내기로 한 너른 하늘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불안 요소는 남아 있다.
특히 저 앞에서 꿈틀대는 공지량이라는 놈.
저자는 결코 원한을 잊을 자가 아니다.
저놈만큼은 확실히 목을 쳐야 한다는 부족장의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족장의 결정이 떨어졌고, 용서하기로 했다면 여기서 끝내는 게 맞다.
그나마 안심이 되는 건 저자가 힘을 잃었고, 모든 권력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점창은 더 이상 그의 입맛대로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에 두 노인이 보여준 희생과 뉘우치는 모습을 보인 점창의 제자들.
이번에는 다수의 선의가 비틀린 악의를 제어할 거라는 기대를 품으며, 전사들이 부상자들을 수습했다.
챙-! 채챙! 빠바박! 콰캉!
“음?”
“뭐여? 아직도 싸우는 곳이 있어?”
그것은 겨우 찾아든 평온을 비집는 불협화음과 같았다.
급박하게 전개된 중앙 전장의 상황 때문에 신경 쓰지 못했던 후방.
육신과 검날이 부딪히며 내는 충돌음이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비아?”
너른 하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다행이야. 무사했구나! 한데 어떻게 여길…….’
전투와 전후 처리에 정신이 팔려 후방 전장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훌쩍 커버린 아들이 있었다.
“하앗!”
두터운 어깨가 전진하고, 곧게 뻗은 다리가 지면을 휩쓴다.
말아 쥔 주먹이 전면을 덮치고, 휘돌아 차는 각법에 공간이 터져 나갔다.
‘저 녀석, 언제 저렇게?!’
놀랍다.
빈틈을 찾기 어려울 만큼 꽉 짜인 투로는 이미 웬만한 성인 전사 이상이었다.
펼치는 모든 수에 적절하게 녹아 있는 회전의 묘.
저 정도의 회전을 항상 구현할 수 있다면, 살상력이 극대화되는 건 물론이고 어지간한 공격은 범접조차 할 수 없다.
실제로 상대가 쏟아내는 검날은 아들의 육신을 침범치 못했다.
‘사선을 넘어왔구나.’
마른 비의 움직임을 보는 순간, 너른 하늘은 아들이 거쳐 온 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유립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자는 또 있었다.
어렸을 때의 얼굴이 남아서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공유립의 전투를 지켜보는 여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녀석, 무에 재능이 있었던가?’
분광검.
이대 제자 이상이라면 누구나 사사받는 검술이지만, 그 경지가 놀랍다.
속도를 지배하고, 변화를 제어한다.
검이 흘러야 할 궤적을 읽고, 능숙하게 펼쳐낸다.
내력만 뒷받침된다면 당장 상승의 경지에 진입할 재능이 거기에 있었다.
“하아압!”
기합성.
항상 억눌려왔고,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속 시원히 토해낸 적 없는 육신의 함성이다.
난생처음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오롯이 집중한 공유립이 힘차게 외쳤다.
“분광참영!”
즐겁다.
한 번만 실수해도 뼈가 분쇄될 강격이 날아들지만, 그걸 피해내는 순간이 짜릿하다.
마른 비의 실낱같은 빈틈을 파고드는 그의 검이 춤췄다.
“까불지 마!”
싸움에 몰입한 청년은 희열을 느끼고 있었지만, 소년은 정반대였다.
이토록 화가 난 적이 있었던가.
세상은 즐겁고 유쾌한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좋은 사람들과 새로운 경험.
매 순간이 행복하고 즐거웠다.
서로의 입장 차로 인해 설검대에게 쫓길 때도 화가 나진 않았다.
아, 여규를 핍박한 사형이란 자들을 봤을 때는 이런 감정을 느꼈었지.
그러나 지금만큼은 아니다.
비겁한 수법으로 산이 형과 여울이 누나의 목숨을 노린 이놈을 용서할 수 없다.
마른 비가 지닌 품성의 특질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퀘에엑―!
검날이 스친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검속이 가슴팍을 찢었다.
흘렸다!
그럼 이젠 반격의 시간이다.
우전방으로 내디딘 발이 간격을 지웠다.
허리춤으로 끌어당긴 오른손이 최속의 일격을 장전한다.
번쩍이는 올빼미의 부리가 한층 강렬해진 회전을 담고 햇살을 갈랐다.
쩌저저정!
“큭…!”
어느새 검을 회수한 공유립이 강습의 진로를 막고, 반격을 준비했다.
‘막을 줄 알았어.’
반격? 웃기는 소리!
놔둘 것 같으냐.
‘넌 이제 손 한 번 뻗지 못하고 쓰러질 거야.’
그 순간, 마른 비에겐 전투의 결과가 보였다.
“차핫!”
다섯 줄기 섬전이 수직으로 솟구친다.
마침내 내뻗어진 중선오격에 공유립의 눈빛이 흔들렸다.
“타아앗!”
휙휙- 휘휘휭- 휘휘휘휭―!
검 그림자가 허공에 물샐 틈 없는 방벽을 그린다.
어디를 노리는지 모르니 모든 힘을 방어에 쏟을 뿐.
광인의 춤사위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엄격한 검로를 따르는 상승의 수비식일지니.
“거, 검막!”
누군가가 내지른 외마디 비명을 뚫고, 소년의 다리가 방벽을 두드렸다.
쩡! 쩌저저정!
출렁이지만, 부서지지 않는다.
내력의 우위는 공유립에게 있었다.
휘릭-
뚫리지 않아?
그럼 뚫릴 때까지 두드린다.
허공에서 사뿐히 휘돌린 몸.
마른 비의 다리가 우박처럼 내리꽂혔다.
쾅! 콰카카캉! 콰쾅!
“흐읍! 윽! 크윽!”
중선오격에 이은 소낙비가 검막을 덮치고, 검이 그려낸 구체의 천장이 일그러진다.
그럼에도 굳건한 방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버텨? 이것도 막아봐라!’
폭풍처럼 쏟아지는 기예다.
그간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소년은 아낌없이 토했다.
마른 비의 오른 다리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럴 수가! 불벼락?!”
이번 외침은 안개걸음의 것이었다.
‘말도 안 돼! 저건 나도 아직…!’
어쩌랴. 현실이 그러한 것을.
푸른 기운이 응집된 뒤꿈치가 대기를 가르며 내리꽂혔다.
쩌저정― 챙강!
“커헉!”
검막이 깨지고, 검이 부러진다.
불벼락의 폭발력을 가까스로 상쇄한 공유립이 거세게 나뒹굴었다.
벌떡 몸을 일으켜보지만, 강렬한 통증이 전신을 휘감는다.
시야가 흔들리는 걸 느끼며, 공유립은 다리를 꺾었다.
‘어깨…! 골절인가…….’
오른팔이 올라가지 않는다.
기력이 소진된 육신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
공유립이 숙였던 고개를 가까스로 들어 올렸다.
“……졌소.”
그 두 글자를 내뱉는 걸 왜들 그리 어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젠 안다.
가슴이 저릴 정도로, 패배는 아팠다.
하지만 공유립은 당당히 가슴을 폈다.
‘불벼락을 막았어…? 게다가 반격까지!’
마른 비가 뺨에서 흐르는 피를 훔쳤다.
예상이 틀렸다.
손 쓸 틈도 없이 꺾으리라 자신했건만.
비열한 짓거리를 하는 주제에 무척이나 강한 놈이었다.
‘이런 힘을 갖고 있으면서 왜…!’
그래서 더 화가 난다.
마무리를 짓기 위해 소년이 발을 옮기는 순간.
“거기까지.”
방해하는 게 누구냐.
지금은 누구도 날 막을 수 없…!
“아버지?”
눈이 동그래진 아들이 아비를 바라본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왜 그렇게 성이 난 거냐?”
너른 하늘조차도 처음 보는 아들의 모습이다.
이유를 물을 수밖에.
“지금은… 안 돼요. 아버지라도 날 막을 수 없어. 저놈이 비열하게 산이 형과 여울이 누나를…!”
아버지라도 막을 수 없단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건가.
“허… 패기 보소?”
안개걸음이 입을 헤 벌렸다.
“끄응…….”
마른 비의 싸움을 보며 안개걸음 못지않게 충격을 받은 산이다.
하지만 지금은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비열’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상황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저 순한 녀석이 왜 저렇게 길길이 날뛴 건지.
“오해다, 비아야! 너, 암습 때문에 이러는 거지? 그건 저자의 지시가 아닐 거다. 저자는 공격을 망설였고, 충분히 예의를 지켰어. 그것 때문이라면 그만해도 된다!”
“……어?”
공유립을 향해 비장하게 다가서던 마른 비가 멍청히 멈춰 섰다.
마른 비와 공유립.
양측 모두에게 색다른 충격을 안긴 전투를 끝으로, 싸움은 완전히 멈췄다.
전쟁 이전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둘이기에 와족과 점창의 인원들이 느끼는 놀라움은 더없이 컸다.
그 인상은 강하게 남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겨우 살아남은 자들이 안도의 숨을 내쉴 즈음.
사방에 널린 시체들이 생존자들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먹먹한 슬픔이 창산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칼로 자른 듯 나뉜 양측 진영, 와족 전사들의 틈바구니에서 여인의 지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리로 눕혀라.”
잎의 노래의 목소리엔 생기가 없었다.
한계를 넘은 술력의 남발은 그녀의 생명을 갉아먹었고, 얼굴에는 감춰져 있던 세월이 모습을 드러냈다.
급격하게 진행된 노화는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증거지만, 여인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그믐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할 뿐이다.
떨리는 손으로 뺨을 쓰다듬어 보지만, 그믐은 눈을 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