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22화 (122/463)

122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언어 대신 터져 나오는 건 눈물이었다.

겨우 빛에 적응한 눈이 뿌연 습막에 가렸다.

인자한 목소리가 흐느끼는 소년을 감쌌다.

“많이 컸구나, 규야.”

“아… 버… 아버지!”

그 얼마나 고된 시간들이었나.

무시, 멸시, 모욕, 구타, 따돌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사형제들 틈에서 하루하루 꺾이지 않기 위한 싸움을 계속했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모옥에서 지친 몸을 누이며, 남몰래 흐느낀 날이 그 얼마였던지.

아스라한 어린 날의 추억을 곱씹으며 무너지지 않기 위해 수없이 스스로를 다잡았다.

돌아오겠다는 아비의 약속을 믿으며.

돌아올 리 없다는 그들의 비웃음을 넘기며.

그리고 지금, 긴 세월을 지나 그 믿음이 증명됐다.

꿈에도 그렸던 아비가 눈앞에 있었다.

“홀로 두어 미안하다, 규야. 나는 부모의 자격이….”

“아니에요. 괜찮아요. 돌아오셨으니 충분해요. 그걸로 됐어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지난날의 슬픔과 외로움을 흘려보낸다.

벅차오르는 감격을 가슴에 담고, 아비의 품에 안긴 열네 살 소년은 목 놓아 울었다.

* * *

청죽림으로 돌아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애초에 와족의 전사들을 위협할 수 있는 맹수는 드물었고, 개인이라면 모를까, 결집한 전사들의 기세를 감당할 수 있는 짐승 따윈 존재할 리 없었다.

창산을 내려와 남하하는 길.

이해 부근 늪지대를 지날 무렵, 물보라와 함께 기둥이 솟구쳤다.

“쿼어어어어!”

“어? 거악이네?”

흘깃 눈을 돌린 산은 덤덤하기만 했다.

성년식 때 녀석에게 죽을 뻔했던 기억은 이제 추억일 뿐이다.

어지간한 곰의 두세 배는 됨직한 괴물의 등장에도, 놀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흠… 다시 붙으면 해볼 만할 거 같은데……. 어때, 큰 발. 한판 할까?”

“꾸엉! 꾸어엉!”

앞발을 부딪치며 벌떡 일어선 큰 발이다.

그 패기 넘치는 모습에 안개걸음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서라. 아직은 어렵다.”

“무슨 소리! 우리가 얼마나 강해졌는데!”

“쿼어어…! ……어어?”

파충류 특유의 섬뜩한 눈빛에 급속도로 공포가 차올랐다.

거대한 악어의 몸통이 부들부들 떨렸다.

“봐, 봤냐?! 저놈, 우릴 보고 쫄았…!”

“착각도 유분수지. 뒤를 봐라, 인마.”

윤기가 흐르는 황색과 새하얗게 빛나는 백색의 털.

해후 이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푸른 눈과 별비다.

귀찮게 나대지 말라는 듯, 푸른 불꽃을 머금은 눈 두 쌍이 거악을 째려봤다.

“쿠… 워어어어…….”

풍더엉! 쏴아아아―

황급히 늪 속으로 잠수한 녀석은 다시는 대가리도 내밀지 않았다.

“쳇. 어쩐지 이상하다 했네.”

툴툴대는 산과, 깔깔대며 웃는 청년들.

올 때는 같이 왔으나 함께 돌아가지 못하는 식구들 때문에 슬픔에 잠겨 있던 이들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또다시 삶을 걸어가야 하는 법.

산의 투덜거림을 시작으로 와족은 서서히 웃음을 되찾기 시작했다.

종전 선언 이후 무너져 내린 매서운 눈과 우둔한 땅.

창산을 빠져나오자마자 주저앉은 너른 하늘.

전투 화장의 시간이 다하자 힘을 잃는 건 수장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스스로 각성하고 자연기를 빌려 쓰지 않는 푸른 눈과 어둔 날개만이 팔팔했을 뿐이다.

수장들이 기력을 회복할 동안, 먼저 일어선 전사들이 전사자들의 화장을 마쳤다.

“돌아가자.”

자리를 털고 일어선 너른 하늘의 뒤로, 유골함을 든 전사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 후, 한 달하고도 반.

전쟁의 피로를 풀며 천천히 남하한 와족이 푸른빛 대나무 숲에 당도했을 때다.

어쩐 일인지 안절부절못하는 사람 그림자가 청죽림의 진입로에 어른거렸다.

“어, 어서 오세요…….”

원래 날씬했지만, 이제는 야윈 걸 넘어 초췌해 보이는 여인이다.

불안한 표정의 겨울 달이 복귀하는 전사들을 마중 나와 있었다.

결단

영묘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지세의 가파름 때문이 아니다.

부족원들의 냉랭한 시선이 견디기 어려웠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침묵이 버거웠다.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무관심.

아니, 무관심이라면 차라리 낫다.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며 쏟아지는 무언의 비난과 싸늘한 지탄은 가슴을 후벼 팠다.

겨울 달의 고개가 점점 깊숙이 파묻혔다.

“달아, 고개를 들어라.”

두툼하고 묵직한 손이 가녀린 어깨 위에 얹혔다.

움찔한 겨울 달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비 맞은 아기 새처럼 파르르 떨고 있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은 큰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청죽림을 지나 영묘에 가까워질 때까지.

겨울 달로 인해 냉각된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할 리 없다.

선두에 섰던 너른 하늘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온 이유였다.

“굽은 뿔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 그로 인해 할멈이 쓰러지고, 적의 도주를 돕는 결과로 이어진 것. 씻지 못할 죄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너른 하늘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모두 앞에 직설적으로 꺼내놓을 뿐이다.

겨우 들어 올렸던 겨울 달의 고개가 힘없이 떨궈졌다.

“아마 달이 넌 모르고 있었겠지. 호국영이란 청년이 의도적으로 너의 마음을 이용했다는걸.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이었다는 것도.”

모두에게 전하는 사건의 실상이다.

너른 하늘은 정확한 내용을 알지 못하는 부족원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들려주고자 했다.

들어라.

그리고 판단하라.

크나큰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 참작의 여지가 있는지 헤아리는 건 각자의 몫이다.

너른 하늘 개인적으로는 철저하게 배신당한 그녀의 마음과, 그로 인한 치명적인 실수를 한 번쯤 품어 안아주고 싶었다.

‘족장. 달이는 그저 누군가를 마음에 담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 나이 때 소녀의 첫사랑이란 다른 게 눈에 들어오지 않죠. 극심한 충격으로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한 일입니다. 족장께서 그 불쌍한 아이를 보듬어 주시구려.’

이제는 어머니 대지의 품으로 귀의한 잎의 노래가 생전에 남긴 말이었다.

반백 년을 함께한 벗의 죽음에 심신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그녀는 겨울 달을 염려했다.

고의도, 악의도 아니었음을 알기에 그녀의 잘못을 용서하고, 손녀뻘의 소녀가 받았을 상처와 배신감을 헤아렸다.

부족 내부에서 그녀에게 쏟아질 비난을 걱정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할멈께 용서를 구했다고 들었다. 그걸로 지은 죄가 사라지진 않겠지만, 할멈이 널 용서했듯 나 또한 그러고 싶구나. 하지만 모두가 그러지는 못할 거다. 그들을 원망치 말고, 너의 실수에 대한 무게를 짊어져라. 그러면 언젠가는 그들도 널 다시 받아들일 거라 믿는다.”

영묘로 가는 길.

모두가 생각에 잠겼다.

어른들은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지만, 청년들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했다.

겨울 달은 고개를 숙인 채 외따로 떨어져 일행의 꽁무니를 따를 뿐이었다.

“어머니 대지시여.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자들을… 굽어살피소서. 그들의 넋을 위로하시고, 따스하게… 보듬어 주소서.”

아직은 어색하고 서툴기만 한 술언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잎의 노래의 그것에 못지않았다.

편안한 얼굴로 눈 감은 그녀 앞에는 눈시울을 붉힌 여울이 서 있었다.

그녀가 생전에 놓지 않았던 죽장을 양손으로 높이 든 채.

휘오오오―

망자의 넋에 담긴 감정의 찌꺼기들이 솟아오른다.

여울에게서 뻗어 나간 연녹색 기운이 붉은 기운을 감싸 안고 다독였다.

잎의 노래에겐 비할 수 없지만, 그것이 술력의 발현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산에게 달려드는 광서우를 염원으로 멈춰 세웠을 때.

여울의 주술사로서의 자질은 이미 깨어나 있었다.

“오래 걸려도 괜찮다, 여울아. 천천히. 천천히 하려무나.”

주술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자연기의 운용에 있어서만큼은 와족 역사상 가장 뛰어난 남자가 옆에 있다.

너른 하늘의 보조를 받으며, 여울은 생소한 술법의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형제여. 부디 편안한 안식이 되길.”

새로이 내정된 부족의 주술사가 더디지만 착실하게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 와족의 구성원들은 떠나버린 형제자매들을 추모했다.

신령목으로 피신했던 노약자들까지 합류하여 영묘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스윽-

묵념하던 이들 중 한 명이 고개를 들었다.

탄탄한 육체에 비해 얼굴에는 앳된 모습이 남은 소년이다.

모두가 추모에 여념이 없는 사이, 그가 손을 들어 벽을 쓰다듬었다.

‘칼이빨 호랑이.’

사라져버린 과거의 편린인 줄만 알았다.

벽화에 새겨진 위풍당당한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지만, 정말 조우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놈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을 줄이야.

‘난… 오늘 형을 추모할 자격이 없어…….’

벽화를 쓰다듬던 마른 비가 주먹을 꽉 쥐었다.

오늘은 아니다.

아직은 그에게 편안히 눈 감으라 말할 수 없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던진 그의 평안을 비는 건 원수를 갚은 후가 되어야 한다.

은빛 여우.

뼈도 추리지 못한 그를 위해 칼이빨을 사냥한다.

놈을 불태우고 남은 재를 애뢰산에 흩뿌리리라.

그걸로 그의 은혜를 새기고, 넋을 기린다.

소년은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쾌애액- 쐐액―!

청죽림의 한복판.

황색의 빛줄기와 새하얀 섬광이 격렬하게 교차했다.

콰카칵!

“커헝…!”

목은 모든 동물의 급소다.

푸른 눈에게 목덜미를 물린 별비가 허공에서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앙!

두 마리 대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대지가 비명을 질렀다.

“가르릉…….”

목덜미에 남은 묵직한 통증에 별비가 신음했다.

“크헝!”

그게 아니라니까?

본능에 맡기고 무작정 달려드는 건 지능이 모자란 야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어정쩡한 놈들은 타고난 육체만으로도 제압할 수 있지만, 진짜 강한 맹수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걸 몇 번이나 말하나!

푸른 눈이 앞발을 들어 별비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카흐흥…!”

이런 모지리가 하나 남은 내 핏줄이라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푸른 눈은 성에 차지 않는 자식을 보는 인간 아비와 같았다.

저 옆에서 고개를 젓는 너른 하늘처럼.

꽈앙!

“아악!”

“아직 여물지도 않은 녀석이 어디서 이따위 잔꾀부터 배워온 거냐!”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다.

산 허물기, 바위 부수기, 올빼미 사냥, 불벼락, 중선오격…….

적들을 허물어뜨린 기예들이 족족 가로막히자, 마른 비는 실전을 통해 터득한 깨달음들을 꺼내 들었다.

결, 일체화, 회전의 묘, 자연기의 응집과 분배…….

역시 통하지 않는다.

마른 비가 사선을 넘으며 깨우친 무의 이치들을 너른 하늘은 숨 쉬듯이 펼쳐냈다.

그래서 꺼낸 것이 설지굉을 위기로 몰았던 허초다.

시선과 기세로 거목 쪼개기를 예고하고, 급격히 뒤튼 육신으로 날짐승 떨구기를 뽑아냈다.

하지만.

“이눔 시키가!”

너른 하늘은 호통을 치며 우악스런 주먹으로 마른 비를 후려갈겼다.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납작하게 뻗은 마른 비에게 꾸중이 날아들었다.

“힘! 속도! 예리함! 변화! 무엇이든 좋다! 진짜 강해지려면 적이 알고도 막지 못할 공격을 펼쳐야 해! 그런 잔꾀는 진정한 강자에겐 통하지 않는다! 눈 돌리는 꼴을 보니 허약한 적들한테 운 좋게 몇 번 통한 모양인데 그 습관, 당장 버려라!”

“허약한 적 아닌데…….”

억울하다.

정말 억울하다.

아버지에게나 허약한 적이지, 애뢰산까지 쫓아온 회색 눈의 노인과 전장에서 쓰러뜨린 적의 수장은 자신에겐 목숨을 위협할 만큼 벅찬 상대였다.

“뭐가 어째? 이눔 시키가 말대답은!”

꽈앙!

“아악!”

“언제까지 그따위 적들에게 가로막혀 쩔쩔맬 거냐?! 인간은 말할 것도 없다! 붉은 발톱이든, 사람거미든, 칼이빨이든! 앞을 막아서면 한 방에 때려눕힐 힘을 길러라!”

가르치기로 한 이상 제대로 한다.

전쟁으로 인해 성년식이 중단되었고, 추모를 위해 비아가 마을까지 따라왔지만, 살아남은 아이들의 소재를 파악하는 대로 성년식은 재개된다.

그렇다면.

그 안에 최대한 많은 걸 때려 붓는다.

자신이 속성으로 지도를 해도 될 만큼 아들의 재능은 차고 넘쳤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아, 그건 아니군.’

그 부분만큼은 아무리 아들이라도 쉽게 양보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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