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그르릉…….”
늑대들이 털을 세우며 으르렁댔다.
원수를 대하는 듯한 적의!
단순히 영역을 침입해서라기엔 지나치게 적대적이었다.
‘싸움의 흔적과 관련해서 오해가 있는 건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늑대들을 제지하기 위해 마른 비가 앞으로 나섰다.
“잠깐만!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우린 붉은 발톱을 만나기 위해서 여기에…!”
“크아아앙!”
극심한 흥분 상태다.
늑대들은 마른 비가 앞으로 나서자마자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크허헝!”
이 똥개들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감히 누구한테 덤비는 거냐!
마른 비의 뒤에 있던 별비도 땅을 박찼다.
“별비! 기다려!”
고함과 동시에 언령이 터져 나갔다.
『전부 그대로 멈춰!』
위압, 그리고 억압.
야수 친화라는 독특한 길을 걷고 있지만, 근본은 어디까지나 야수 제어다.
그리고 강해진 힘만큼이나 마른 비의 야수 제어는 일취월장했다.
별비가 뒤로 물러서고, 수십 마리의 늑대는 보이지 않는 손에 짓눌린 듯 땅으로 고꾸라졌다.
“크… 끼이잉…!”
하늘로 솟은 바위들 아래 새파랗게 빛나는 눈.
돌산처럼 버티고 선 청년은 늑대들로서는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상대였다.
심혼을 억누르는 위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쳐 보지만, 부질없다.
늑대들의 눈동자에 적의가 가시고 두려움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싸움은 원치 않아. 붉은 발톱에게 안내해.』
한 명의 인간에게 머리를 조아린 수십 마리의 늑대들.
마른 비는 단 두 마디의 언령으로 늑대 무리를 굴복시켰다.
그리고 그 순간, 마른 비가 제압한 공간에 이질적인 기가 침투했다.
투벅, 투벅.
야수 제어를 받아넘기며 서서히 다가오는 그것은 한 마리의 검은 늑대였다.
흑표범 검은 밤에 비견할 만큼 탐스러운 흑색 털이 햇살 아래 흘렀다.
“……흑랑?”
마른 비는 성년식에서 귀환한 산과 안개걸음의 대화를 기억한다.
석림을 찾은 안개걸음과 검은 밤을 홀로 쓰러뜨렸다는 늑대.
수식어가 붙을 만큼 강하면서도 붉은 발톱과 함께 다니는 특이한 녀석.
흑랑은 영역을 침입한 둘을 제압한 후 유유히 사라졌다고 했다.
“너… 흑랑 맞지? 내 말, 알아들어?”
마른 비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흑랑은 고요한 눈으로 마른 비를 바라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야수 제어를 받아낼 정도의 늑대는 너나 붉은 발톱밖에 없겠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설명해 줄 수 있어?”
검은 늑대의 눈에 잠시 갈등이 서렸다.
그리고 곧 한줄기 의지가 번져 나왔다.
……따라와라.
마른 비와 별비가 서로를 돌아봤다.
허나 흑랑의 전언은 끝이 아니었다.
우릴…… 도와다오.
붉은 발톱
마른 비와 별비는 석림의 중심을 향해 걷는 흑랑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기색의 늑대 수십 마리가 멀찍이 거리를 둔 채 그 뒤를 따랐다.
“크르르…….”
언제까지 걷기만 할 거냐.
냉큼 불지 못해?
마른 비의 제지 때문에 발톱을 물렸지만, 별비는 다짜고짜 덤벼든 늑대들이 못마땅했다.
그리고 분위기를 잡으며 걷기만 하는 커다란 늑대는 더욱 마음에 안 들었다.
별비의 재촉 때문인지 흑랑이 천천히 뜻을 전해 왔다.
“……그릉.”
……해가 삼십 번 뜨고 지기 전, 한 무리의 인간들이 석림에 진입했다.
말을 고르는 인간처럼, 흑랑은 신중하게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르렁, 컹.”
놈들은 낯선 냄새를 풍기고 있었지.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머나먼 어딘가에서 온 자들이 틀림없었다.
우린 그들이 석림이 우리의 영역이라는 걸 모르고 있을 거라고 봤다.
“낯선 냄새……. 운남의 토착부족은 아니라는 거네? 하긴 운남 사람치고 석림을 모를 순 없지.”
흑랑의 의사를 받아들이던 마른 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크릉, 컹.”
그래. 그들은 운남의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석림을 알고 있었어…….
정확히는 우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고? 너희를? 그럼… 설마…….”
“크릉.”
그래. 놈들은 우리를 사냥하러 온 거였다.
마른 비와 별비의 눈이 커졌다.
“크라랑?”
사냥이라고?
어떤 놈들이 너희를 사냥하러 왔단 말이냐!
별비가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눈앞에 있는 검은 늑대.
있는 대로 분위기를 잡는 게 마음에 안 들지만, 상당한 놈이다.
품고 있는 자연기가 거의 전상에 버금갈 정도로.
붉은 발톱에게 가려서일까?
수식어가 붙은 다른 놈들에 비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최소한 광서우, 거악, 대망보다는 센 게 확실하다.
어딜 가든 한 지역은 휘어잡고도 남을 놈이었다.
이런 놈을 데리고 다니는 붉은 발톱이라는 놈.
검치호와 푸른 눈을 본 입장에서 제왕 어쩌고 하는 게 같잖았지만, 아무래도 평가를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한데 이런 놈들을 사냥하려는 인간들이 있다고?
별비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르르…….”
마저 들어라.
우리는 녀석들이 이동하는 경로에서 식구들을 물렸다.
영역에 침입한 놈들이지만, 우리를 노린다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외지인들이 우연찮게 들렀다고만 여겼다.
석림은 매우 넓지.
하루 종일 달려도 끝에 다다를 수 없을 만큼.
한데 놈들은 느리지만 꾸준히 우리의 보금자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어…….
“잠깐만. 그런데도 공격을 안 한 거야? 침입을 하고, 보금자리로 점점 다가오는데도?”
마른 비의 질문에 흑랑은 뒤를 돌아봤다.
“그릉.”
너의 아비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 아… 설마 괴후 토벌 때 했던 경고?”
“그르르, 컹.”
아니. 그보다 훨씬 전.
붉은 발톱이 태어나기도 전이다.
내가 막 각성을 했을 즈음.
흑랑의 기억이 십수 년 전의 어느 날을 그렸다.
* * *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편적이고 흐릿하던 사고가 어느 순간부터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자연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기 시작한 때부터였던 거 같다.
육신에 넘치는 힘을 느꼈을 때, 나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어떤 짐승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석림을 평정하고 외부로 눈을 돌렸을 때, 기이한 짐승들이 포착됐다.
머리 꼭대기에만 털이 난 그것들은 불안정하게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생물이었다.
그 희한한 것들은 온종일 석림을 드나들며 돌을 캐갔다.
먹지도 못할 돌을 왜 캐는지 모르겠지만, 허락도 없이 영역을 오가는 놈들이 아닌가.
무리를 이끌고 가서 놈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어이가 없었다.
이토록 생존에 부적합한 생물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토끼 같은 초식동물들은 민첩하기라도 한데 이것들은 느리고, 힘도 약했다.
심지어 발톱이나 이빨도 없어서 막대기에 꽂은 뾰족한 금속을 휘두르는데, 이런 것들이 어떻게 야생에서 살아남았는지 의문일 지경이었다.
놈들을 몰살한 사실이 가물가물해질 때쯤.
‘그것들’이 들이닥쳤다.
푸른 눈의 대호와 하늘을 덮은 올빼미.
고개를 한참 꺾어야 눈이 마주치는 코끼리.
더 기가 막힌 건, 얼마 전 몰살한 짐승들과 똑같이 생겼는데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무리의 중앙에서 걸어 나온 젊은 수컷이 말했다.
“네가 흑랑이냐? 너, 사람들을 해쳤다면서?”
내가 흑랑이라고 불린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할아범. 이놈 이거, 인간에 대해서 모르는 거 같은데요?”
앞발 두 개를 등 뒤에서 맞잡고 있던 늙은 수컷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게? 이제 막 각성한 놈 같은데?”
어마어마한 코끼리 옆에서 곰 같은 수컷이 걸어 나왔다.
“흑랑, 인간 모르는 거 같다. 족장님, 어떻게 할까요?”
옆에 서 있던, 눈빛이 날카로운 수컷이 뚜둑 소리가 나게 고개를 꺾었다.
“석회암을 캐러 온 장족 삼십 명이 몰살했어. 깜짝 놀라서 넷이 전부 달려왔는데 이제 막 각성한 놈이라니. 야, 꺼먼 놈. 말은 알아듣냐?”
묘하게도, 마지막 수컷의 의사는 드문드문 전달이 됐다.
하지만 인간에 대해서도 모를 때인데 제대로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늙은 수컷이 눈빛 매서운 수컷에게 말했다.
“외톨이는 어디 갔냐? 외톨이를 통해서 물어보면 되잖아.”
“할아범. 그놈이 내 옆에 붙어 있는 거 봤소? 또 혼자 싸돌아다니고 있겠지. 일단 때리고 봅시다. 근데 죽일 거요? 살릴 거요?”
“흠……. 장족이 영역에 침입한 거고, 모르고 살해한 거라 애매하긴 하구나. 식인을 한 것도 아니고. 일단 눕혀 놓고 생각하자. 근데 너 이길 수 있겠냐? 각성한 놈인데?”
“무슨 소릴! 이제 막 각성한 놈 따위 발차기 한 방이면…!”
“그냥 있어라, 매서운 눈. 내가 하지.”
“어? 족장님? 잠깐만! 제가…!”
맨 처음 나섰던 젊은 수컷이 움직였다.
나중에 알게 된, 너른 하늘이라는 인간의 앞발 한 방에 나는 기절했다.
할짝, 할짝.
무언가가 눈을 핥는 감각에 정신을 차렸다.
자줏빛 털을 지닌 늑대가 눈앞에 있었다.
상당히 강해 보인다.
벌떡 일어나서 공격 태세를 갖췄다.
“크르릉…!”
“어쭈? 이빨 드러내지?”
눈빛이 매서운 수컷.
저만치서 편히 앉아 있던 그가 인상을 썼다.
“외톨이, 네가 설명해. 죽일지 살릴지는 반응을 보고 결정한다.”
“……?!”
그의 뒤에는 나를 따르는 백여 마리의 식구가 고개를 내리깐 채 정렬해 있었다.
완전한 굴복.
내가 기절한 사이 제압당한 모양이었다.
네 명의 인간과 네 마리의 짐승들이 내뿜는 기세에 식구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르릉, 컹!”
외톨이라 불린 동족과의 대화 후,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른 하늘이라는 인간은 내 머리를 쓰다듬은 후 곧바로 철수했다.
동족들을 한 마리도 죽이지 않은 채.
* * *
“너 아버지를 만났었구나!”
마른 비의 탄성에 흑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걸음이 형과 밤이를 죽이지 않은 이유가…! 혹시 붉은 발톱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도?”
“그릉, 컹.”
그래. 그들은 나와 내 식구들을 살려줬다.
몇 년 전에 찾아온 인간과 흑표범에게서 그들의 흔적을 느꼈지.
석림에 인간이 들어와도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면 건드리지 않은 이유…….
그때의 은혜를 갚는 거라 보면 된다.
“크릉?”
오… 너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네?
조용히 듣던 별비의 감상평이었다.
“그르릉, 컹.”
보는 순간 네가 그의 자식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 도움을 청한 것이다.
어쩌면…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아, 도와 달라고 했었지! 최악의 상황이라는 게 뭐야?”
“그르르릉…….”
우리를 노리는 인간들.
만만치 않은 자들이다.
우리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어…….
충돌을 피하기 위해 건드리지 않았지만, 놈들은 보금자리에 너무 가까이 왔다.
내쫓기 위해 식구들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놈들이 움직였다.
“크르르…….”
먼저 나선 식구들이 쓰러진 건 한순간이었어.
나와 붉은 발톱은 깜짝 놀랐지.
놈들은… 힘을 숨기고 있었다.
“힘을 숨겼다고? 아무리 그래도 너희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라니…….”
둘 중 하나다.
어마어마하게 강하던가, 아니면 기운을 숨기는 기술을 전문적으로 수련했던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그릉, 컹!”
하지만 놈들이 모르는 것도 있었다.
나, 그리고 붉은 발톱.
우리가 놈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듯, 놈들도 우리의 힘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나와 붉은 발톱이 가세하자 놈들은 순식간에 괴멸했어.
‘다행이야. 후자였구나.’
마른 비가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럼 무슨 문제가?”
“그르르르…….”
그건… 유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