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25화 (125/463)

125화

좌우지간 잠자코 있는 법이 없는 인간이다.

급격히 밀려오는 두통에 운검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공과 과를 상쇄하기로 결정했소이다. 당분간 처소에서 근신하며 전후 처리에 힘써주기 바라오.”

“내 과오를 덮어준다…… 이 말인가?”

“그렇소. 당신이 증언과 함께했던 말들. 그리고 최근 당신이 보여준 태도. 지난날을 후회하고 뉘우치고 있음을 알고 있소이다. 해서 고민 끝에 그런 결정을….”

“아, 그만. 알겠소이다. 그리하지.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점창이 안정될 때까지 돕겠소. 다만…….”

“다만?”

갑자기 말을 끊고 침묵하는 설지굉이다.

하늘을 올려다본 그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후엔…… 정식으로 파문을 요청하오.”

재회

“저, 저기…….”

눈빛이 싸늘하다.

비난을 넘어 경멸까지 담긴 시선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왜 그런 거야?”

“영묘에 외인을 들이면 안 된다는 걸 몰랐을 리는 없을 텐데.”

“그깟 한족 놈에게 빠져서 식구를 배신해?”

“굽은 뿔을 공격한 건 할멈에게 칼을 들이댄 거나 마찬가지야.”

“넌 미쳤어. 제정신이 아냐.”

날카로운 언어들이 가슴을 저민다.

용서를 구할 마음으로 다가갔지만, 청년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할멈과 족장님은 널 용서한다고 해도, 난 절대 그럴 수 없어.”

여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던 남자들까지 싹 돌아섰다.

등 돌리고 멀어져가는 이들에게 손을 뻗어 보지만, 잡을 수 없었다.

“그 마음… 이해는 해. 처음이지? 모든 걸 다 줄 수 있을 만큼 누군가를 좋아한 거.”

외면만 있었던 건 아니다.

몇몇 언니들은 안쓰러운 얼굴로 위로를 건네왔다.

“철석같이 믿은 사람이 처음부터 나를 이용하려고 접근한 거라면……. 휴…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 배신감이 얼마나 클지…….”

하지만 결론은 같았다.

“그래도 그건 용서받기 힘든 일이야. 네가 받았을 충격을 짐작하고, 정신이 없었다는 것도 이해해. 하지만… 달이 너를 당장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아. 어쩌면… 평생이 걸릴지도…….”

안다. 왜 모를까.

자신이라도 똑같이 말했을 거다.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일을 저지른 자신도 그렇게 느끼는데, 더 말해 무엇하랴.

‘그때는…….’

둔기로 머리를 내리친 듯한 충격에 사고가 마비됐다.

지독한 악몽을 꾸는 것 같았고, 돌변한 호국영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웃긴 건 그 지경에서도 그가 다치는 걸 볼 수 없었다는 거다.

자신도 모르게 의지가 흘러나갔고, 밤이가 움직였다.

이 악몽이 깨면 그가 환하게 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알고 있었다.

꿈이 아니란걸.

냉혹한 현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인정할 수 없었던 거다.

그 거짓말 같은 상황을.

어리석고, 멍청했으며, 아둔했다.

“흐흑…!”

터지는 눈물은 돌이킬 수 없는 행동에 대한 자책이며, 후회다.

하지만 너무 늦었고, 급기야 할멈은 떠나버렸다.

겨울 달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에요. 할멈을 향한 존경과 애정의 크기만큼, 부족원들은 절 비난하고 미워하겠죠. 이해해요, 그 심정을. 마땅한 질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거면 된다, 달아.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아뇨. 시간이 지나도 안 될 거예요. 어떤 이유가 있든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일이에요. 무엇보다 저 스스로 용납이 안 돼요. 그리고… 부족에 남아서 그 차가운 시선을 버틸 자신이 없어요.”

무겁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너무나 무거웠다.

무섭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부족의 울타리를 넘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하지만 떠나야 한다.

사적인 감정에 빠져 금기를 어기고, 식구를 공격한 죄.

성인이었다면 당장 쫓겨나거나 극형에 처해졌을 터다.

무슨 염치로 부족에 남아 있을까.

“족장님, 모두 앞에서 다독여주신 것. 감사했어요. 지금도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깊게 숙여지는 허리다.

아마도 다시는 볼 수 없을 부족의 어른에게 예를 갖추고, 겨울 달은 돌아섰다.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마른 비에게 슬픈 표정만을 남긴 채.

“다시는……. 다시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거예요.”

깊은 상처를 안고, 짙은 서글픔을 드리운 채 그녀가 떠났다.

‘잊고 있었구나…….’

전쟁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바람에 까맣게 잊었다.

달이를 이용했던 호국영이란 녀석을.

‘찾을 여유가 없었지. 중앙 전장에 계속 묶여 있었으니.’

적들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고, 중앙을 정리한 후에 곧바로 공지량에게 향했다.

호르찰과 여휘가 잇따라 등장하고, 종전 후엔 창산을 빠져나오자마자 주저앉았다.

호국영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여휘란 자와 날을 잡을 때… 그놈은 반드시 얼굴을 봐야겠군.’

너른 하늘의 호안이 창산을 향했다.

* * *

“아니, 자네…!”

마룡봉 뒤편, 여씨 부자의 작은 모옥.

원승을 본 여휘의 눈이 커졌다.

“세상에! 이게 얼마 만인가? 살아 있었어! 다행일세, 정말 다행이야! 한데 자네가 어떻게 점창에…?”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다.

원승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대, 대협… 아니, 여 장로님. 저를… 저를…… 기억하십니까?”

원승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점창의 문을 두드리게 된 계기.

자신이 다시금 일어설 수 있게 귀감이 되어준 남자.

여휘가 전장에 등장했을 때, 원승은 격동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서지 않았다.

자신을 기억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자신을 머릿속에 담기엔, 너무나 짧게 스친 인연이었으니까.

‘불쾌할 정도로 어두운 밤이었지.’

그리고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더러운 밤이었다.

대취한 원의 백호장은 누구도 자신을 막을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

한(漢), 위(魏), 서진(西晉), 수(隋), 당(唐) 시대에 국도였던 유서 깊은 도시다.

당 말에 와서 황폐되고, 천우원년에 천도를 꾀하며 폐허가 되었다지만, 그 땅에 뿌리내린 민초들이 어디 갈 리 없다.

더군다나 천하 구파의 둘인 화산(華山)과 종남(終南)이 섬서에 위치하니, 장안은 여전히 한족 백성들의 터전으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진득한 주향과 기녀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홍등가의 뒤편.

빛으로 뒤덮인 홍등가와 달리 근근이 살아가는 민초들의 거리는 불빛 한 점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날, 놈은 작심하고 그곳에 왔다.

민가 한복판에 다다르자 고함을 질러 잠든 이들을 깨우고, 광장으로 불러 모았다.

말도 안 되는 횡포였지만,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지 못했다.

원 기병대의 백호장에게 거역하는 건 죽여 달라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모인 이들을 죽 둘러본 놈은 그중 한 여인을 지목했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으라 했다.

얼굴이 시뻘게진 남편이 앞으로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혹독한 매질이 가해졌다.

놈과 놈이 데리고 온 백 명의 몽골 사내들은 여인의 비명을 즐기고 있었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여 장안에 머물며 술독에 빠져 있을 때다.

비명을 듣고 주루를 나서 민가에 들어섰을 때, 여인의 남편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리고 놈은 상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난 여인을 그 자리에서 범하려 했다.

‘이… 이…!’

그 짐승만도 못한 짓거리를 보는 순간, 술기운은 단박에 날아갔다.

검을 쥔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힘을 주었지만, 검은 뽑혀 나오지 않았다.

유협이란 별호가 부끄럽게도, 그때의 자신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아악!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육욕에 찬 더러운 손길이 여인을 탐했지만,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고개를 내리깐 채 눈을 꾹 감고, 이 지옥 같은 시간이 끝나길 기도할 뿐이었다.

핏발이 선 눈으로 부들부들 떨며 굳어버린 몸을 움직이려 애쓰고 있을 때.

촤아악!

빛이 번뜩이고, 낄낄대던 기병들의 육신이 갈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살육을 행하는 그것은 하늘이 내린 구원의 손길이었다.

“감히 어떤 새끼가…!”

원 기병대의 백호장.

백전으로 다져진 몽골 기병대 백 명을 이끄는 백호장은 고르고 고른 전사들이다.

순식간에 반전한 놈이 십칠식 참마도법을 뿌렸지만, 단호한 검 끝은 일격에 도를 깨부쉈다.

쩌저정! 푸화학!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더운 김을 피워 올리며 달빛을 채색했다.

“웨, 웬 놈이냐!”

“백호장! 백호장이 당했어!”

“빌어먹을 한족 새끼가 감히! 죽여어어어!”

눈이 뒤집힌 몽골 병사들이 달려들고,

“누구라도 좋소! 여인을 부탁하오!”

사내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흔들었다.

“제, 제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홀린 듯이 나서서 여인을 안아 올렸다.

짧은 눈빛이 교차하고, 등 돌린 사내가 빛을 뿌렸다.

“차핫!”

백호장을 죽인 순간부터, 편히 잠들 날은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다.

수배서가 나붙고, 추격대가 끊임없이 뒤를 쫓으리라.

하지만 한 점의 흔들림도 없다.

적들에게 망설임 없이 달려드는 그의 뒷모습은 진실로 눈부셨다.

여인을 업고 스무날을 내리 달려 섬서를 벗어났다.

일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지만, 추격대가 구성된다면 여인을 쫓을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

아니, 틀림없이 그리될 것이다.

긴 여정 끝에 황실에 반기를 든 세력들이 득세한 호남까지 이르렀고, 그제야 벽에 붙은 수배서를 통해 그의 정체를 알게 됐다.

점창제일검 여휘.

자신의 인생을 바꾼 남자의 이름이었다.

“기억하고말고! 자네가 나서지 않았다면 여인이 해를 입었을 걸세. 근방에 있던 병력이 끝도 없이 몰려왔거든. 내 한 몸 빼내기도 힘든 상황이었네. 지금 같은 시대에 약자를 위해 목숨을 건 협객의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겠나!”

여휘가 환하게 웃으며 원승의 두 손을 맞잡았다.

‘부끄럽구나.’

극심한 부끄러움이 감격을 뒤덮었다.

죽음이 두려워 나서지 못한 채 떨고 있었던 걸 대협은, 아니, 여 장로님은 알고 계실까.

고개를 숙인 원승이 실상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장로님. 저는 그때 목숨이 아까워 떨고 있던 못난 놈입니다.”

그 말에, 여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당연한 걸세. 그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결국 자넨 그녀를 위해 나섰지 않나.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어깨를 펴게.”

흐뭇한 웃음이 원승을 향했다.

수년이 흘러, 존경하는 무인을 대면한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데, 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칭찬한다.

원승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다스리기 힘들었다.

“들을 이야기가 많겠군. 어쩌다가 자네가 점창에 입문한 건지. 그 여인은 어찌 되었는지. 오…! 자네의 표정을 보니 그녀가 잘 있다는 건 알겠구먼.”

“아버지. 원 사제와 아는 사이셨어요?”

눈을 동그랗게 뜬 여규가 여휘와 원승을 번갈아 봤다.

“허허… 정말 할 말이 많겠구나.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다니! 호르찰 총독의 문제로 정신이 없었는데, 오늘은 좀 쉬어야겠구나. 규야, 술을 좀 내오너라.”

“네. 아버지.”

이야기가 꽃피고, 고적했던 모옥에 온기가 들어찬다.

쌓였던 시간을 녹여내는 세 명은 밤을 꼬박 새우며 대화를 지속했다.

다음 날.

술상 아래 잠든 여규를 보며, 여휘는 말했다.

“그랬군. 그랬어.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구나. 네가 우리 규를 정말 많이 도와주었어.”

“아닙니다. 장로님. 오히려 사형 덕분에 제가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사일검이라고 했던가요? 장로님께서 보셨어야 합니다. 이 어린 나이에 힘든 시간을 이겨내며 홀로 쌓아 올린 무예를요.”

밤을 지새우며, 서로 간의 관계를 정립한 여휘와 원승이다.

원승을 대하는 여휘의 말투는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규에겐… 미안한 마음뿐이다. 난 항상 거창하게 대의를 논했지만, 가장 보듬어야 할 아들을 방치한 못난 아비야. 이렇게 잘 커준 게 대견하면서도 마음이 아프구나.”

“장로님. 사형은 항상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돌아오시리라 믿고 있었고요. 그리고 결국 그 믿음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아들을 바라보는 여휘의 눈이 아련해졌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생각을 정리한 듯 여휘가 고개를 들어 원승과 눈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에는 어떤 결심이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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