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휘리릭!
몸을 일으키긴 힘들다.
감각을 되찾은 두 다리로 달려드는 녀석의 몸통을 휘감아 등 뒤로 타고 올랐다.
‘목뼈를 지탱하는 관절.’
양손이 빠르게 목뼈를 훑어 오르고, 그간 사냥한 놈들을 해체하다시피 하며 찾아낸 취약점을 짚었다.
우두두두둑!
뼈가 뒤틀리는 섬뜩한 기음.
늑대의 턱이 하늘로 돌아갔다.
털썩.
여기까지.
두 놈을 가뿐히 제압한 지금, 놈들이 위축된 틈을 타 기세로 위압한다.
소녀의 눈에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꺼져. 다 죽기 싫으면.』
어둠을 불사르는 모닥불.
그리고 불꽃보다 짙게 타오르는 한 쌍의 푸른 광망.
스멀스멀 번지는 살기가 그루터기 안으로 진입하려던 늑대들을 멈춰 세웠다.
“끄… 끼잉… 끼이이잉…….”
흔들리는 눈동자.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
약육강식의 철칙에 충실한 야수들이 고개를 황급히 내리깔았다.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마지막 한 놈까지 추적해서 씨를 말릴 거야.』
의지로 화해 꽂혀 드는 언령이다.
감당할 수 없는 위협에 굴복한 늑대들이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후우우…….”
상처가 위중해서 한꺼번에 달려들면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과 마찬가지로 야생의 짐승들에게도 허세는 통한다.
기운을 쏟는 바람에 탈진한 노을이 죽은 우두머리 늑대에게 기어갔다.
“덩치가 크니 이놈 가죽은 바닥에 깔고…….”
스걱, 스걱, 스슥-
“요놈 가죽은 덮고.”
안 그래도 추웠는데 잘 됐다.
소도 하나로 능숙하게 가죽을 벗겨 추위를 해결한 노을은 이번에는 배를 채웠다.
“으적, 우적.”
느긋하게 굽고 있을 여유는 없다.
바닥난 체력을 채우고, 상처를 회복하려면 당장 먹어야 한다.
소녀는 두툼하게 베어낸 늑대의 생고기를 게걸스럽게 씹어 삼켰다.
“목말라…….”
물을 찾아 나설 기력도, 인내심도 없다.
늑대의 혈관을 잘라낸 노을은 뿜어져 나오는 피에 입을 가져다 댔다.
“꿀꺽, 꿀꺽.”
추위, 목마름, 허기.
고맙게도 목숨을 노리고 온 습격자가 가장 급한 세 가지를 모두 해결해줬다.
얼굴과 몸이 늑대의 피로 물든 소녀는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루터기의 하나뿐인 입구 저 멀리, 안광을 죽인 눈동자가 소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단한 꼬맹이야.’
사내는 고목이 드리운 음영에 완벽하게 녹아 있었다.
나무 위에 자리 잡은 것도 아니다.
맹수들이 지나는 길 한복판, 나무둥치 옆에 편히 기대앉았다.
하지만 어떤 짐승도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결, 일체화, 동조.
종을 막론하고 동물은 시야에 잡힌 것들을 완벽하게 인지하지 못한다.
대략적인 얼개를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 특징적인 부분을 선별하여 뇌에 전달할 뿐이다.
스쳐 지나는, 흔하디흔한 풍경.
남자는 철저하게 배경의 일부로 녹아들었다.
“끼잉, 낑!”
보고도 보지 못한다.
후다닥 도망치는 늑대무리가 사내의 곁을 지나쳤지만, 어떤 녀석도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이상의 경지가 존재할까라는 의문이 드는, 절정의 은신술이었다.
‘저 나이에 세 가지의 기예를 동시에 펼치는 것도 기가 막히지만… 매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어. 그리고 실행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저건… 본능이 아니야. 두뇌, 행동력, 그리고 의지. 대단한 재목이야.’
눈을 좁힌 사내가 쓰러지듯 잠든 노을을 찬찬히 살폈다.
상당한 거리가 있고, 모닥불이 시야를 가리지만 문제 될 건 없다.
마음만 먹으면 흔들리는 불꽃 사이로 노을의 땀구멍 하나까지 살필 수 있는 안력을 지녔으니까.
‘전쟁이… 슬슬 마무리됐겠군.’
서른셋의 나이.
수리의 눈 차기 수장으로 확실시되는 ‘새벽 어스름’이 몸을 일으켰다.
성년식을 시작한 아이들을 살피다가 문산으로 집결하라는 그믐의 지령을 확인했다.
가지 않았다.
갈 수 없었다.
자신이 맡은 아이들에게 적이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몸은 하나였고, 노을을 포함한 세 명의 아이들은 각기 세 방향으로 찢어졌다.
마침 지켜보고 있던 아이에게 접근한 놈들을 일격에 쳐 죽이고, 아이들을 숨기라는 그믐의 지령을 확인하기도 전에 자체적인 판단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를 숨긴 후엔 위치가 발각되건 말건 미친 듯이 질주했다.
서쪽에서 동쪽 끝까지.
다른 아이의 흔적을 쫓아 죽을힘을 다해 달렸지만, 너무 늦었다.
적들에게 살해당한 소녀의 시체는 짐승들이 훼손한 후였다.
처참한 시신을 수습하고, 지체 없이 북상했다.
2인 1조로 구성된 무리 7개, 총 열네 명.
마지막으로 노을을 지켜봤던 곳에 이를 때까지 마주친 적들의 숫자였다.
여과 없이 분노를 토해내며 보이는 족족 멱을 땄다.
‘어디까지 간 거냐!’
흔적을 쫓아 도착한 곳은 운남 서북단 끝자락에 위치한 매리설산이었다.
이야기만 들었지, 처음 와보는 그곳은 운남 전역에서 가장 높은 지대답게 혹독한 기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뭐냐. 여길 왜? 설마 이 녀석…?’
일 년 전 너른 하늘이 방문하기 전까지, 한 번도 인간의 발길이 닿은 적 없는 곳이다.
새하얀 순백의 독수리가 제왕으로 군림하는 땅이다.
노을의 흔적은 소수부족들이 신의 영토라 여기며 두려워하는 가와격박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정신 나간 꼬마가…!’
흔적으로 보아 봉우리 밑에 펼쳐진 원시림에 자리를 잡은 듯했다.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려서일까.
다행히 적의 습격을 받은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뒤통수가 뒷목에 닿을 때까지 올려다봐야 하는 천험의 봉우리.
그 꼭대기에선 봉우리 밑자락에서도 느껴질 만큼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게… 하얀 깃!’
야생의 군림자들 중 고유의 이름이 붙은 녀석에게 접근한 건 처음이었다.
설마 푸른 눈보다 세진 않겠지만, 성향이 다르다.
전투나 사냥이 아니면 기운을 갈무리하는 푸른 눈과 달리 하얀 깃은 본신에 지닌 기운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최소. 최소 어둔 날개급이다. 아마도 그 이상!’
믿기지가 않는다.
홀로 각성을 이루어내고, 그믐과 반백 년을 지내며 성장한 어둔 날개를 능가하는 힘이라니.
과연 붉은 발톱과 더불어 운남의 제왕이라 칭송받을 만한 야수였다.
‘……진입해야 하나.’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할아범을 제외하면 수리의 눈 최고의 전사로 꼽히는 자신에게 도주부터 떠올리게 만드는 상대였다.
장담할 수 있다.
마주치면.
무조건 죽는다.
어스름은 진심으로 봉우리를 오르기 싫었다.
‘나보다도 한참 약한 녀석이 무슨 배짱으로?’
상대의 막강함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살이나 다름없는 짓을 할 리 없으니까.
어찌 됐든 노을의 흔적은 가와격박 정상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건 이미 하얀 깃의 영토에 제대로 발을 들였다는 뜻이었다.
‘우라질 꼬맹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어스름이 흰 독수리의 영토에 발을 들였다.
“차핫!”
매섭다.
날카롭다.
정확한 동시에, 정밀하다.
노을이 쏟아내는 공격을 보며, 어스름은 진심으로 놀랐다.
“삐이이익!”
하지만 상대는 더욱 강했다.
날개를 쫙 펴는 순간, 시야를 가득 메워버리는 흰 수리는 열다섯 소녀로서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가만. 하얀 깃이… 아냐?’
자신에게 두려움을 선사했던 기운은 다른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녀와 흰 수리가 싸우고 있는 설원 너머, 새파랗게 솟은 빙벽 위.
날개를 접은 설산의 주인이 얼음을 깎아 만든 조각상처럼 서 있었다.
‘저놈이다…!’
저런 현상.
푸른 눈을 제외하곤 본 적이 없다.
잡티 하나 없는 순백의 깃털 위로 유형화된 자연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는 도도한 모습과 접근을 불허하는 강대한 위용은 과연 제왕이란 호칭이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노을이와 싸우고 있는 녀석도 설산 아래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커다랗지만, 그 두 배는 됨직한 크기다.
기형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어둔 날개를 제외하면, 저렇게 큰 새는 본 적이 없었다.
‘괴물이다, 저건……. 한데… 왜 움직이지 않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얀 깃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렇다면 기회가 있다.
저놈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노을이를 데리고 여기를 빠져나가…!
‘큭!’
눈동자가 휘돈다.
싸움에 개입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빙상(氷像)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새하얀 얼음 조각상 위에 찍힌 점 두 개가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발각… 됐나…!’
차디찬 만년설 한복판에 몸을 파묻고 있음에도.
식은땀이 등줄기를 적시며 줄줄 흘러내렸다.
허튼짓 말고 가만히 있어라.
눈으로 전하는 제왕의 의지였다.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를 가르며 날아든 경고에 어스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왜… 죽이지 않는 거지? 원시림에 접근했다는 이유만으로 소수부족들을 몰살시켰던 놈이…! 그래서 족장님이 여기까지 오신 건데.’
어쨌든 천만다행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얀 깃은 당장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기회를 봐서 노을이를 구한다.
하지만 눈을 돌려 노을을 봤을 때, 어스름의 표정은 그대로 굳었다.
“비켜어어어!”
투지로 점철된 눈빛.
소녀는 눈앞의 적을 보지 않고 있었다.
앞을 막아선 적과 싸우면서도 흘깃흘깃 눈이 돌아간다.
그 눈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 멍청이가! 역시 하얀 깃을 노리고 여기까지…!’
저 무모한 꼬마는 하얀 깃에게 도전하려고 온 게 확실했다.
‘턱도 없는 소리!’
하얀 깃과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을 막아선 흰 수리도 제압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하얀 깃이 나서는 순간, 변변찮은 반항도 못 해보고 살해당할 게 뻔했다.
‘아냐. 노을아. 저놈은 안 된다.’
은신술 하나만은 그믐보다도 뛰어나다는 자신을 감지했기 때문에?
아니다.
그냥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저놈은 대적이 불가능한 괴물이라는 걸.
딱 하나다.
신수(神獸)라고 해도 믿을 만큼 완벽한 자태를 깨뜨리는 흠결이 딱 하나 있었다.
뿌리부터 부러져나간 발톱 한 개.
누구의 작품인지는 안 봐도 훤했다.
‘족장님은… 저런 걸 혼자서 때려눕힌 건가.’
넉넉하고 부드러운 모습에 익숙해져 잊고 있었다.
그를 인간의 범주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걸.
당치도 않은 생각이지만, 노을은 너른 하늘의 뒤를 이어 하얀 깃을 굴복시키고 싶은 듯했다.
‘저놈을 반려수로 삼겠다는 거냐?’
불가능한 꿈이다.
천하의 그믐조차 성년식 내내 싸워서, 겨우 수식어 붙은 놈 하나를 제압했을 뿐이다.
하얀 깃을 저 나이에 쓰러뜨리려면 아무리 못해도 너른 하늘만큼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림없는 소리.’
개입도, 도주도 불가능하다.
하얀 깃이 움직이지 않기를.
노을이 흰 수리에게 죽지 않기를.
이만 포기하고 달아나기를…….
어스름은 몸이 식어가는 것도 잊고, 소녀를 염려하며 애를 태웠다.
‘배가 고프군.’
노을이 늑대들을 쫓아낸 걸 확인하고, 어스름은 먹거리를 구하러 나섰다.
설원에서 벌어진 싸움을 지켜보느라 오늘은 아무것도 먹질 못했다.
어둠이 깔리고 본격적으로 사냥에 나선 흑살사 한 마리를 낚아챈 후, 머리를 비틀었다.
으드득-
운남 최고의 독물답게, 흑살사의 독은 와족의 내독성으로도 완전히 해소하긴 힘들다.
그냥 먹어도 큰 문제는 없지만, 속이 불편해지는 걸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뱀의 머리를 뜯어낸 그가 어둠보다 새카만 몸통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몇 번째지?’
노을의 흔적을 쫓아 처음 가와격박에 오른 날.
꼼짝없이 죽을 줄만 알았다.
하지만 하얀 깃은 끝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고, 노을은 흰 수리와 반나절을 꼬박 싸웠다.
힘의 열세를 메꾼 건 전략이었다.
타고난 육체에 의존해 본능적으로 달려드는 흰 수리는 공격 방식이 한정되어 있었고, 노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걸 깨달았다.
공격을 흘리며 날카롭게 꽂아 넣는 소녀의 반격에 흰 수리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피로 물들고 체력이 바닥난 후에야 노을은 이를 뿌드득 갈며 후퇴했다.
‘이튿날 또 올라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