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그늘에 옆으로 드러누운 광서우는 탈진 직전이었다.
단련이라는 명목하에 며칠간 마른 비와 별비를 상대한 탓에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푸이이…….”
두 괴물은 싸울 때마다 점점 강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고, 자신하던 순간가속마저 전혀 통하지 않게 되자 대련은 끝났다.
희한한 건 일방적으로 밀렸음에도 거부감이 들거나 화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묘한 녀석들이었다.
“푸이…….”
칼이빨에 대한 소문이 워낙 흉흉한 탓에 걱정이 되지만, 왠지 녀석들이라면 해낼 것도 같다.
다시 보자며 손을 흔들던 마른 비를 떠올리며 광서우는 잠에 빠졌다.
아니, 빠지려고 했다.
“어이. 광서우.”
뭐냐, 또.
피곤해 죽겠는데.
고개를 돌린 곳엔 인간치고는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수컷이 서 있었다.
“뭐야, 이놈. 왜 걸레짝이 됐어?”
“글쎄. 맹수랑 싸운 모양인데?”
키가 크고 늘씬한 남자가 걸어오며 대꾸했다.
“……?”
이것도 뭔가 익숙한 광경인데.
이 인간들을 본 적이 있던가?
“2년 전엔 너에게 죽을 뻔했지.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다시 왔다. 옛일 따윈 제쳐 놓고 순수하게 한판 붙자.”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투기를 뿜어내는 자.
육체가 완성기에 접어든 산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푸, 푸이익…!”
밀림 폭군 광서우의 수난시대였다.
* * *
푸화하악!
산란한 햇살 아래, 거센 물보라가 일었다.
드넓은 호수라고 해도 무방한 늪.
집채만 한 악어가 수면을 뚫고 치솟았다.
“쿠어어어!”
징그럽게 번뜩이는 파충류의 눈은 입안에 들어오다시피 한 생명체를 노려보고 있었다.
“으아아아!”
힘줄이 터질 듯 불거진 양팔.
악어의 주둥이를 붙잡고 있는 건 놀랍게도 인간이었다.
멧돼지를 한입에 삼킬 만큼 거대한 주둥이가 닫히지 않고 있었다.
“크… 쿠워어어!”
날카로운 이빨들 사이로 진득한 침이 흘러내린다.
수많은 맹수들을 통째로 씹어 삼킨 치악력.
이해 부근 늪지대의 악몽이라는 거악의 눈동자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으으윽…! 악어라 그런지 무는 힘이 엄청나네! 날 잡아먹으려고?”
주둥이를 위아래로 붙잡은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하지만 마른 비는 웃었다.
“그래도 별비보단 약해. 이게 전부면… 너 오늘 좀 아플걸?”
마른 비의 몸 주변에서 푸른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그의 눈동자가 번쩍이고, 근육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거악의 주둥이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범의 앙심.”
야생에서 지낸 2년간, 애뢰산 쪽을 바라보며 원한을 태우던 별비다.
그리고 그건 마른 비도 마찬가지였다.
검치호를 떠올릴 때마다 흘러넘칠 듯 요동치던 자연기.
마른 비는 타오르는 분심(憤心)을 육체의 강화로 돌릴 방법을 찾아냈다.
분출하는 자연기를 강피와 철골에 흘려 넣어 육신의 강도를 높인다.
근육과 힘줄에 스민 자연기가 육체의 힘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육체 강화는 곧 전반적인 투력(鬪力)의 상승일지니.
“으아아아!”
팽팽하게 유지되던 힘 싸움이 마른 비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쩍 벌어진 주둥이.
거악의 눈동자에 경악을 넘어 두려움이 깃들기 시작했다.
“쿠, 쿠워어어어!”
“어? 어? 잠깐…! 야!”
풍더어엉―!
힘에서 밀리자, 거악은 마른 비를 물려고 했던 상태 그대로 늪으로 입수했다.
고요가 찾아왔다.
“그르릉.”
뭐 하냐.
나약한 물고기 상대로 뭐 이리 시간을 끌어?
늪 바깥에 엎드린 별비가 길게 하품을 했다.
거악이 들으면 화딱지가 날 일이지만, 별비에게 물에서 사는 것들은 죄다 물고기나 마찬가지였다.
푸화하학!
“쿠워어어어…!”
잠수했던 악어가 수면을 뒤엎으며 요동쳤다.
단단한 외피가 없는 주둥이 안쪽.
강제로 거악의 턱을 열어젖힌 마른 비가 부드러운 입천장에 올빼미 사냥을 꽂아 넣었기 때문이다.
“졌지? 항복해!”
늪지대의 악몽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마른 비는 즐거워 보였다.
* * *
“크허허헝!”
쿠콰쾅!
범이 휘두른 앞발에 거대한 뱀이 머리를 맞고 나가떨어졌다.
새하얀 범과 갈색의 뱀.
남방 밀림의 패자라고 불리는 대망의 몸길이는 어지간한 고목보다도 길었다.
“시아아아악!”
흉포함이 묻어나는 두 개의 이빨.
하지만 놈이 무서운 건 이빨 따위가 아니다.
별비가 작아 보일 만큼 육중한 몸뚱이가 푸르게 빛나고, 접근하는 백호를 순식간에 휘감았다.
으드드득!
“어?!”
나무 위에서 관전하던 마른 비가 상체를 세웠다.
“이거… 위험한 거 아냐?”
여유롭던 마른 비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별비는 그를 힐끗 올려다보며 눈으로 말했다.
호들갑 떨지 마라.
발도 없이 기어 다니는 미물에게 질 것 같으냐.
별비의 푸른 눈동자가 한층 짙게 빛났다.
“크허어엉!”
우렁찬 포효와 함께 별비가 대망의 몸통을 물어뜯었다.
그러나 대망은 자신만만했다.
각성한 이래 한 번도 뚫린 적 없는 외피다.
자연기를 주입한 비늘은 강철을 이어 붙인 갑주와 같았다.
아… 딱 한 번 있었지.
나무 위에서 구경 중인 인간의 아비.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던 그 괴물은 맨손으로 비늘을 뜯어냈었다.
하지만 짐승에게 뚫린 적은 없다.
발버둥 쳐 봐야 곧 온몸의 뼈가 바스러질 것이고, 오늘 저녁은 흰 호랑이 별미를…!
콰지지직!
“시, 시아아아악…!”
별비는 대망의 몸통에 잇몸이 닿을 만큼 이빨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리고 푸르게 번뜩이는 눈으로 말했다.
뚫린 적이 없다고?
웃기는 소리.
그래 봐야 뱀 껍데기 아니냐.
“크허헝!”
엄청난 광경이었다.
대지를 굳건히 디딘 백호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 때마다, 이무기라고 해도 믿을 만한 뱀이 허공에서 춤춘다.
별비는 대망의 몸통을 문 채 자신의 몇 배에 달하는 존재를 가볍게 유린했다.
후아악― 콰앙!
혼이 빠진 대망을 땅에 내동댕이치자 밀림 전체가 뒤흔들렸다.
“크허허허헝!”
진녹색 잎의 바다.
태고의 밀림 한복판에서 거대한 뱀의 머리를 밟고 포효하는 백호는 백수의 왕다운 위용을 흩뿌리고 있었다.
“신났네. 신났어.”
그림 같은 광경을 깨뜨리는 건 언제나 인간이다.
어둔 날개의 체면을 깎아 먹는 게 그믐이었듯이 별비의 자아도취를 깨부순 것도 마른 비였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던 별비가 투덜대며 발을 내렸다.
“안 줘도 돼.”
마른 비의 말에 대망의 눈이 커졌다.
“쉬아악.”
“에이, 진짜 괜찮다니까.”
굴복의 증거.
너른 하늘이 그랬듯 당연히 전리품을 챙길 줄 알았나 보다.
대망의 몸이 회복되고 마른 비의 요청으로 싸운 결과는 마른 비의 승리였다.
“알잖아. 예전에 아버지가 왔던 건 경고를 위해서였어. 네가 영역 너머에 있는 인간들에게까지 해를 입혔잖아. 나는 그냥 너랑 싸우고 싶어서 온 거야. 가만히 있는 너를 건드린 건 나니까 오히려 내가 미안한걸.”
“그르릉…….”
뭘 사과까지.
참 피곤하게 산다.
한옆에 웅크린 별비가 그르렁댔다.
야생에서 강자의 뜻은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이다.
먹든, 가지고 놀든, 괴롭히든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하면 된다.
힘만 있다면.
당한 게 분하다고?
그럼 힘을 키우면 된다.
윤리도덕 따위가 존재할 리 없는 짐승들에게 약육강식, 강자지존은 숨 쉬는 것과 다름없는 진리였다.
“시악.”
마음에 안 드는 고양이, 아니, 호랑이지만 이번만큼은 저놈 말이 맞다.
강자는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다.
원하는 바를 말하라.
대망이 재촉했지만, 마른 비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거 없는데. 대련하면서 배울 것도 다 배웠고.”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였던 마른 비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 친구 하자! 그걸 원해!”
“시아악.”
강자의 뜻이라면.
마른 비가 원하는 친구의 의미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대망은 순순히 승낙했다.
그리고 거대한 머리를 땅에 댔다.
“응? 뭐야? 타라고?”
그건 이성이 발현되고 자아를 지니게 된 대망의 순수한 의지였다.
패하고도 분한 마음보다 친밀함을 느끼게 하는 이상한 인간.
광서우보다 지능이 발달한 대망은 상황을 곰곰이 되짚었고, 마른 비와의 만남이 다시없을 인연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 우와아아아!”
똑바로 몸을 세운 대망은 어지간한 고목보다도 컸다.
천천히 움직이는 뱀의 머리 위에서, 마른 비는 광활한 밀림을 한눈에 담았다.
“정말 멋져!”
따스한 햇볕과 청청한 하늘.
그 아래 펼쳐진 녹색의 바다.
만물이 생동하는 운남의 봄은 눈길이 닿는 곳 하나하나가 절경이었다.
“그라랑, 그릉!”
나도, 나도!
까마득한 저 아래에서 별비가 펄쩍펄쩍 뛰며 재촉했다.
“시악. 쉬아악.”
꺼져라.
넌 마음에 안 든다.
아무나 태워 주는 줄 아나.
“크르르…….”
당장 내려오지 않으면 토막을 쳐서 소망(小蟒)을 만들어 주겠다는 별비의 무시무시한 협박에도 대망은 코웃음 쳤다.
“시익.”
다음은 어떤 놈에게 가나.
그 의미를 알아들은 마른 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어?”
“쉬악.”
모를 리가.
각성한 존재들은 너희 인간에 못지않은 지능을 지니고 있다.
인간들이 짐승이라고 싸잡아 부르는 종들 중엔 각성하지 않아도 높은 지능을 지닌 개체들이 더러 존재하고.
“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
마른 비가 지난 기억들을 반추했다.
야생에서 관찰한 동물 중엔 영특한 녀석들이 분명 존재했었다.
인간만큼은 아니지만 보통의 짐승들과는 차별되는 비범한 존재들.
“시이익.”
그래, 너희의 생각보다 영리한 짐승들은 많다.
종으로 따지면 원숭이들이 전반적으로 똑똑한 편이지.
음……. 원숭이라고 하니 물불 안 가리던 정신 나간 놈이 생각나는군.
너의 아비가 식인 원숭이를 죽일 때 했던 ‘경고’는 운남 전역에 퍼졌다.
“식인 원숭이? 괴후를 말하는 거야? 근데 경고라니? 아…!”
‘영역을 넘어 인간의 마을을 습격한다면. 그곳이 어디든 내 직접 찾아가리라.’
아버지가 전사들 앞에서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한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지켜보고 있는 짐승들에게 했던 말이라니!
마른 비는 진심으로 놀랐다.
“시익- 쉬아악.”
인간들만큼 조직적이진 않지만, 우리도 건너건너 전해지는 소식들이 있다.
보통은 단편적인 데다 매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무식한 코뿔소와 욕심쟁이 악어가 깨진 일은 당장 운남을 들썩이게 할 만한 일이지.
난 네가 올 걸 알았다.
내가 패했다는 소식도 금세 퍼지겠지.
“세상에! 상상도 못 했어……. 그럼 광서우나 거악도 내가 갈 걸 알고 있었을까?”
“쉭.”
그놈들이 소식에 귀 기울이는 번거로운 짓을 할 것 같나.
코뿔소는 머리가 모자라고, 악어는 다가오는 놈이 있으면 죄다 잡아먹었겠지.
“하하! 그렇겠다.”
대망의 생각을 받아들이며, 마른 비는 느꼈다.
각성한 놈들은 마치 인간처럼 개성이 뚜렷하구나, 하고.
대망은 파충류 특유의 차가운 느낌 때문에 사악하고 흉포할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만난 녀석들 중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가 가능한 게 대망이었다.
“이번엔 야생곡으로 갈 거야.”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운남의 전경을 눈에 담으며, 마른 비가 말했다.
“시이익…….”
역시 야생곡이군.
그 맹수 분쇄자에게 가는 건가.
“맹수 분쇄자? 전상을 말하는 거야?”
“쉬아악.”
맞다.
녀석의 무리를 습격한 맹수들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갈가리 찢어놔서 그런 별명이 붙었지.
“엄청 강한가 보네. 하긴 2년 전에 우둔한 땅 아저씨도 고생했다고 들었어.”
“쉬익.”
아마도… 애뢰산의 산군과 매리설산의 독수리, 석림의 늑대를 제외하면 가장 강할 거다.
구향동굴의 거미는 힘이 센 건 아니니 논외로 치고.
싸움에 미친 곰이 코끼리보다 강해졌다고 들었지만, 애뢰산 산군에게 패하고 목숨을 잃었지.
“흉웅 말이구나? 맞아. 엄청난 광경이었어. 칼이빨의 앞발 한 번에 그 괴물 같은 녀석이…….”
이번엔 대망이 놀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