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21화 (121/463)

121화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항상 이 모양이구려. 눈을 뜨시오, 제발……. 나보다 늦게 간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남겨진 이의 슬픔을 떠넘기지 않겠다면서요. 그 후에 따라오겠다고 했으면서 왜…!”

주름진 눈가를 타고 이슬이 흐른다.

바닥난 술력을 치유에 집중해 보지만, 그믐의 상세는 너무도 심각했다.

와족 전사들을 떠받쳐온 버팀목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여울이……. 여울이를 이리로 데려오너라.”

슬픔에 잠겨 있던 그녀의 눈이 어떤 결심을 담았다.

산이 의식을 잃은 여울을 그믐의 옆에 조심스레 눕혔다.

“어머니 대지시여. 제 뒤를 잇도록 당신이 점지한 아이입니다. 부디 그녀의 아픔을 보듬어주소서.”

영롱한 연녹색 기운이 여울의 상처 위로 내려앉는다.

관통당한 복부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끊어질 듯 쌕쌕거리던 호흡이 차츰 안정됐다.

신? 절대자? 초월적 존재?

그것은 정녕 실존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의 대상일 뿐인가.

누구도 모를 일이다.

잎의 노래가 선보이는 기적을 목도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어딘가에 있는 초월적 존재에게서 비롯된 힘인지는 누구도 알 길이 없다.

나약한 인간은 그저 바라고, 구하며, 기도할 뿐이다.

누군가가 보기엔 의미 없는 낙서에 지나지 않는 벽화와 죽은 자들의 뼛조각을 모아놨을 뿐인 동굴.

영묘지기의 사명을 다하며 평생을 희생해온 여인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음성을 발했다.

“어머니 대지시여. 당신의 부름을 받은 이래로 반백 년간, 단 한 번도 개인적인 소망을 청한 적이 없나이다. 당신의 엄존을 믿고, 이 목소리가 당신께 들리리라 확신합니다. 부디 이 늙은이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소서. 저는 지금 정해진 시간을 앞당겨 당신께 귀의하나니, 제 남은 생명을 받으시고 제게 하나뿐인 사람을 구하소서.”

“하, 할멈!”

어지간해서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너른 하늘이다.

그가 깜짝 놀라 소리칠 만큼 그녀의 결정은 위험하고, 불투명했다.

휘아아아―

‘늦었어!’

이미 주술이 발동됐다.

의지를 담은 바람은 언령의 또 다른 형태이며, 그것은 주술적 간구(懇求)로 발동되는 시동어나 다름없다.

내뱉은 이상, 회수하지 못한다.

그녀의 바람이 전해질지, 그리고 초월적인 무언가가 그것을 허락할지는 미지수이며, 최악의 경우 생명을 바친 그녀의 목숨만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너른 하늘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버지 하늘이시여. 난 솔직히 당신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오. 당신이 정말로 넉넉하고 따스한 존재라면, 힘겨워하는 인간들을 이토록 방치하진 않겠지. 모르겠소. 난 정말 모르겠소이다. 다만, 정녕 당신이 존재한다면 저 정도 청은 들어줄 수 있지 않겠소. 생명을 태우는 저 간절한 바람을 들으시오. 외면한다면, 내 가만두지 않을 거요.’

전사다운 투박한 기도다.

협박의 형태로 들리지만 그것은 기도가 분명했다.

평생토록 자신의 육신과 힘에 의지하며 살아온 너른 하늘이 처음으로 다른 존재에게 염원을 전한 순간이기도 했다.

부오오오―

나이 지긋한 와족 전사들조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강렬한 빛이 그믐의 전신을 감쌌다.

그 경이로운 광경에 멀리 떨어진 점창의 무인들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눈을 깜빡일 힘도 남지 않은 잎의 노래가 어렵게, 어렵게 입술을 뗐다.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했다. 부디 내 청이 어머니 대지께 닿았기를……. 족장, 이 사람이 깨어나면 전해주세요. 슬퍼하지 말라고……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고. 한평생… 고마웠다고…….”

여인의 눈이 스르륵 감기고, 그녀가 손에서 한시도 놓지 않았던 죽장이 굴러 떨어졌다.

“할멈!”

생명을 담았기 때문에?

아니면 잎의 노래의 간절한 청이 닿아서?

그도 아니라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전사의 협박에 겁이라도 집어먹은 걸까?

오열하는 전사들 틈.

피에 잠겨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 같던 노인의 눈이 빛을 담았다.

해후

『“봤다 뿐이겠는가. 그 발톱을 이 검으로 직접 받아냈지.”

나이가 지긋한 사내다.

중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든 남자는 꼿꼿이 세운 허리만큼이나 빈틈없는 기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과거, 점창을 떠올리면 항상 거론되는 이름들에 남자는 끼어 있지 못했다.

점창을 대표하는 검대의 대주임에도.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고검(孤劍)의 뒤를 이어 고검(高劍)이 두각을 나타내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갑자기 튀어나온 전대 장문인의 서자가 이름을 휘날릴 때까지, 남자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하지만 점창의 실정에 밝은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이 과묵하고 우직한 무인이야말로 점창의 허리를 지탱해온 진짜배기라고.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구석진 땅, 운남의 경계를 넘자마자 파죽지세로 적들을 섬멸하고 있는 점창파.

그 점창의 주요인물이라는 남자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사실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절정을 넘어선 무인들 중 가장 먼저 백아(白牙)와 충돌했다는 그의 소감이 듣고 싶었다.

급박하게 전개되는 중원 무림의 각축장.

정도맹의 깃발 아래 호남(湖南)까지 진출한 점창의 전진기지를 찾은 이유였다.

“고작 열다섯쯤 되었을 걸세. 지금은 수왕이라는 거창한 별호로 불리지만, 그때는 그저 운남 구석에 있는 소수부족의 꼬맹이였지. 놀라운 건, 그 나이에 이백의 설검대를 홀로 뿌리쳤다는 거야. 심지어 추격대를 이끈 사람은 회안검, 그 무지막지한 노인네였지. 그가 외팔이가 되어 복귀하고, 곧이어 시작된 전쟁에 소년이 난입했을 때, 십여 일 전에는 없던 맹수가 따라붙었어. 그게 별비라네.”

“별비요?”

“아, 녀석의 진짜 이름이야. 와족어일세. 유성우(流星雨)라는 의미 정도로 이해하면 될 거야. 우리가 보기엔 이름으로 좀 그렇지만, 그들은 그런 식으로 이름을 짓더군. 중원에선 백아(白牙)니 백풍(白風)이니 천호(天虎)니 제멋대로들 부른다지, 아마?

수왕 못지않게 유명한 그의 반려수.

백호의 위용을 지켜본 이들이 경탄 또는 두려움을 담아 선사한 이름들이다.

하지만 사내, 호검대의 대주 조광은 그게 영 마뜩잖은 것 같았다.

별비란 이름만이 백호의 특징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다는 표정이다.

마치 그 이름의 유래를 아는 것처럼.

“아무튼 엄청났다네. 와족의 반려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 정도일 줄 누가 알았겠나. 특히 파란 눈의 범 두 마리는 정말이지…….”

나이가 들며 말수가 늘어난 걸까?

아니면 영수(靈獸)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짐승들의 인상이 워낙 강렬했던 탓일까.

세간의 평과 달리 호검대주는 묻지 않은 이야기까지도 줄줄이 꺼내들었다.

“저도 먼발치서 백아, 아니, 별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더군요. 그나저나… 열다섯의 나이에 별비와 함께 전장에 난입한 수왕. 맞붙으셨다지요?”

“그럼, 그럼. 비아를 처음 만난 순간이었지. 뭐 이런 꼬맹이가 다 있나 싶었다네.”

저 허물없는 말투.

전쟁까지 벌였던 두 집단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건, 와족 전대 족장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과장이 보태진 거겠지만, 그가 중원에 있었다면 무림의 세력 판도가 뒤바뀌었을 거라는 말이 돌 정도로 대단한 남자였다고도 했다.

또한 그를 목격한 자들이 혀를 내두르는 무력만큼이나 그릇도 큰 남자였음이 틀림없다.

목숨을 빼앗으려고 덤빈 자들을 용서한다는, 당금 강호에서는 케케묵은 협객서에서나 나올 법한 일을 실제로 행했으니까.

하지만 그 어려운 결정은 결과적으로 두 집단이 공존하는 미래를 열어젖혔고, 해당 구성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게 후인들의 평이었다.

“점창 장문인과 고검 외에도 수왕과 친분이 있는 분들이 많은가 봅니다.”

“뭐, 비아 그 녀석이 워낙에 넉살이 좋으니까. 미워할 수가 없는 녀석이지.”

“맞붙으셨을 때, 실신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실…!”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 짓던 조광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그때는… 일대일이 아니었네. 별비와 함께 달려든 거란 말일세! 아무리 비아가 출중하다 해도 열다섯 꼬맹이에게 밀릴 정도로 내가 형편없지는 않아! 누구한테 들었나, 그 이야기? 풍검대주, 그 입 싼 놈인가?!”

“맞군요, 실신. 수왕에게 턱을 맞고서.”

“…….”

호검대주의 얼굴은 무척이나 언짢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표제는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만, 저희는 강호에 획을 그은 자들의 이야기를 수집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숨겨진 비사(祕史)나 당대의 커다란 사건, 사고까지도.”

“크흠. 대강의 이야기는 규에게 들었네. 삭월이라 했지? 일전에 산으로 한 명이 방문했다더군.”

“네, 맞습니다. 아무튼… 작금에 이르러 ‘그들’이 날조하고 은폐하려는 사실들을 세상에 밝히고 보존하려는 목적이죠. 수왕의 이야기도 심도 있게 다룰 예정인데, 거기에 대주님의 이야기를 곁들여도 될지요.”

“……무엇을? 열다섯 나이에 점창의 호검대주를 실신시켰다는걸?”

“네.”

“……그걸 물으려고 면담을 요청한 건가?”

“아뇨. 원래는 대주님과 별비의 이야기를 청하기 위해 왔습니다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꽤 괜찮겠다 싶어서…….”

“…….”

불편한 침묵이 막사에 내리깔렸다. 』

혼세록(混世錄) 대담 편

「점창파 호검대주 조광」

삭월 월목대주 비아인 저

* * *

사박- 사박-

육중한 몸체에 비해 지극히 미세한 발소리다.

하지만 인간과 짐승 할 것 없이 모두가 그 발걸음에 주목했다.

등장과 동시에 모든 이들에게 강렬한 존재감을 각인시킨 짐승.

새하얀 털빛을 물들인 피조차 그 영험함을 퇴색시킬 순 없다.

마른 비의 곁에 머물던 별비가 마침내 마주한 푸른 눈에게 향했다.

“크르릉…….”

굳건히 대지를 디딘 다리는 황색의 철탑과 같다.

고색창연한 털빛의 주인은 그 몸집에 어울리는 위용으로 다가오는 혈육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박, 사박- 터턱.

그 마주침에는,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호라는 호칭이 무색할 정도로 압도적인 자태를 뽐내는 푸른 눈도 그렇지만, 중원에서 사방신으로 추앙받는 백호 또한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사방에 흩뿌렸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둘을 위한 배경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하늘이 내린 두 마리의 신수(神獸)가 인세의 한복판을 거니는 것 같은 광경에 장내의 모두가 침을 삼켰다.

“그르르르…….”

마치 인간처럼.

눈과 눈이 마주친다.

창천을 담아낸 푸르른 눈 두 쌍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먼저 눈빛이 흔들린 건 별비였다.

과연.

보는 순간 이해했다.

벗이 호언장담했던 이유를.

검치호를 대적할 존재가 없다고 여긴 건 착각이었다.

아비의 아비는 숙적을 향한 잠재적 두려움을 한순간에 지워버릴 만큼 강대한 존재였다.

만물을 발아래에 둘만큼 강한 검치호지만, 이 앞에 선다면 피식자로 전락할 뿐이다.

무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절대적인 포식자가 눈앞에 있었다.

“그릉.”

수십 년을 인간과 부대끼다 보니 그들의 감정에 동화된 걸까.

푸른 눈 또한 격동하는 심정을 다스리기 힘들었다.

복수?

그런 건 인간만의 행위일 뿐이다.

야생의 세계에서 성장을 마친 짐승은 부모든 새끼든 서로를 돌보지 않는다.

독립하는 순간 동떨어진 하나의 개체가 되며, 스스로를 온전히 책임져야만 한다.

힘이 약해 쓰러졌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야수도 부모나 새끼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나설 뻔했다.

너른 하늘에게조차 티를 내지 않았지만, 혈육들이 몰살했음을 알았을 때, 애뢰산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안도했다.

전장에 난입한 별비를 보았을 때.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전해지는 기운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혈육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직 서툴기 짝이 없지만, 스스로 각성을 이룬 손자가 대견했다.

“크르릉.”

고생했다.

살아남아서 다행이다.

이렇게 만나니 좋구나.

푸른 눈이 별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인간처럼 팔이 있다면 안아줬을 거다.

너른 하늘이 싸움을 끝낸 마른 비를 끌어안은 것처럼.

별비에게 다가간 푸른 눈이 천천히 머리를 비볐다.

“…….”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아비의 아비.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아득한 힘을 지닌 존재다.

마주한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해 온다.

야생의 본능이 전하는 위축감과 설명하기 힘든 따스함.

그 혼재된 감정 사이에서 별비는 갈등했다.

하지만 별비가 보일 반응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낯설지만, 한없이 친밀한 이 느낌.

분명 혈관을 흐르는 피에서 비롯된 동질감이리라.

어린 시절, 아비와 어미를 잃은 후 처음으로 느끼는 핏줄의 따스함이다.

별비는 용기를 내서 푸른 눈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그르릉…….”

그것은 세대를 건너뛴 해후일지니.

찬연히 내리쬐는 햇살 아래, 시대에 이름을 남길 두 마리의 맹수가 만났다.

* * *

“…….”

눈이 부시다.

살며시 열린 눈꺼풀 사이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눈부신 햇살에 인상을 찡그리자, 무언가가 끼어들어 빛을 가렸다.

초점을 잡기 위해 애쓰던 동공이 어슴푸레하게 형체를 잡아냈다.

서서히 또렷해지는 상(像).

햇살을 가린 얼굴을 인지했을 때, 여규의 눈이 커다래졌다.

‘꿈?’

꿈이라도 좋다.

자나 깨나 그리던 사람이었으니까.

단정히 넘긴 머리와 칠흑색의 새카만 군복.

여규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