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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29화 (129/463)

129화

“족장님. 성년식 중인 아이들의 상황 파악이 끝났습니다. 스물한 명……. 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숫자입니다.”

너른 하늘이 질끈 눈을 감았다.

* * *

“다녀올게요.”

마른 비가 씩씩하게 말했다.

매서운 눈이 비보를 전한 지 삼 일.

친구들의 사망 소식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서 아직까지 눈 주위에 붓기가 빠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소년의 음성엔 힘이 묻어났다.

떠난 자와 남은 자.

피지도 못하고 저버린 목숨들이 사무치게 아프지만, 남은 자들은 또다시 삶을 걸어가야 한다.

전쟁을 겪은 마른 비는 이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성년식을 재개할 때가 된 것이다.

“다녀와라.”

너른 하늘이 하나뿐인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별비와 이어진 이상, 마른 비는 성년식의 가장 큰 목표를 달성한 거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전쟁에서 보여준 놀라운 무력.

어지간한 성인 전사를 뛰어넘는 힘이다.

힘을 키우고 야생에서 생존해야 하는 성년식의 과제는 지금의 마른 비에게는 어려울 게 없었다.

‘역대 최연소일지도 모르겠군.’

단순히 반려수를 길들이는 것이라면 더 빠른 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년을 조금 넘는 기간 안에 전사로 인정받을 만한 힘까지 쌓은 자?

아마도 없거나 매우 드물 터다.

‘나는 반대의 경우였지.’

너른 하늘을 비롯한 각 집단의 수장들은 힘은 충분했지만, 반려수를 길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푸른 눈, 어둔 날개, 긴 코, 외톨이.

그들은 지닌 힘만큼이나 막강한 맹수들에게 끌렸고, 놈들을 굴복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가만히 생각하니 별비, 저놈…….’

너른 하늘이 마른 비의 옆에 버티고 선 백호를 바라봤다.

비아만큼이나 독특한 녀석이다.

홀로 각성을 이룬 놈이 싸우지도 않고 인간을 따라나서다니.

‘아니지. 비아가 특별한 거야.’

한동안 대련을 하며 느꼈지만 아들은 비범했다.

단순한 힘의 세기를 떠나 육체의 활용과 전투에 대한 감각이 놀라울 정도다.

그리고 야수를 다루는 기이한 능력.

억압이나 제압이 아니다.

비아가 언령을 발하면 마치 오랜 친구의 부름을 받듯 야수들이 이끌렸다.

‘별비도 그랬겠지.’

온갖 동물들에 둘러싸인 마른 비를 처음 보았을 때, 너른 하늘은 입을 떡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독특한 야수 제어. 너만의 능력이다. 잘 다듬어 봐라.”

“네, 아버지!”

누구도 걸어본 적 없는 길이다.

하지만 너른 하늘은 마른 비가 잘 해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음에 볼 땐 또 어떤 걸 들고 올까.

‘누구 아들인데, 그럼. 이 정도는 해줘야지.’

푸른 눈과 작별하는 별비를 눈에 담으며, 너른 하늘이 말했다.

“칼이빨 호랑이……. 조급해 하지 마라. 육체가 완성되고 힘이 쌓이면 그때 복수해도 늦지 않아. 십 할의 확신이 들기 전까진 싸우지 말거라.”

마른 비가 다시 야생으로 떠나야 하는 이유.

성년식의 기간을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은빛여우와 실바람의 혼은 아직 잠들지 못했다.

검치호의 이름을 듣자마자 눈빛을 번쩍이는 아들을 보며, 너른 하늘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안 듣겠군.’

이런 것까지 자신을 빼닮았다.

자신이라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겠지.

그렇다면 이 이상 말리는 것도 우습다.

차라리 응원해주는 게 나을지도.

“후우……. 이 사고뭉치 녀석. 좋아. 다음에 볼 땐 녀석의 송곳니를 뽑아 오너라.”

마른 비는 당연하다는 듯이 웃었다.

“떠났소?”

새파란 안광을 번뜩이는 노인이 대나무 사이로 걸어 나왔다.

“네, 할아범.”

마른 비가 떠난 방향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너른 하늘이 말했다.

“인사라도 하지 그러셨습니까.”

“뭘 굳이. 돌아오면 볼 터인데.”

어깨를 나란히 한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너른 하늘이었다.

“비아가 그러더군요.”

“……?”

“엄마가 자신이 우는 걸 보고 싶어 할 것 같지는 않다고요. 자신이 행복하길 바랄 거라 믿는다고.”

“…….”

“할멈도 그러실 겁니다.”

“……!”

곁눈질로 본 그믐은 무너지려는 표정을 수습하려 애쓰고 있었다.

이를 꽉 깨문 노인의 하관이 잘게 떨렸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할아범. 할멈은 절대로 그걸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해야 할 말은 전했다.

그리고 이럴 땐 혼자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낫다.

그믐에게 눈인사를 한 너른 하늘이 등 돌려 멀어져 갔다.

“족장.”

뒤를 돌아보는 그에게 우두커니 선 노인이 말했다.

“……고맙소.”

“나중에는 전처럼 말씀도 편히 해주세요.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꾹 눌러 감은 노인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압도

햇살이 비추는 육체는 구릿빛 활력으로 충만했다.

훤칠한 키와 떡 벌어진 어깨.

오밀조밀하게 꽉 짜인 근육은 철갑이나 다름없다.

열여덟.

야생에서 2년을 보낸 소년은 어느덧 청년이 돼 있었다.

“대충 준비가 끝난 것 같네. 슬슬 시작해 볼까?”

“그르릉.”

청년의 옆에는 엄청난 몸집의 흰 호랑이가 그린 듯이 서 있었다.

“가자, 별비야.”

햇살이 화사하게 내리쬐는 봄날.

빛을 두른 마른 비의 행보에 운남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문산.

밀림의 폭군은 따사로운 햇볕 아래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네가 광서우야?”

느닷없이 들려온 인간의 울음.

아니, 목소리라고 하던가.

어쨌든 짜증이 난다.

낮잠을 방해받은 코뿔소가 눈을 치떴다.

“푸익?”

“맞네. 한판 붙자.”

겁대가리 없는 인간 하나가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푸이익!”

광서우는 정신이 혼미했다.

영역에 침입한 것도 모자라, 주제를 모르고 까부는 인간을 들이받기 위해 돌진했으나 상대는 공격을 번번이 허사로 돌렸다.

“뭐야, 너 되게 느리네?”

얄밉다.

인간 놈은 그저 산보하듯 가볍게 움직일 뿐인데 잡을 수가 없다.

구름처럼 흐르는 발을 보고 있노라면 눈이 팽팽 돌아간다.

급기야 옆구리에 꽂힌 한 방.

두터운 외피를 뚫고 내부를 흔든 충격에 아침에 먹은 잔가지들을 토해낼 뻔했다.

“푸이이익!”

고통에 신음하던 광서우의 자세가 낮아졌다.

“오? 뭔가 해보려고?”

마른 비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스파앗―

순간가속.

2년 전, 산을 죽음 직전까지 몰았던 그 돌진이다.

마른 비의 눈빛이 번쩍였다.

‘이건 위험해!’

저 뿔.

그리고 힘.

정면으로 받으면 목숨을 건지기 힘들다.

자세를 바짝 낮춘 마른 비가 지면을 휩쓸었다.

“하앗!”

광서우의 돌진은 눈으로 잡기 힘들 정도로 빠르지만, 결국 핵심은 땅을 밟는 다리다.

충돌 직전, 정확하게 후려 찬 오른발 정강이에 광서우의 앞발이 걸렸다.

“푸이아아악…!”

괴성과 함께 기울어지는 코뿔소의 몸.

바로 들어간다.

전진하는 어깨.

끊어 치는 타격.

허리를 휘돌려 덧입힌 회전력!

완연한 숙련의 경지다.

화룡점정으로 자연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가니, 산 허물기가 육중한 짐승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푸익…?!”

믿을 수 없다는 눈치다.

놀람이 통증을 넘어섰는지, 허공을 날아가면서도 광서우는 멍청한 눈으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꽈아앙! 꽝!

아름드리나무 두 그루를 분지르고 처박힌 광서우가 그제야 몸을 뒤틀었다.

“푸, 푸이이…!”

아프다.

온몸이 찌르르 울릴 만큼.

한데 이상하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가?

“괜찮아?”

어느새 다가온 인간이 눈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네가 갑자기 기술을 쓰는 바람에 위험했잖아. 힘 조절을 못 했어. 너는 튼튼해서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그런 거 맞으면 죽는단 말이야.”

청년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졌지? 계속할래?”

당연하다.

평생토록 한 번을 제외하면 패배란 없었다.

그 인간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존재였지만….

“……푸익?”

어딘가… 닮았다.

한참 어리긴 하지만,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인간과 눈앞의 인간은 닮은 구석이 많았다.

“푸… 푸이……!”

설마…….

“응? 닮았다고? 널 이긴 인간? 아, 들었어. 그거 우리 아버지야. 네 뿔 조각 가져간 사람.”

“푸이아아악!”

광서우가 괴성을 지르며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아, 괜찮대도. 아버지 안 와.”

“푸익?”

진짜?

재차 묻는 광서우는 겁에 질려 있었다.

“뭘 얼마나 맞았길래 그렇게 무서워해?”

“푸이…….”

해가 육십 번 뜨고 지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때까지.

광서우는 시무룩해졌고, 마른 비는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와… 그렇게 안 봤는데 우리 아버지 지독하구나.”

“푸…….”

그러게. 내 말이.

당해 보지 않으면 몰라.

풀 먹는 시간 빼고 하루 종일 뚜드려 맞다가 기절을 반복….

“푸이?”

인간처럼 작게 머리를 끄덕이던 광서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넌 내 울음을 어떻게 알아듣는 거지?

네 아버지는 안 그랬는데?

설마 그 인간, 못 알아듣는 척하고 두 달 동안 날…….

마른 비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냐, 아냐. 아버진 네 말을 알아듣지 못할 거야.”

“푸익?”

그럼 넌?

“음……. 설명하기 어려운데 야생 동물들이랑 친하게 지내다 보니 그렇게 됐어. 어느 순간 이해가 되더라고. 아니지, 이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느껴진 달까? 너희들의 생각이. 아무튼 그래.”

“푸이.”

뭐, 그렇구만.

그거 참 편리하네.

광서우는 어느새 마른 비와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난 마른 비야. 너, 느낌이 좋네. 나랑 친구 하자.”

“푸이.”

그러지 뭐.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대화다.

인간과 짐승 양쪽을 통틀어 가장 단순할지도 모를 두 개체가 만나니 거리낄 게 없었다.

“너 머리가 나쁘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친구 한 거 까먹는 건 아니지?”

“푸이악!”

어떤 놈이 그런 헛소문을!

유쾌하게 웃는 마른 비를 보며 광서우는 묘한 감정에 빠졌다.

분명히 얻어맞고 뻗었는데도 반감이 들질 않는다.

화를 내며 날뛰는 것보다 눈앞의 인간과 시시덕대는 게 즐거웠다.

“다짜고짜 싸우자고 해서 미안. 내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길이 없더라구. 네가 세다고 해서 단련할 겸 찾아온 거야.”

“푸이~.”

아, 괜찮아~.

그런 이유라면 제대로 찾아왔다.

나보다 센 녀석은 이 운남에….

“혹시 칼이빨이라고 알아?”

“푸힉?!”

덩치 큰 코뿔소는 딸꾹질을 한 듯했다.

“알지?”

“푸…….”

뭐, 소문 정도는…….

“너랑 비교하면 어떨 것 같아?”

“……푸이?”

……요 앞에 맛난 들풀이 있는데 먹으러 갈까?

“큭큭. 난 들풀 안 먹어. 칼이빨이 너보다 센 거 알아. 아, 기분 나빠하진 말고. 직접 만나 봤거든.”

광서우의 커다란 눈이 더 커졌다.

괴물 같은 전 애뢰산 산군을 쓰러뜨린 놈이다.

산군의 피붙이들까지 몰살했다고 들었다.

한데 그 재앙 같은 놈을 만나고 살아 나왔다고?

주둥이를 열어 소리 내지 않아도 광서우의 동요가 읽힌다.

마른 비의 야수 제어는 지난 2년간 새로운 경지에 접어든 상태였다.

“응. 다행히도. 대신… 소중한 사람을 잃었어. 난 놈에게 복수하러 갈 거야.”

“푸이이이익!”

아서라.

격이 다른 놈이다.

그건 살아 숨 쉬는 재앙이나 다름없다!

광서우는 처음으로 사귀게 된, 마음에 드는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야. 그러니 단련할 수 있게 네가 좀 도와줄래?”

“푸익!”

좋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이대로 뻗고 끝내는 건 나도 성에 안 찬다.

지금이라도 당장…!

“아, 나는 됐어. 이번엔 나 말고 쟤랑 한번 싸워 줘.”

“……?”

투벅, 투벅.

눈이 내린 듯 새하얀 털빛.

푸르게 타오르는 눈.

광서우에 못지않은 덩치를 지닌 범이 유유히 걸어 나왔다.

“별비라고 해. 칼이빨에게 당한 애뢰산 산군이 이 녀석의 아버지야. 둘이 친하게 지내.”

“푸… 푸…!”

뭐냐, 이건?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어디서 갑자기 이런 게…!

광서우의 눈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참고로 지금은 별비가 나보다 세. 곧 내가 더 세질 거지만.”

“가릉.”

별비는 콧방귀를 뀌었고, 마른 비는 두고 보라는 듯 웃었다.

그리고 광서우는 겁에 질렸다.

“푸익…!”

친구 하자며?

근데 갑자기 저런 거랑 싸움을 붙여?

이제 알겠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이 인간이 지 애비보다 더 지독한 놈이다.

광서우의 콧잔등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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