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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28화 (128/463)

128화

싸울 수 있다는 판단이 들면, 노을은 주저 없이 정상으로 향했다.

그렇게 서너 달.

하얀 깃이 고요히 지켜보는 가운데, 한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짐승은 목숨을 건 사투를 셀 수 없이 벌였다.

규칙 따윈 없었다.

만년설이 깔린 곳이 싸움터일 뿐, 노을은 그야말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시도했다.

함정, 도구, 매복, 유인, 기습…….

대결이 아니다.

사냥이다.

노을은 하얀 깃에게 가는 길을 막는 놈을 치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었다.

‘강해졌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렇다.

노을은 강해졌다.

처음 봉우리에 올랐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발 한 번만 삐끗해도 황천으로 가는 최악의 싸움터에서, 소녀는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다.

흰 수리도 강해졌다.

힘에만 의존하던 놈이 싸움의 요령은 물론이고, 나름의 기술까지 터득했다.

최근엔 발톱과 부리에서 간간이 푸른 기운이 번뜩이고 있었다.

의식은 못 하는 것 같지만, 자연기를 이용하고 있단 증거였다.

‘오늘은 특히 놀라웠어.’

기습을 위해 눈 밑으로 다가가는 노을을, 흰 수리는 모른 척 기다렸다.

그리고 역공을 가해 노을을 물러서게 했다.

문제는 거기부터.

어떻게 알았는지 녀석은 만년설 밑에 숨겨진 낭떠러지의 위치를 파악하고, 노을을 몰아넣었다.

지능이 싹텄단 증거였다.

‘아마도 그놈…….’

개화하는 과정을 지켜본 적은 없지만, 확실하다.

자연기의 자체적인 운용과, 발아한 지능.

노을을 이기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

그놈은 조만간 각성한다.

‘노을이가 엄청나게 강해졌지만, 각성 전과 후의 야수는 아예 다른 존재야. 그 전에 놈을 쓰러뜨려야 할 텐데……. 근데 흰 수리가 정말 위험해져도 하얀 깃이 두고 보려나? 그러고 보니… 하얀 깃은 왜 계속 가만히 있는 거지?’

흑살사를 씹던 턱이 멈췄다.

‘가만…….’

퍼뜩 떠오른 생각이다.

그 놀라운 발상에 어스름의 눈이 커졌다.

노을이와 몇 달째 사투를 벌이고 있는 흰 수리.

어찌나 지긋지긋했는지 노을이 흰 거머리라고 이름 붙인 그놈.

눈치로 보아 하얀 깃의 새끼가 분명하다.

‘하얀 깃이 영토를 침범한 노을이를 가만히 놔두는 이유…….’

제아무리 뛰어나도 짐승이다 보니 ‘목적’이란 단어를 결부시키지 못했다.

푸른 눈이 그렇듯 하얀 깃도 어지간한 인간 이상의 지능을 갖췄을 텐데.

‘혹시… 제 새끼를 키우는 건가? 노을이를 이용해서?’

흑살사를 쥔 손은 이미 내려가 있었다.

‘분명해. 하얀 깃, 이놈. 새끼를 키우고 있는 거야!’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다면 왜? 이놈이… 설마…?!’

평생토록 패배를 몰랐던 설산의 제왕.

처음으로 인간에게 패해 굴복했고, 자랑하던 발톱을 빼앗겼다.

그 드높은 자존심에 금이 갈 만하다.

새끼를 키운다.

전력을 증강한다.

……복수한다?

비약일 수 있다.

그럴 확률이 높다.

각성한 새끼 하나가 늘어난다고 해서 너른 하늘에게 복수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자아를 갖추고 독립한 놈이 아비 말을 들을지도 의문이다.

‘…….’

모르겠다.

하얀 깃의 목적을.

왜 진작 떠올리지 못했지?

좋다. 아무튼 그렇다 치자.

그럼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새끼가 각성한 후에 말이다.

‘노을이를… 살려둘까?

어스름은 더 이상 식욕이 일지 않았다.

이름

휘영청 뜬 달이 투명한 빛을 내리는 밤이다.

피부에 스미는 쌀쌀함이 계절의 변화를 알려왔다.

푸른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친 숲의 한복판.

깊이 잠든 백호에 기댄 채, 마른 비가 물었다.

“아버지. 달이 누나는 왜 그랬을까요?”

낮은 숨을 내쉬는 별비의 옆에는 어마어마한 몸집의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푸른 눈의 앞발을 베고 누운 너른 하늘이 답했다.

“취했던 걸 거다.”

“취해요?”

“그래. 사람에, 그리고 사랑에.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은은한 달빛에 취한 걸까.

매서운 눈이 들었다면 술 취했냐고 인상을 찌푸릴 소리를, 너른 하늘은 태연히 풀어놓았다.

“그게…….”

아직 이성을 사랑해본 적 없는 마른 비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설령 그 사람에게 치명적인 배신을 당했다고 해서 사리분별을 못할 만큼 이성을 잃는 게 가능한 일일까.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까지 큰 실수를 하진 않지. 허나 그런 사람도 있는 법이다. 달이는 처음이라 더욱 그랬을 테고.”

“이야기를 들었어요. 호국영이란 사람이 누나를 이용했다고.”

“그래. 그래서 사랑의 대상이 중요한 거다. 만약 상대가 좋은 사람이었다면 달이는 누구보다 행복했을 수도 있지.”

사랑을 보낼 대상.

마른 비는 문득 궁금해졌다.

“아버지는요?”

“음? 뭐가 말이냐.”

“아버지는 행복했어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해주지 않으셨잖아요. 어머니는 좋은 분이었나요?”

“…….”

너른 하늘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아픈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먼저 어머니 대지의 품으로 떠난 그녀는 너무나 좋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만큼 떠올리는 게 아팠다.

“……세상에 둘도 없는 여자였다. 네 엄마는.”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어미의 얼굴도 보지 못한 아들에게 너의 어머니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녀에 대해 말한다는 건 필연적으로 비아가 마음 아플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

“그럴 줄 알았어요.”

아들은 웃었고,

“그래. 네 엄마와 함께 한 시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다.”

아비는 아련한 추억에 젖었다.

하지만 이어진 마른 비의 말에, 너른 하늘은 곧바로 추억에서 헤어나야만 했다.

“어릴 때, 외할아버지가 취하셔서 했던 말씀이 기억나요. 저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그건…!”

산모가 출산 중 목숨을 잃는 게 비일비재한 시대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아이의 잘못이 될 수 없다.

허나 하나뿐인 딸을 잃은 아비는 손주의 얼굴에서 딸의 흔적을 읽는다.

그것은 행복하면서도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너른 하늘은 장인이 비아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안다.

그래서 그를 탓할 수 없다.

손주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딸의 얼굴이 힘겨워서 술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서 헛나간 말에 누구보다 죄스러워한 걸 알고 있으니까.

“그건… 절대 너 때문이 아니다, 비아야.”

“아버지는, 그리고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실 거란 걸 알아요. 얼굴도 못 뵈었지만, 아버지가 사랑한 분이라면 분명 그렇겠죠. 저라도 그럴 테니까요.”

마른 비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제 이름, 외할아버지가 지어주셨죠? 오래전이지만 또렷이 기억나요. 취하신 날, 제 손을 붙잡고 미안하다고 우셨어요.”

우기였다.

마른 비가 태어난 날은 장대비가 열대우림을 두드리던 날이었다.

아들도 안아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어미를 안타까워한 것일까.

그녀의 숨이 멈췄을 때, 하늘은 더욱 세차게 비를 뿌렸다.

“으아앙!”

희한한 일이었다.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자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비가 그쳤다.

갑작스레 건조해진 대기는 비가 땅에 닿기도 전에 증발시켜 버렸다.

그리고 하늘 저편에 무지개를 피워 올렸다.

고래로 이상기후는 길흉을 점치는 징조다.

그리고 무지개는 분명 상서로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딸을 잃은 아비는 무지개가 보이지 않았다.

뚝 그친 비와 건조해진 대기.

통곡하던 아비는 상서로움을 배제한 채 불길함만을 읽었다.

“……마른 비. 손주의 이름은 마른 비로 하겠네.”

그건 슬픔에 매몰된 자의 감정적 반응이었다.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양 집안의 어른 중 최고 연장자가 짓는 게 전통이기에 반대할 수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 손주에 대한 비이성적인 미움이 걷혔을 때, 노인은 자책감에 눈물을 흘렸다.

“저를 낳느라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제가 태어난 날은 외할아버지께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큰 날이었겠죠. 어쩌면… 아버지께도요.”

“그렇지 않다, 비아야! 그건…!”

“에이, 그날만큼은 그랬을 수도 있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거 안다니까요.”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거냐?”

담담히 풀어놓는 마음속 이야기들.

마른 비는 여전히 밤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외할아버지께 그 말을 듣고 나서요.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라 그런지 엄청 서럽더라구요. 내가 태어나지 않고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더 행복하셨을까 하는…… 그런 생각.”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그건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 나는 물론이고, 네 엄마가 너를 가졌을 때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 아느냐. 네 외할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네가 있어서 우린….”

“알아요, 아버지. 아무튼 그날 펑펑 울다가 생각했죠. 어머니라면 무얼 바라실까 하고.”

너른 하늘이 어머니 대지에게 귀의한 그녀를 떠올렸다.

자신의 부인이자 비아의 어머니.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했던 여인이다.

그녀에 대해 아들과 처음으로 터놓는 속 깊은 이야기였다.

너른 하늘은 마냥 어리게만 봤던 아들이 어느새 훌쩍 자랐다는 걸 깨달았다.

“제가 행복하길 바라실 거예요. 목숨과 바꿔서 낳은 아들이 서럽게 울고 있으면 슬퍼하실 거 같더라구요.”

“그래, 맞다. 그런 사람이고말고. 네 생각이 맞다, 비아야.”

비아가 마음 아플까 봐 꺼내지 못 했던 이야기.

하지만 아들은 나름의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리고 그건 훌륭한 정답이었다.

“네 어머니와 함께 한 시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때 이상으로 지금이 행복한 건 네가 있기 때문이다, 비아야.”

“……아버지가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할 줄 아시는 건 몰랐네요. 매서운 눈 아저씨가 있었으면 욕을 한 바가지 했겠어요.”

그믐을 비롯한 부족원들이 대화 속에서 심심찮게 언급하는 매서운 눈이다.

그는 자신이 인기가 많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알게 되면 ‘내가 뭘?’하며 눈을 부라릴지도.

“행복한 삶을 살아라.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일생을 누려라. 그게 네 엄마와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다.”

“아! 그 말씀을 들으니까 갑자기 떠올랐어요. 아버지, 저 사실…….”

달빛 아래 흐르는 부자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오붓한 분위기를 깨며 솟아올랐다.

“아저씨?”

“매서운 눈?”

지나가다가 듣고 욕을 하러 온 걸까?

매서운 눈은 검은 수리 전사로 오인할 만큼 소리 없이 다가왔다.

반갑게 맞이하려던 마른 비와 너른 하늘이 주춤했다.

그의 얼굴이 침중하게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둘의 표정도 덩달아 굳었다.

“……매서운 눈, 무슨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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