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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31화 (131/463)

131화

그때 애뢰산에 침입했던 인간들 중에 하나가 너였냐고.

모두 죽었다고 들었는데 살아나온 자가 있었느냐고.

“응. 전쟁이 끝나고 알게 된 사실인데 나 말고도 한 명이 더 살아남았어. 날 쫓던 노인. 적섬여의 독 때문에 팔을 자른 모양이지만.”

대망이 뱀 특유의 쇳소리를 내며 감탄했다.

칼이빨은 본 적 없지만, 애뢰산의 전 산군은 잘 알고 있다.

홀로 성장하여 애뢰산의 강대한 포식자들을 모조리 무릎 꿇린 대호.

자신의 비늘을 뜯어간 인간과 같이 다니는 범의 새끼.

그 압도적인 존재가 쓰러졌을 때, 대체 어떤 괴물이 출현한 것이냐며 운남 전체가 요동쳤었다.

한데 그 괴물에게서 살아나왔단 말이지.

게다가 둘이나.

“쉬아악.”

과연 인간은 놀라운 종이다.

뭘 모르는 짐승들은 발톱도, 이빨도, 독도 없는 인간들을 얕잡아 보지만, 대망은 이 시대 먹이사슬의 정점을 차지한 종이 인간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견고해질 터였다.

“아, 대망아. 너 혹시 요란한 할아버지 본 적 있어? 상당히 강한 편이라 봤으면 기억에 남을 것 같은데.”

뱀이 기를 사용한다며 불신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던 노인.

마른 비가 화통달을 떠올리며 물었다.

“쉬아악.”

풀 뜯고 다니는 늙은 인간을 말하는 거지?

봤다. 굉장한 기운이 접근하길래 경고 차원에서 무력시위를 했지.

바위를 으스러뜨리니 혼비백산해서 도망가더군.

덤볐으면 상당히 피곤할 뻔했어.

“역시 너였구나! 맞아. 그 할아버지, 엄청 강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숲이 끝나 있었다.

야생곡으로 향하는 밀림의 끝자락.

하지만 대망은 야생곡이 있는 서쪽이 아니라 북쪽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쉬이익.”

너, 최종 목표가 애뢰산 산군인 거지?

마른 비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가라앉았다.

“응, 맞아. 놈을 쓰러뜨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거든.”

호들갑을 떨었던 광서우와 달리 대망은 만류하지도, 격려하지도 않았다.

그저 파충류답지 않은 침착한 눈으로 북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쉬아악.”

네 아버지에겐 두려움만을 느꼈을 뿐,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넌 달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에겐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낀다.

“쉬악.”

살아서 또 보자.

그리고 그땐 원하는 바를 말하라.

강자에겐 그럴 권리가 있다.

“에이, 됐대도. 너 진짜 뱀 같지 않네. 사람이랑 대화하는 거 같아.”

빙그레 웃는 청년과 인간을 태운 대왕 뱀.

고대 설화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지만, 투덜대는 짐승의 울음이 그림을 망쳤다.

“그르르릉.”

놀고들 앉았네.

태워 주지 않는다고 심통이 난 별비가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찼다.

* * *

우둔한 땅을 비롯한 바위 곰 전사들과의 인연 덕분일까?

전상은 마른 비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웅장한 몸집만큼이나 강했다.

“부오오오!”

하늘을 가리는 거수의 맹위.

야생곡의 지배자 전상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대한 힘을 축적한 상태였다.

전력을 다한 마른 비를 허공으로 날려 버릴 만큼.

별비조차 절로 신음을 흘릴 정도로.

전쟁을 겪고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는 걸 느낀 전투 코끼리는 2년 내내 단련해온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마른 비와 별비는 꺾이지 않았다.

너른 하늘과 푸른 눈을 상대해 본 둘이다.

검치호를 목표로 하는 그들에게 전상이 눈에 찰 리 없었다.

2년 전의 흉웅을 뛰어넘은 전상이 무릎을 꺾는 데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어. 한두 곳 더 들를까?”

석 달.

마른 비와 별비는 간판 깨기(?)를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수식어가 붙은 맹수들을 모조리 눕히며 파란을 일으켰다.

운남의 긴 역사를 통틀어도, 힘을 키우기 위해 각성한 맹수를 찾아간 인간은 한 명도 없었다.

사투를 벌였음에도 어느 한쪽이 상하는 일 없이, 호의적인 관계로 마무리된 적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지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싹 튼 짐승들은 마른 비의 행보에 주목했다.

수식어가 붙은 맹수들이 전부 깨졌다면, 그 위는 고유의 이름이 붙은 존재들뿐이다.

그리고 마른 비의 최종 목적지는 명백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둘 중 하나.

운남 최북단에 위치한 매리설산은 너무나 멀기에, 모두가 석림을 예상했다.

하지만 그 예상을 비웃듯 마른 비는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 * *

까마득한 세월을 녹인 종유석과 석순은 이 세상의 것 같지가 않았다.

무지막지한 수압으로 합일을 이루며 쏟아지는 자웅폭포(雌雄瀑布)의 물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자연이 다듬은 계단식 논 모양의 신전(神田).

어떻게 저런 형태의 암석지대가 자연적으로 형성될까 의문이 드는 환상적인 절경이었다.

『으… 징그러. 뭐 저렇게 생긴 게 다 있지?』

하지만 마른 비의 언령엔 끔찍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구향동굴.

그 내부에 웅크린 생명체 때문이었다.

『으윽. 토할 거 같애.』

별비에게 전해진 언령에는 마른 비의 감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러나 별비는 마른 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너랑 비슷하게 생겼구만, 뭘.’

울음의 의미를 이해한 마른 비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별비가 볼 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시커먼 털이 수북한 몸체는 거미의 그것이지만, 머리는 분명 인간과 흡사했으니까.

“끼에엑…….”

인간의 입이라고 할 만한 부위에서 낮은 울음이 흘러나왔다.

눈, 코, 그리고 입.

누가 봐도 인간의 얼굴을 닮은 그것은 밀가루로 빚다가 만 형상이었고, 그래서 더욱 끔찍했다.

온갖 기상천외한 생물이 활보하는 운남이지만, 저것보다 기괴한 존재는 없으리란 확신이 들 만큼.

『야! 아무리 그래도 저건…!』

발끈한 마른 비가 언령으로 외쳤다.

백번 양보해도 저것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건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볼수록 너랑 똑같다.’

장난 섞인 별비의 울음에 마른 비가 울컥한 순간, ‘사람거미’가 이쪽을 돌아봤다.

“키에에에에!”

“……!”

짐승이 아니라서 그런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영역에 침입한 자신들을 적으로 인식했다는 것.

짐승처럼 울부짖는 거미의 포효에 동굴이 요동쳤다.

“어떻게 알아챈 거지?!”

마른 비도 놀랐고, 별비도 놀랐다.

야생에서 갈고 닦은 은신.

원래부터 뛰어났던 그것은 지난 2년간의 수련으로 더욱 높은 경지에 다다랐다.

거리만 유지하면 검치호에게도 발각되지 않으리라 자신했는데.

“어?”

마른 비의 눈에 저 멀리 미세하게 흔들리는 무언가가 잡혔다.

동굴 벽 사이로 스민 햇살.

그리고 햇살에 비친 가느다란 실.

가까이서 보아도 놓칠 만한 굵기의 거미줄이었다.

‘언령의 파동을 느꼈구나!’

생각지도 못한 탐지법이다.

음파를 감지할 정도의 예민함이라니!

이쪽을 똑바로 노려보는 사람거미의 얼굴은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로 흉측했다.

“키에에에에!”

스파파팟!

경계를 위한 거미줄과는 다르다.

꽁무니를 꺾어 쏘아낸 거미줄은 굵기가 새끼손가락만 했고, 투망처럼 덮쳐오는 그물엔 진녹색 액체가 흥건했다.

“피해!”

마른 비와 별비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쉬이이익―

동굴 벽에는 투망 형태의 고랑이 패였다.

암석을 단번에 녹일 정도의 산성.

거미의 생김새만큼이나 지독한 극독이었다.

‘이거, 엄청 위험해!’

마른 비의 감각이 격렬한 경고를 울렸다.

애뢰산 독림에서 경험한 혼합독.

사람거미의 독은 수십 가지 독이 뒤섞이며 형성된 독무만큼이나 위험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어쩌지? 때려눕힐까?’

저 덩치.

다 큰 멧돼지에 비견할 만한 크기지만, 빠르지 않다.

사람거미는 어마어마한 독성을 지녔지만 물리적인 힘은 떨어져 보였다.

마른 비와 별비의 눈이 빠르게 교차했다.

‘별비야, 어쩔래?’

‘고민할 게 뭐 있나. 일단 때리고 보자.’

‘우리가 침입한 거야. 그리고 쟤랑은 단련할 수도 없어. 친구도 안 될 거고.’

‘벌레 따위가 실똥을 뿌려대는데 봐주자고? 저건 맞아야 정신 차린다.’

‘……거미는 원래 그래. 똥도 아니고. 굳이 싸울 이유가 없어. 빠지자.’

별비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허나 하나뿐인 벗의 의지다.

굴복이나 종속과는 거리가 먼 관계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마른 비의 의견을 더욱 존중하는 별비였다.

“크허허허헝!”

동굴을 뒤흔드는 포효.

재차 거미줄을 발사하려던 사람거미가 흠칫하며 얼어붙었다.

있는 힘껏 울음을 토해낸 별비는 그제야 만족스런 기색을 보였다.

거봐. 한 방에 쫄 거면서.

비아가 가자니까 봐준다.

또 똥만 갈겨 봐.

똥구멍을 찢어 놓을 테니.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노려보던 백호가 등을 돌렸다.

자신 있으면 공격해 보라는 듯 유유히 걸어가는 별비다.

그 뒷모습을 보며 부들부들 떠는 사람거미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어우. 너 참 성격 나빠.”

내가 뭘?

별비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르렁댔다.

“그냥 나오면 될 걸 굳이 그러냐.”

“그르릉.”

내가 고분고분한 건 너한테 만이다.

다른 놈들이 덤비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아…….”

마른 비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을 흐렸다.

마른 비와 2년을 지내며 성년기에 접어든 별비다.

야생의 정점에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맹수.

마른 비는 친숙해서 잊고 있었지만, 그건 범이라는 종 특유의 자존심일 터였다.

각성을 이루고 자아가 싹 텄으니 더욱.

“음……. 그렇겠네. 거기까진 미처 생각 못 했어. 미안. 도망치는 거 같아서 기분 상했어?”

“가릉.”

뭐, 조금.

됐다. 너랑 다니려면 익숙해져야지.

내 팔자가 이런 걸 어쩌겠나.

늠름하게 걸어가는 것 치고는 우스운 반응이었지만, 마른 비는 그게 또 좋았다.

히죽 웃은 청년이 말했다.

“고마워. 꼭 필요한 싸움이 아니면 가급적 피하자. 서로 다치기만 하고 좋을 게 없잖아. 앞으론 나도 네 기분을 좀 더 고려할게. 그보다 너, 솔직히 말해 봐.”

“……?”

“처음에 거미줄이 똥인 줄 알고 화났던 거지? 맞지?”

“…….”

별비는 침묵을 지키며 늠름하게 걸어갔다.

다음 목적지는 구향동굴이 있는 이량(宜良)과 매우 가까웠다.

마른 비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 일대는 대리와 함께 문명이 꽃핀 도시, 곤명의 영역에 속해 있기도 했다.

반나절쯤 걸었을까.

흐드러진 녹색의 원시림을 넘자 회백색의 암석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거대한 바위들.

하나하나가 작은 동산만 한 암석들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지며 바위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우와아아~!”

마른 비의 경탄은 그럴 만했다.

온갖 절경이 숨어 있는 운남에서도 이런 특이한 지형은 여기뿐이니까.

석림(石林).

운남 야수들의 정점에 군림하는 늑대의 영역에 마른 비와 별비가 발을 들였다.

“너무 조용한데?”

귓전을 스치는 바람이 서늘하다.

길쭉하게 솟은 바위 곳곳에서 생명의 기운이 감지되지만, 움직이는 생명체가 없다.

기감을 확장해 보아도 아무런 변화를 잡아낼 수 없었다.

“동물들이 바짝 긴장해 있어. 이건… 우리 때문이 아닌데?”

“그르르…….”

무언가를 발견한 별비가 낮게 울었다.

암석지대 곳곳에 묻은 붉은 자국.

혈흔이었다.

“사냥이 아니야. 무언가가 싸웠어. 흔적으로 봐선 다수 대 다수. 이 털…… 한쪽은 늑대야! 다른 한쪽은…… 인간?!”

희미하게 남은 발자국.

은밀한 기동을 위해 발끝으로 대지를 디딘 자국이다.

평생을 야생에서 지낸 마른 비는 순식간에 상황을 읽어냈다.

“누가 붉은 발톱의 무리에게 싸움을 건 거지? 운남에서 석림의 늑대들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와족. 그리고 점창.

그 둘뿐이다.

그리고 너른 하늘 정도 되는 전사가 직접 나서지 않는 한, 어느 쪽이 됐든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와족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점창도 마찬가지.

미치지 않고서야 석림에 쳐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럼 대체 어떤 인간들이…!

“크르르…….”

분노에 찬 맹수의 울음이 바위 숲을 스쳤다.

마른 비와 별비가 지나온 길.

눈을 돌리자 수십 마리의 늑대가 길을 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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