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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26화 (126/463)

126화

“승아. 난 황실에 메인 몸이다. 호르찰 총독의 일을 겸해 처음으로 휴가를 받아 내려왔지만, 다시 복귀해야 해. 그 전에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규를 붙잡고 가르칠 생각이다.”

잠시 말을 멈춘 여휘가 한층 또렷해진 빛으로 원승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유립이의 가능성을 보았다. 최전선에 뛰어들어 연노에 노출된 제자들을 살렸다는 이야기도 들었지. 녀석은 조금만 다듬으면 비상할 재목이야. 규와 유립. 남은 시간 동안 그 둘을 집중적으로 지도할 것이다.”

“…….”

그것은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다.

곧 다가올 희열을 준비하며, 원승의 모든 감각이 여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거기에… 너도 함께하자꾸나.”

생존

살을 도려낼 듯한 칼바람이 밀어닥친다.

터진 입술 사이로 핏기가 비치고, 오랫동안 한기에 노출된 피부는 쩍쩍 트고 갈라졌다.

손을 뻗으면 해를 움켜쥘 수 있을 것만 같은 고산지대.

강피가 손상을 입을 만큼 매리설산(梅里雪山)의 추위는 혹독했다.

“삐아아악!”

날카로운 맹금류의 울음이 가와격박(伽瓦格博)을 둘러싼 대기를 뒤흔들었다.

태자십삼봉(太子十三峰).

구름을 뚫고 치솟은 열세 개의 봉우리 중에서도 장족들이 설산의 신이라 칭송하는 가와격박은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헉, 헉, 허억…!”

자그마한 두 발이 만년설의 표면을 디딘다.

살포시 내디딘 발걸음에 고양이의 사뿐함이 깃들고, 스치듯 나아가는 보행에는 구름의 유유함이 담겼다.

고양이 걸음. 그리고 구름 걷기.

자연을 모방한 그것은 두말할 여지없는 와족의 운신술이었다.

와르릉―!

그토록 조심했음에도 무너진다.

빙하가 갈라져 생긴 균열의 틈.

멀쩡해 보이는 눈밭 아래로, 천 길 낭떠러지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파아앗―

발이 전면을 디디는 순간, 수직으로 침투시킨 자연기가 눈 속을 헤집는다.

공격이 아닌, 탐색을 위한 뿌리 내리기의 응용.

추락이 의심되는 지점이면 체중을 흩뜨려 빠르게 주파하고, 밟아도 되는 곳이면 운신술을 거둔다.

한 줌의 기력이라도 아끼기 위해 몸에 밴 습관이었다.

만년설로 뒤덮인 천험의 봉우리는 세 가지 기예를 동시에 펼치면서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험지였다.

“삐아아악-!”

최악이라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더한 밑바닥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귀청을 찢는 울음이 메아리치고,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순백의 독수리가 양익을 폈다.

눈보다도 새하얀 깃털은 설산을 제패한 제왕의 상징일지니.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냉기를 가르며, 거조가 내리꽂혔다.

퀘에에엑―!

어지간한 범 정도는 가뿐히 낚아챌 조족(鳥足)이 열리고, 새카만 발톱은 사냥감의 육신을 파고들 채비를 마쳤다.

휘어지며 곡선을 그리는 발톱은 표적을 찢어발길 사신의 낫과 같았다.

“칫!”

위치가 좋지 않다.

눈 밑을 훑어 내린 자연기는 지나온 길을 제외한 사방이 낭떠러지라 말한다.

‘설마… 일부러 이리로 몰아온 건가?’

움치고 뛸 길이 막힌 소녀의 얼굴이 굳었다.

‘그렇다면!’

좋다.

슬슬 승부를 낼 때도 됐지.

정면으로 받아주마!

꾸욱-

깊게 낮춘 자세는 힘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대응책이다.

단단히 고정한 하반신이 육신을 지탱하고, 오므린 발가락이 눈 아래의 빙판을 더듬는다.

뿌드득! 콰콱!

힘을 집중한 열 개의 발가락이 빙판을 부수고 틀어박혔다.

외통수?

그렇다면 이쪽도 목숨을 건 배수진을 친다.

소녀의 손가락이 구부러지며 무언가의 형상을 그려냈다.

올빼미 사냥?

아니다.

다섯 손가락 끝을 오므려 맞댄 형태가 아니다.

손아귀에 담긴 구체를 움켜쥐듯.

상정한 표적을 힘주어 할퀴듯이.

손톱이 있는 손가락 끝마디를 한 번 더 꺾은 그것은 날아드는 거조의 발톱을 닮아 있었다.

‘독수리 사냥.’

부아악―!

하늘에서 내리긋는 거조의 발톱과 지면에서 긁어 올리는 소녀의 손가락이 맞부딪혔다.

쩌저정!

강철로 된 병장기가 충돌하는 기음이 설산의 대기를 흔들고, 공격에 실패한 독수리가 고공으로 되돌아갔다.

“삐아아아악―!”

길게 빼는 울음소리.

약이 오른 게 틀림없다.

분명히 다시 온다.!

한 발을 틀어 다시 자세를 잡자마자 수직으로 하강한 흰 독수리가 소녀를 덮쳤다.

쩌어엉!

“큭!”

똑똑한 놈이다.

자세를 고정시킨 걸 눈치채고, 사선이 아닌 수직으로 내리찍는다.

가속도는 물론이고, 전달되는 체중을 흘릴 방도가 없다.

거조의 무게를 고스란히 받아낸 육체가 빙판을 깨고 틀어박혔다.

“삐아악!”

좌, 우, 그리고 상.

독수리의 공격 수단이 발톱만 있는 건 아니다.

발톱이 정신없이 쇄도하는 가운데 날카로운 부리가 날아든다.

머리맡에서 체공 상태를 유지하며 공격을 쏟아내는 놈은 이미 단순한 짐승이라 보기 어려웠다.

촤아악!

“아악!”

결국, 내주고야 만다.

좌측 어깨에 그어진 네 개의 고랑에서 붉은 샘물이 솟구쳤다.

퍼얼럭―!

제아무리 날개가 튼튼한 녀석이라도 초저공에서 장시간 머무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너지는 소녀의 모습에 만족한 듯 녀석은 창공으로 날아오를 준비를 했다.

‘당하기만 할 것 같아?’

무너져 내리던 소녀의 눈이 번뜩였다.

곱상한 외모, 영리해 보이는 눈동자에 설산의 추위를 녹일 강렬한 투지가 깃들었다.

“하아앗!”

덥석!

쭉 뻗은 오른손이 독수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비상을 시작하던 녀석이 깜짝 놀라서 울음을 토했다.

“삐이익?!”

뿌드드득-!

덩치만큼이나 엄청난 힘이다.

무릎까지 처박혔던 소녀의 다리가 빙판을 부수며 뽑혀 나오고, 통째로 딸려 올라간 그녀가 하늘 여행을 시작했다.

“너도 맞아봐!”

곧게 치솟는 왼 다리는 땅 위를 거니는 피조물이 날짐승을 격추하기 위해 고안한 대지의 창이라.

비격 날짐승 떨구기가 독수리의 머리통에 깔끔하게 틀어박혔다.

빠악!

‘가벼워!’

항상 이게 문제다.

보편적인 타격으로 규격 외의 짐승들을 쓰러뜨리기엔 결정적인 힘이 모자란다.

제법 충격을 받았는지 휘청였지만, 독수리는 머리를 흔들며 금세 자세를 잡았다.

‘특화시킨 나만의 능력!’

남자들처럼 묵직한 한 방을 노려서는 안 된다.

성년식을 떠나오기 전, 할아범이 조언했듯 칼날 같은 예리함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밀함으로 승부한다.

모든 날짐승의 취약점.

오므려 모은 다섯 손가락이 일점을 겨냥하고, 최속의 일격이 대기를 찢었다.

“타아앗!”

푸욱!

올빼미 사냥, 강습이 흰 수리의 날갯죽지를 꿰뚫었다.

“삐이아아아악!”

고막을 괴롭히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고통에 몸부림치던 녀석이 자유로운 오른쪽 발톱을 휘둘렀다.

‘이건… 죽는다!’

한 손으로 매달려 있는 상황이라 회피 기동이 불가능하다.

몸을 흔들어봤자 움직일 수 있는 궤도도 한정돼 있다.

방법은 하나뿐.

‘제길!’

손아귀의 힘을 푼 순간, 육신은 맥없이 추락했다.

눈 아래로 드넓은 설원이 시시각각 다가온다.

한쪽 날개를 다친 흰 수리가 빙글빙글 돌며 떨어져 내리는 게 보였다.

꽝!

콰아아앙!

바람만이 방문하는 고요한 설원에 눈 기둥이 치솟았다.

“컥! 커헉…!”

진탕된 내장이 격통을 선사한다.

가슴이 콱 막혀 호흡을 내뱉는 것조차 쉽지 않다.

겨우 고개를 돌린 곳엔 점점이 뿌려진 피들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윽…! 으으…!”

얼마나 정신을 잃은 걸까.

얼어 죽지 않은 걸 보면 그리 긴 시간이 흐른 건 아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리는 통증에 저녁노을은 신음했다.

“추워…….”

손가락과 발가락은 꽝꽝 얼어서 감각조차 없다.

조금만 늦었어도 동상으로 잘라내야 했을 거다.

황급히 끌어올린 자연기를 사지 끝까지 휘돌려 죽어가는 감각을 붙든다.

겨우 몸을 일으킨 소녀가 이를 악물고 전진했다.

‘운이 좋았어…….’

추락한 곳이 빙하의 균열 위였다면?

절대 살아남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마찬가지다.

끔찍한 고통에 목소리도 나오지 않지만, 몸 성히 돌아와 이렇게 생각을 이어갈 수 있다는 건 천운이었다.

눈앞에서 일렁이는 모닥불을 보며, 노을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감각이… 돌아오질 않네.’

새우처럼 구부린 자세로 누워, 모닥불 앞까지 바짝 붙었다.

양손과 양발을 불에 닿기 직전까지 들이밀었지만, 감각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 아파…….’

추락 시에 받은 충격과, 흰 수리의 발톱에 채인 상처에서 끔찍한 고통이 배어 나왔다.

이 몸으로 은신처까지 돌아와서 불을 피운 게 기적이다.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보던 노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파… 추워… 외로워…….’

아무도 없다.

성년식이 시작되자마자 달려온 매리설산은 인간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설산의 아래쪽에는 소수부족들이 거주한다.

하지만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산의 중턱부터는 야생 짐승들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가와격박.

매리설산의 최정상에서 뻗어 나가 구름 위까지 치솟은 봉우리 주변은 그야말로 선택받은 생물들에게만 생존이 허락된 공간이었다.

하나같이 강인하고, 예외 없이 강력하다.

봉우리가 시작되는 지점에 빼곡하게 펼쳐진 원시림은 맹수들의 집단 서식처였다.

‘반년이 걸렸지.’

하루하루가 핏물에 잠긴 나날이었다.

흑곰, 호랑이, 금전표범, 거대 원숭이…….

저마다의 영역을 구축한 놈들을 모조리 부수고 다녔다.

고유의 이름은 물론이고, 수식어를 획득할 만큼 강한 녀석이 없음에도 반년이란 시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수림을 평정할 수 있었다.

그만큼 강하다.

고산의 혹독한 환경에서 생존을 일군 놈들은 저 아래 서식하는 놈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인했다.

‘후후… 비아가 보면 기겁을 하겠네.’

곱다 못해 윤기가 흐르던 피부는 온데간데없다.

보기 흉하게 터지고 갈라진 살가죽은 건기의 메마른 대지를 보는 것 같았다.

‘피부야 산을 내려가면 회복이라도 되겠지만…….’

몸 곳곳을 가로지르는 징그러운 흉터들.

이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전사로서는 영광된 흔적일지 몰라도, 한 명의 여자로서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지만, 상처들을 볼 때마다 열다섯 소녀는 마음이 아팠다.

‘응?’

자연기가 감지한 기운.

먹잇감을 노리는 야생 짐승의 살기다.

최소 몇백 년은 됐음직한 고목 아래, 동굴처럼 패여 있는 자신의 은신처로 손님이 찾아온 건 오랜만이었다.

“크르르…….”

‘잿빛 늑대!’

이놈.

아니, 이놈들.

알고 찾아온 거다.

자신이 크게 다쳐서 약해졌다는걸.

멀쩡할 땐 기세에 눌려 접근도 못 하던 놈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나 보다.

하나로는 별거 아니지만, 모이면 원시림에서 가장 까다로운 녀석들이 둥그렇게 뚫린 그루터기 입구로 접근하고 있었다.

‘손… 발… 움직인다!’

감각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휘두를 순 있다.

문제는 만신창이가 된 육신을 들어 올리기가 힘들다는 것.

빠르게 전략을 택한 노을이 그대로 죽은 듯이 누워 눈을 감았다.

투벅, 투벅.

‘이 기운은… 새로운 우두머리구나.’

원시림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이놈들도 당연히 손봤다.

일격에 우두머리의 숨통을 끊어놓자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던 놈들이다.

보아하니 그새 새로이 대장을 뽑은 모양이었다.

수십의 늑대들 중 가장 커다란 기운을 지닌 놈이 한 발 한 발 다가오고 있었다.

“크르릉…….”

‘탐색.’

“커엉! 컹!”

‘위협.’

“크르르르…….”

‘확신. 그리고 준비.’

“크아아앙!”

‘온다!’

소녀의 눈이 번쩍 뜨이고, 덮쳐오는 잿빛 그림자를 포착했다.

쾌속하게 뻗어진 왼손이 표범만 한 늑대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퍼어억!

“끼이잉…! 낑! 할딱, 할딱…….”

짧은 비명과 잠시간의 헐떡임 끝에 늑대는 무너져 내렸다.

“커엉!”

우두머리를 따라 진입했던 녀석이 노을의 배후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똥개들이 어딜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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