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어쨌거나 칼이빨.
은빛 여우와 실바람의 이야기를 비아에게 들었다.
매일 밤, 영묘를 찾아 추모를 올릴 만큼 그들에게 감사한다.
은인이다.
그들은 비아의 은인이다.
그렇다면 원수를 갚아야 한다.
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아들의 몫이었다.
전사라면, 모름지기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별비 저 녀석.’
독립하기 전에 가족이 몰살을 당해서일까?
아니면 빠른 각성 덕에 지능과 감정을 갖추게 되어서?
아들이 데려온 반려수는 짐승답지 않게 복수라는 감정을 뚜렷이 새기고 있었다.
‘후우… 걱정은 되지만, 맡겨야겠지.’
칼이빨 호랑이.
이야기만 들어도 보통 녀석이 아니다.
어쩌면 자신을 만나기 전의 푸른 눈보다 셀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강하다.
“비아야.”
“네, 아버지.”
인상을 찡그리며 머리를 어루만지던 마른 비가 너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확신이 들기 전까진 절대 녀석에게 덤비지 마라. 내가… 네 복수를 위해 애뢰산으로 향할 일이 없도록 해다오.”
갑자기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다.
그 마음을 받은 아들은 뭉클해졌다.
“네. 걱정 마세요, 아버지. 저도 죽기 싫어요.”
“후우… 걱정을 하지 않게 해다오. 누굴 닮아서 이렇게 약해빠진 건지. 애비는 말이다. 네 나이 때…….”
인간의 한계를 넘은 초인조차도 아들 앞에선 여느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다.
“끄응….”
“후우…….”
“끄어엉…!”
“가루룽…….”
덩치 큰 남자.
길쭉한 사내.
발이 커다란 곰.
까만 표범.
나란히 둘러앉아 마른 비와 별비의 대련을 지켜보는 이인이수(二人二獸)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걸음아. 이게 말이 되냐? 우리가 세 살이나 많은데. 우리가 논 것도 아니잖아? 죽을 둥 살 둥 단련을 했는데, 왜 저 꼬맹이가 더 센 거야?”
“세긴 뭐가 세. 붙어봐야 알지.”
뚱한 얼굴로, 안개걸음이 말했다.
“너, 불벼락 쓸 줄 알아?”
“…….”
“오, 이번엔 시무룩해졌군. 인정할 건 인정하자. 없어 보인다.”
“……무슨 차이지? 그저 족장님의 핏줄이니까, 라고 하면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잖아. 재능의 차이로 단정 지어 버리기엔 너무 억울해.”
산과 안개걸음이 힘 빠진 얼굴로 두런거렸다.
“꾸어어엉.”
“까루룽.”
진짜 맥 빠지는 둘은 따로 있었다.
‘그래도 너희는 같은 인간이잖아.’
‘우린 종의 차이라 할 말도 없다.’
‘서열이 또 밀렸어…….’
‘우린 처음에 뭐 하러 피 터지게 싸운 거야?’
큰 발과 검은 밤은 대충 이런 말을 나누며 구시렁거렸다.
“일어나라. 핏덩이들.”
“……?!”
넷의 감각에 걸리지 않고 지척까지 다가든 자.
화들짝 놀란 인간과 짐승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 할아범?”
얼굴, 목, 어깨, 팔뚝, 몸통…….
전신이 검상으로 뒤덮인 노인이 서 있었다.
서늘한 예기를 품은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났다.
“할… 아범. 움직일 수 있어요? 팔은… 팔은 괜찮으신 거예요?”
쇄골과 팔꿈치.
공지량의 검에 베여 끊어질 듯 덜렁거리던 양팔이다.
마을로 돌아오는 내내 여울의 집중적인 치료를 받은 덕분인지, 그믐의 양팔은 거동에 지장이 없을 만큼 회복되어 있었다.
꺼져가던 생명은 잎의 노래의 목숨과 맞바꾼 희생으로.
양팔은 어설픈 치유의 술을 밤잠 설쳐가며 퍼부은 여울의 간호 덕분에.
또 한 번의 전쟁을 겪고도 살아남은 노장이다.
하지만 그의 심중은 시커멓게 타고 재만 남아 있었다.
“할아범. 괜찮으신… 거죠?”
괜찮을 리 없다.
마을로 복귀하는 한 달 반.
살아 있는 시체나 다름없는 그믐은 들것에 누워, 잎의 노래의 유골함을 안고 소리 없이 오열할 뿐이었다.
기력이 다할 때까지 숨죽여 울고, 실신하기를 반복하던 노인은 영묘에 도착한 후에도 이날 이때까지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만 있었다.
“괜찮아야지. 괜찮지 않으면 안 된다.”
낮게 읊조리는 그믐은 아예 다른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았다.
시퍼런 칼날을 품은 듯한 안광에 산과 안개걸음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인자한 웃음과 짓궂은 농을 건네던 부족의 큰 어른은 이제 없었다.
성난 그믐.
그의 젊은 시절을 아는 자들이 떠올릴, 북풍한설 같은 전사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이런…….”
그 칼바람 같은 기도를 감지한 너른 하늘이 고개를 돌렸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믐의 심정을 가장 가깝게 짐작하는 그는 깊은 연민에 휩싸였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소.”
“할아범…….”
한창 대련 중이던 이들을 놔두고, 그믐이 곁을 돌아봤다.
“산이, 걸음이, 큰 발, 검은 밤. 너희들, 강해지고 싶으냐?”
“…….”
“두 번 묻게 하지 마라. 강해지고 싶냐고 물었다.”
“네? 네… 물론이죠. 할아범.”
“따라와라.”
“어, 어딜…?”
“재능이니 자질이니 하는 것들. 분명 격차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 뛰어넘게 해주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산과 안개걸음에게, 노장은 말했다.
“죽을 각오가 되었다면 말이다.”
물론이다.
성년식을 떠나는 순간부터 항상 그래왔다.
그럼에도 뒤집힌 실력 차이에 좌절했을 뿐.
그믐 같은 초일류 전사가 지도해준다면, 이쪽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이인이수가 노인의 뒤에 섰다.
“족장.”
“……네. 할아범.”
“이 녀석들을 지도한 후에. 내 몸이 완쾌되면 대련을 부탁하오.”
“대련… 말입니까?”
“늙어빠진 몸이라 어렵겠지만, 눈감는 순간까지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오. 언제 무슨 일이 또 터질지 모르니. 다시는 후회하고 싶지 않소이다.”
“언제든지요. 무리만 하지 마세요. 그리고 말씀은 원래대로 편하게….”
“아니. 이제 말 놓는 일 없을 것이오. 생각해보니…… 그이가 그걸 원했더이다.”
아픈 말을 남기고, 그믐은 멀어져갔다.
두 눈을 질끈 감은 너른 하늘이 슬픔에 잠길 새도 없이, 또 다른 방문자가 그를 찾았다.
“족장님.”
“음……. 달이구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래. 천천히 듣자꾸나. 이리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그냥 여기서 말씀드릴게요.”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른다.
너른 하늘도, 마른 비도, 푸른 눈과 별비도.
입술을 짓씹고 울음을 꾹꾹 눌러 삼키는 겨울 달을 말없이 바라봤다.
“저…… 부족을 떠나겠어요.”
* * *
“차라리 자르는 게 낫겠습니다. 자… 음……. 장문인.”
잠시 말을 고르던 사내가 결국 장문인이란 호칭을 입에 담았다.
마땅히 대신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권한을 박탈당했고, 곧 있을 문파 회의에서 직위 해제당할 게 틀림없지만, 아직까진 그가 장문인이었다.
“……그리해라.”
무미건조하다 못해 바짝 마른 음성이다.
터럭만큼의 감정도 찾기 힘든 그 목소리에서 생기를 찾기란 요원했다.
멍하니 앉아 있는 공지량의 동공은 풀려 있었다.
“마비산(麻沸散)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의원으로 보이는 사내가 유지(油紙)에 쌓여 있던 분말을 덜어내어 탕약에 풀었다.
마비산.
그 기원은 고대 삼국, 신의라 칭송받던 화타(華佗)로부터 유래한다.
용도는 명확하다.
약효의 지속시간동안 환자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여 환부를 직접 가르고 쨀 수 있게끔 하는 데 있다.
생전엔 영웅으로, 사후엔 무신으로.
충의와 무용의 상징인 저 관우(關羽) 정도 되지 않고서야 살을 찢고 뼈를 긁는 수술을 맨정신에 견딜 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뼈까지 침투한 독기를 화타가 긁어낼 동안, 정말로 관운장이 바둑을 두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사후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위인에 대한 과장된 경의쯤으로 이해할 수밖에.
아무튼 화타는 당시에는 금기로 여겨지던, 환부에 직접 칼을 대는 획기적인 의술을 행했고, 그러기 위한 필수품이 마비산이었다.
두풍병(頭風病)을 앓던 조조에게 거짓을 고하고 돌아오지 않은 결과, 화타가 옥중에서 고문으로 사망한 지 천 년의 시간이 지났다.
안타깝게도 그의 의술의 정수를 담은 청낭경(青囊經)마저 조조에 의해 불태워졌으나, 유구한 시간은 또 다른 천재들을 낳았으니.
이 시대 의술의 최고봉이라 추앙받는 괴의가 바로 그런 사람이며, 그가 개량한 마비산은 대마(大麻)가 아닌 양금화(洋金花)를 주성분으로 하여 훨씬 강력해진 마취효과를 즉효에 가깝게 나타내는 데 이르렀다.
공지량이 무표정하게 탕약을 마시는 동안, 사내가 말을 건넸다.
“괴의 화통달이 중원 7대 기인에 꼽힐 만큼 독특한 사람이긴 해도, 그 실력 하나만은 진짜입니다. 화타의 후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믿겨질 정도지요. 그가 직접 제조한 마비산이니 다른 것과는 비교가 안 될 겁니다. 정말 어렵게 구한 물품이지요. 약효가 도는 대로 팔을 자르겠습니다. 억지로 저항하지 마십시오. 장문인.”
마지막 말 때문에 멍하게 있던 공지량은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저항이라니?”
“곧 의식을 잃을 겁니다. 잠이 쏟아지더라도 정상적인 반응이니 순응하시면 됩니다.”
“의식을 잃는다? 그게 무슨….”
피잉-!
아련한 현기증과 함께 급격히 시야가 뿌예진다.
탈진에 이른 사람이 한순간에 기절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수마가 덮쳐왔다.
“이…!”
반사적으로 기운을 일으켜 저항하려 했으나, 산산이 부서진 단전은 한 줌의 내공도 끌어올리지 못했다.
아니, 끌어올리기는커녕 평생토록 쌓은 내공이 몽땅 흩어져버려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이런 개 같은…!’
참담한 상실감이 덮쳐오는 졸음을 한 뼘쯤 밀어내게 만들었다.
‘씹어 먹어도 모자랄 야만인 놈!’
이제야 실감이 난다.
이런 몸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말 그대로 모든 걸 잃어버린 것이다.
허탈, 좌절, 절망에 이은 분노의 메아리가 공지량을 삼켰다.
아직 남아 있는 무인의 본능이 갑작스런 자극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뿐이다.
생물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운.
육신 곳곳에 깃든 미약한 기운을 끌어모아 약 기운에 대항해보지만, 헛된 몸부림이었다.
대체 무슨 성분인지 마비산에 부딪힌 기운들이 반발을 일으키지 않고 스러지는 게 느껴졌다.
“버티지 마십시오, 장문인. 괜찮습니다.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한숨 푹 주무시고 나면 끝나 있을 겁니다.”
“음…….”
어느덧 산산조각 난 뼛조각이 왼팔을 헤집던 통증은 사라져 있었다.
어둠이 의식을 덮었다.
‘……유환?!’
정신이 겨우 들었을 때, 공지량이 제일 먼저 떠올린 사람은 아들이었다.
“유, 유환아…!”
벌떡 상체를 세운 공지량이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