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24화 (124/463)

124화

비보는 이미 전해 들었다.

처참하게 토막 난 시신이 북쪽 숲에서 발견됐다고.

흉수는 유환의 사지를 잘라내며 고문한 게 분명했다.

그 끔찍한 광경에, 사체를 회수하던 제자들은 구토를 넘어 실신하는 자들까지 속출했다고 한다.

진작 전해 들었지만, 패전의 충격과 왼팔의 통증 때문에 넋이 나갔었다.

아들의 죽음조차 그저 짤막한 낱말로 스쳐 지날 만큼.

통증이 가시고, 잠시나마 뇌를 쉬고 나니 지나쳤던 낱말들이 정리가 된다.

공황 상태에서 벗어난 공지량은 그제야 아들의 죽음을 인지했다.

“어… 어흐, 어흑…! 끄어어……!”

악인도 제 자식만은 끔찍하게 아끼는 법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이용하고 내버렸던 공지량이 가슴을 움켜쥐고 통곡했다.

‘그, 그놈… 그놈이야……. 그놈이 틀림없어…!’

아들은 검에 토막 났다.

와족은 검을 쓸 줄 모를뿐더러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제삼자라고는 곤명에서 온 총독부의 관군들뿐인데, 그런 떨거지들에게 죽을 유환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군이다.

믿을 수 없게도 유환은 문내의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점창 문하에서 그런 끔찍한 고문을 자행할 수 있는 자는 둘뿐이었다.

한 명은 자신의 손발이나 다름없던 지석인.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설지굉!’

확실하다.

그놈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놈이 틀림없다.

‘……눈치챘구나!’

방법은 알 수 없지만, 그를 제거하려던 자신의 계획을 알게 된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돌발 행동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일부러… 일부러 시신을 방치한 거야!’

훼손한 유환의 시체를 숨기지 않았다.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라는 뜻이다.

자신에게 보여주려 한 거다.

설지굉이란 인간을 건드린 대가를 너의 아들에게 갚았노라고.

그뿐이랴.

절묘한 시점에 나타나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잘만 하면 여휘를 움직여 와족과 호르찰을 일거에 지워버릴 수 있었는데, 놈 때문에 모든 게 무너졌다.

‘이… 이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새끼…! 죽인다… 그놈만은 반드시 죽인다!’

“으아아아악!”

봉검가와 운검가의 무인들로 첩첩이 둘러싸인 점창파 내 의원.

전부를 꿈꾸었으나 모든 걸 잃어버린 남자가 울부짖었다.

* * *

마룡봉 절벽 끝에 멋들어지게 걸친 전각.

창산 장문전 앞에는 점창의 모든 인원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하늘처럼 떠받들던 사내에게 경멸의 눈길을 보내며.

“……설검 장로의 증언을 토대로 제자들을 추궁한 결과…… 상당수의 제자들이 자백을 하였으며…… 소수부족들에게 강탈한 토지 문서와 거래 현황이 적힌 장부를 확보…….”

무수한 단어들이 사방을 떠돈다.

아찔하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 왼쪽 소매가 휑한 사내는 우두커니 앉아서 휘도는 언어 사이에 갇혀 있었다.

“운남 총독 호르찰에게 뇌물을 건네고…… 중원의 흑상을 통해 유통 경로를 확보, 군문에서만 사용이 허가된 전략 병기를 대량으로 구입…….”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으냐.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와족을 멸절시키기 위해 성년식이라는 고유의 행사를 떠난 아이들을 습격…… 야생 짐승의 새끼를 납치하여 소수부족의 짓으로 위장하고, 그들을 공격하게…… 꾀어낸 와족의 주력 부대와 텅 빈 마을을 급습…….”

적을 없애기 위해 책략을 짜내는 게 뭐가 어때서?

과정과 방법 따윈 중요치 않다.

승리했다는 결과만이 모든 걸 말해줄 뿐이다.

“독자적인 판단으로 걸러낸 제자들을 미끼로 던져…… 설검대주 정황과 설검대 절반이 죽을 걸 알면서도…… 이번 전쟁에선 아군의 피해를 아랑곳하지 않고 연노를…….”

미친 새끼들.

사람의 효용과 쓰임새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다.

내가 장문인에 오르고, 너희 버러지 같은 놈들은 평생을 노력해도 한낱 평문도로 살다가 뒈지는 것처럼 말이야.

이게 뭐 하는 짓거리냐?

지금 이 몸을 심문하는 건가?

선택받은 자가 미천한 놈들을 사용해 주었으면 고마워할 일이지, 감히 나에게 죄를 물어?

‘어디 있는 거냐.’

이따위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다.

놈은 어디에 있지?

왜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 거냐.

“전혀 반성하는 얼굴이 아니군.”

애타게 찾던 목소리가 우전방에서 들려왔다.

그 일대의 제자들이 쫙 갈라지며 길을 트고, 봉검가와 운검가의 무인들에게 둘러싸인 외팔이 노인이 걸어 나왔다.

“위선이라도 떨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그따위 얼굴을 하지 못할 텐데 말이야. 이건 뭐 끝까지 내가 뭘 잘못했냐는 표정이 아닌가.”

“너… 너 이 새끼…!”

언어의 울타리에 갇혀 울분을 삭히던 사내.

그리고 그를 여기까지 몰아넣도록 결정적 증언을 한 노인.

설지굉을 본 공지량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네놈…! 네놈이렷다! 솔직히 말해라. 네놈이 유환이를… 유환이를…!”

“아, 그 덜떨어진 애새끼 말인가? 솔직히 말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내가 썰어줬지. 토막토막, 잘근잘근. 나중에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질질 짜더군. 제발 죽여 달라고.”

“……?!”

커다란 충격이 좌중을 휩쓸었다.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다.

공유환을 죽인 흉수가 설검 장로였단 말인가!

이틀 전, 시체를 회수했던 자들 중 그 처참한 광경을 떠올린 자들이 허리를 숙이며 토악질을 했다.

“내 귓가에 대고 온갖 조롱을 속삭였었지. 정황과 설검대를 일부러 사지에 밀어 넣었다는 것도 그놈이 알려줬고 말이야. 별수 있나. 죽여 달라고 간청을 하는데 뜻대로 해줄 수밖에.”

“이 새끼가아아”

공지량이 설지굉에게 달려들기 위해 일어섰으나, 곧바로 발목을 움켜쥐며 나동그라졌다.

그걸 본 설지굉이 한쪽 눈썹을 씰룩였다.

“아…! 너 단전과 근맥이 박살났었지? 호오, 그 몸으로 나한테 덤비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비열한 새끼가 배짱 하난 좋구먼.”

설지굉이 치켜뜬 눈썹을 내리며 공지량을 조롱했다.

“같잖은 자존심이라도 지키려면 알아서 뒈지는 게 어떠냐. 살아봐야 좋은 꼴 못 볼 텐데?”

“설검 장로님! 장로님도 자제해 주십시오!”

운검가의 무인이 설지굉에게 주의를 주고, 공지량은 발광을 떨었다.

“설지굉, 너 이 개새끼! 네놈을 가만둘 줄 아느냐! 토막을 내서 씹어 삼켜…!”

“도저히 못 들어주겠군. 한숨 자고 일어나시오, 장문인.”

조용히 지켜보던 여휘가 움직였다.

내력이 실린 손가락이 수혈을 짚자 공지량이 의식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장문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자유로이 두었더니…… 안 되겠습니다. 이대로 진행하시죠. 운검 장로님.”

“그게 좋을 것 같구려. 여 장로.”

깨진 단전과 잃어버린 무공.

정정하던 봉검과 운검은 급속도로 기력이 쇠잔해졌다.

하지만 두 노인을 둘러친 분위기는 그들이 지닌 인간으로서의 품격이 변함없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꼿꼿이 세운 허리와 정광이 깃든 눈빛.

돌멩이 하나 부술 힘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들과 눈이 마주친 점창의 제자들은 극진한 공경을 담고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증명이었다.

인간 본연의 그릇이란 결코 무공 따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두 노인은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다들 알고 있듯 점창은 무기한 봉문에 들어간다. 그간 정도를 표방하는 문파로서 어긋난 길을 걸었음을 반성하고, 우리 때문에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

서릿발 같은 질타가 위엄을 등에 업고 내려앉는다.

회의에 참관한 제자들이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간의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 시간부로 장문인의 모든 권한을 박탈한다. 허나 장문의 자리를 비워놓을 수도 없는 일. 차기 장문인이 내정될 때까지 그의 명목상 지위는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문파의 어떤 일에도 관여할 수 없으며, 당분간 중요한 사안은 장로 회의를 거쳐 결정하도록 한다.”

“장문인의 손발이 되어 그릇된 일에 동참한 응목대의 죄가 크다. 기존의 응목대를 해체하고 새로운 인재들로 점창의 눈과 귀를 채울 것이다. 기존 응목대원들은 명이 떨어질 때까지 근신하며 속죄하라.”

모두의 예상대로 진행되는 전후 처리다.

늦었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

다시는 사문의 명예에, 그리고 스스로의 양심에 대못을 박지 않으리라.

이 순간, 점창은 진정한 명문 정파로 거듭나기 위해 허물을 벗고 있었다.

“사문이 저지른 과오는 특정 개인이 아닌,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점창의 모든 제자는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지난날을 돌이키며 자숙하라.”

수백 명의 고개가 일제히 숙여졌다.

누구도 소리 내어 답하지 않았지만, 그 정중한 읍(揖)에 담긴 진심을 봉검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설검 장로.”

“말씀하시오.”

아직 하나가 남았다.

공지량이 벌인 일들의 전모를 소상히 아는 자.

그의 악행을 고발하여 점창이 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멈춰 세운 자.

하지만 악업에 누구보다 깊숙이 연루되었으며, 장문인의 아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자이기도 하다.

설지굉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대는… 장문인의 악행에 동조했고, 그 앞잡이가 되는 걸 서슴지 않았소.”

“인정하오. 내 욕심 때문이었지. 당신처럼 대장로가 되고 싶었소.”

“……솔직하구려. 그리고 방금 밝혔다시피 유환이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살해했지.”

“그렇소.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소이다. 사지에 내몰린 수제자 놈과 설검대의 복수를 해야만 했지. 감히 그따위 쓰레기가 나에게 이죽대는 걸 봐줄 마음도 없었고.”

설지굉다운, 설지굉스러운, 설지굉만의 거침없는 화법이다.

모두가 주목하는 전후 회의에서도 노인은 거리낌이 없었다.

“제자들이 보고 있소. 언어 좀 순화할 생각이 없소이까?”

“보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오. 내가 원래 품격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라는 거, 모르는 사람도 있던가?”

“후우… 내가 이래서 항상 당신이 못마땅했던 거요.”

“공지량, 저 쓰레기가 하나는 바른말을 했지. 앞뒤 꽉 막힌, 고상한 척하는 늙은이들이라고. 나도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들이 마음에 안 들었소.”

웃어야 할지, 말려야 할지.

숨죽이고 노인들의 대화를 듣는 제자들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지난 십 년간, 만날 때마다 티격태격했던 세 노인이다.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가 조금 달랐다.

까칠한 언사 뒤에 숨은 묘한 유대랄까.

상대를 인정하는 마음과, 시간이 선사한 미운 정이 버무려지면서 전에 없던 감정을 자아내고 있었다.

“원래라면 죄를 물어야 마땅하나, 그대가 없었다면 장문인의 악행을 낱낱이 알기 어려웠을 거요. 설령 그게 복수를 위한 일이었다고 해도 말이지. 그 복수 또한 사문의 제자들을 위한 것이었고. 그리고 까딱하면 다시 충돌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당신의 증언은 전쟁을 멈추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소.”

“하고 싶은 말만 간단히 하시오. 그래서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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