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유인이라고?!”
마른 비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흑랑과 붉은 발톱을 유인했다?
정확한 힘을 가늠하진 못했어도 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노리는 건?
“설마…!”
“크르르르…….”
그래. 우리가 싸우는 사이, 우회한 놈들이 보금자리를 들이쳤다.
새끼들을 지키던 식구들이 부상을 입었지.
가장 큰 문제는…… 붉은 발톱의 새끼들이 납치된 것이다.
놈들은 처음부터 그걸 노렸던 것 같아.
“새끼를…… 납치?”
어디서 많이 들은 짓거리가 아닌가.
전쟁이 끝나고 전후사정을 들었을 때.
점창이 와족 전사들을 꾀어내기 위해 획책한 일 중에 하나가 그것이었다고 했다.
“잠깐만! 혹시 그놈들 대리 쪽에 있는…!”
“크릉, 컹.”
아니다.
운남에 사는 자들은 특유의 냄새가 배기 마련이다.
무리를 헷갈릴 수는 있어도 외지인을 착각하진 않는다.
놈들은 운남에 갓 진입한 자들이다.
“그럼 대체 어떤 놈들이…!”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마른 비는 늑대들을 공격한 자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심각한 표정이 된 마른 비를 보며, 흑랑이 낮게 울었다.
“그르르르……·.”
상당한 놈들이지만, 쓸어버리는 건 어렵지 않다.
석림은 우리의 앞마당.
놈들은 돌산에 갇힌 채 옴짝달싹 못 하고 있지.
문제는 우리가 다가가면 붉은 발톱의 새끼들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다.
“그럼 도와 달라는 게…….”
“그르릉, 컹!”
그래. 우리는 놈들과 의사를 주고받을 수 없다.
네가 가서 우리의 뜻을 전해다오.
“음…….”
마른 비가 낮게 침음했다.
정체불명의 침입자들이 갇힌 곳은 석림의 정중앙에서 북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이었다.
돌산이 끝없이 펼쳐진 건 같았지만, 지대가 높았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감시가 용이한 곳을 선점한 모양이었다.
“이 사람들…… 능숙해.”
멀리서 지형을 둘러본 마른 비가 짧게 평했다.
“크릉.”
확실히 그렇군.
별비도 같은 생각이었다.
단순한 고지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적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
침입할 수 있는 경로가 한정된 곳.
그리고 요소요소에 잠복하기 쉬운 곳.
석림의 늑대들에게 쫓기는 와중에 이런 곳을 선점했다면 지형을 읽는 눈썰미가 대단하다는 방증이었다.
“나 혼자 갈게.”
“컹?!”
그게 무슨 소리냐.
어떤 놈들인 줄 알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별비의 타박을 마른 비는 가볍게 넘겼다.
“네가 같이 가면 더 긴장할 거야. 나 혼자 가는 게 나아.”
“크헝!”
웃기는 소리!
혼자는 못 보낸다!
“괜찮아.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냐? 네가 우리 아빠야?”
“크항!”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몰래 뒤를 따르는 한이 있어도 혼자는 안 돼!
“어우, 너도 참……. 이름을 시엄마로 바꿀까 보다. 알았어. 혹시라도 위험해지면 합류하는 걸로 해. 안 들킬 자신 있지?”
별비의 완강함에 마른 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들키다니? 그거 이 몸한테 하는 소리냐?’ 라는 울음을 남긴 채 별비가 스르륵 사라졌다.
크게 심호흡을 한 마른 비가 발을 디뎠다.
철컥!
‘또…!’
벌써 다섯 개째다.
침입자들이 있는 돌산으로 가는 길목에는 교묘하게 위장된 덫들이 즐비했다.
‘이거…… 어설픈 솜씨가 아니야. 사냥에 굉장히 능숙한 자가 깔아둔 건데?’
모든 와족 구성원은 사냥의 달인이다.
오로지 수렵과 채집으로 삶을 영위하기에, 걸음마를 뗀 순간부터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
일정 나이가 되면 도구 따윈 사용하지 않지만, 맨손으로 야수를 잡을 힘이 붙기 전까진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이용하여 짐승을 사냥한다.
마른 비 또한 어린 시절에 덫과 함정, 독 등의 사냥도구를 질리도록 다뤄 보았고, 그래서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돌산에 있는 자들이 대단히 노련한 사냥꾼들이라는걸.
‘이 사람들, 단순한 무인 같은 게 아냐. 평생을 야생에서 보낸 사냥꾼들! 작심하고 들어왔구나.’
미끄러운 돌들의 틈.
무심코 발을 디딜 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풀에 가려진 덫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렵지 않게 덫을 해체한 마른 비가 발을 옮기려는 순간, 날 선 감각이 경고음을 울렸다.
‘……은사!’
한 걸음만 떼었어도 걸렸을 거다.
덫을 해체하고 안심한 자를 노리는 이중의 덫.
발목 부위에 설치된 반투명한 실은 풀 사이에 교묘히 위장되어 있었다.
‘이 덫은… 짐승을 노린 게 아냐. 사람을 대비한 거야!’
“웬 놈이냐.”
낮게 깔린 음성이 마른 비의 시선을 끌었다.
다섯 명의 사내가 활을 겨눈 채 돌산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습관처럼 설치해 두긴 했어도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게다가 알아채다니. 너, 뭐 하는 놈이냐.”
대장 격인 듯한 남자가 마른 비를 노려봤다.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삼십 대 중반의 사내는 담비의 가죽을 가공한 모피를 걸치고 있었다.
마른 비조차 한 번도 본 적 없는 흰 털의 담비.
특이한 건 가죽의 머리 부분을 없애지 않은 채 몸을 빙 둘러서 왼쪽 가슴 부위에 부착해 놨다는 점이다.
동공이 빈 데다 가죽만 남은 담비의 머리는 기괴했다.
‘악취미네.’
마른 비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 사람만이 아니다.
나머지 네 명도 모두 털가죽을 두르고 있었는데, 몸을 빙 둘러서 짐승의 머리 부분을 왼쪽 가슴 위에 부착해 놨다.
‘맹수나 희귀 동물. 직접 사냥한 짐승의 모피를 걸친 건가.’
일종의 전리품이자 통일된 복식인 모양이다.
저들에겐 자랑거리인지 몰라도, 마른 비가 보기엔 악취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심지어 무척이나 더워 보였다.
“안 더워?”
마른 비의 물음에 사내의 표정이 굳었다.
많이 쳐줘도 스물 남짓한 애송이, 그것도 운남의 토착부족으로 짐작되는 청년이다.
한데 다섯 명의 화살이 미간을 노리는 상황에서 저토록 태연하다?
‘자신감이거나, 머리가 모자란 거겠지.’
어느 쪽인지는 두고 보면 될 터.
사내는 마른 비가 무시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뭐 하는 놈이냐고 물었다.”
“난 마른 비야. 늑대들의 전언을 가지고 왔어. 당신들의 우두머리에게 안내해 줘.”
늑대들의 전언?
우두머리에게 안내?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사내가 지그시 인상을 썼다.
“……그래서 이 꼬마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돌산 정상에 있는 바위에는 우람한 덩치의 사내가 기대 있었다.
꿈틀거리는 근육과 시원하게 밀어버린 머리.
그는 생전에 어마어마했을 듯한 흑곰의 털가죽을 몸통에 두르고 있었다.
커다란 도끼의 날로 머리를 긁적이며, 거한이 말했다.
“호진. 고작 한 달 갇혀 있었다고 정신을 놓은 거냐?”
흰 담비 가죽을 두른 사내가 재빨리 답했다.
“엽장(獵將)! 이자는 현 상황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침투로와 사냥 과정, 우리가 갇히게 된 경위까지! 현장에 있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것들을 줄줄이…·!”
“그래서 늑대들과 대화를 하고, 그 짐승들의 말을 전하러 온 거다?”
“……저도 그 말을 믿는 건 아닙니다만, 일단 들어보는 건 나쁘지 않을 듯싶어서……. 솔직히… 나갈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왜 나갈 방법이 없나. 들어오는 것들을 쓸어버리면 끝날 문제가 아니냐. 짐승과 대화? 한심한 자식. 차라리 몰래 지켜보던 어딘가의 첩자라고 하는 게….”
“내가 시험해 보라고 했어.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
조용히 듣던 마른 비가 끼어들었다.
“묘한 억양이군. 운남의 토착민이냐?”
“응. 아저씨가 대장이지?”
“그렇다면? 이제 무슨 목적인지도 알 수 없는 꼬맹이가 짐승과 대화하는 걸 구경하면 되는 거냐?”
“응. 그렇게 해. 그래도 아저씨가 손해 보는 건 없잖아.”
‘이 꼬마가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하게…….’
대머리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머리를 긁던 도끼를 내렸다.
“무슨 목적으로 온 건지는 모르겠다만, 거짓이면 몸성히 돌아갈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엽장.
사냥을 진두지휘하는 엽사들의 수장을 일컬음이다.
중원 제일이라 칭송받는 사냥꾼 집단, 수천(獵天)의 오대 엽장 중 일인인 마웅이 눈을 빛냈다.
“잠깐만 이리 와 봐.”
마른 비가 말을 건넨 건 한편에 웅크리고 있던 사냥개였다.
척 봐도 대단히 사나워 보이는 맹견이 귀를 쫑긋하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속셈이지?’
마웅은 마른 비라고 스스로를 밝힌 청년이 늑대의 새끼와 대화할 테니 보여 달라고 할 줄 알았다.
속내는 짐작이 안 되지만, 이 삼엄한 곳에 스스로 걸어 들어왔다면 목적은 납치한 늑대 새끼 외에는 있을 리 없었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개소리 하지 말라며 제압할 생각이었다.
어디서 보낸 놈이고, 어떤 목적으로 접근한 건지는 그 뒤에 캐물으면 되니까.
그런데…….
“끼이이잉, 낑.”
자신의 충견이 혀를 헥헥대며 달려가서 청년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는 게 아닌가.
‘뭐 이런…….’
혹독한 훈련으로 자신의 말 외에는 듣지 않는 개다.
심지어는 엽주(獵主)의 명령도 외면하는 녀석인데.
맹견은 애교를 부리다가 배를 드러내며 발랑 드러누워 버렸다.
“컹! 컹!”
“그래, 그래. 힘들었겠다. 석림의 늑대들이 보통 사나운 게 아니지. 네가 냄새를 맡으니 너부터 죽이려고 달려들었구나. 응? 마… 웅? 네 주인의 이름이야? 아, 저 대머리 아저씨? 저 아저씨가 널 지켜줬어? 생긴 거랑 다르게 자상하네.”
마웅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늑대들이 노린 것. 내가 지켜준 것. 난 이름을 대지도 않았다.’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냥 과정을 몰래 지켜봤다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름? 중원에서 수천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수천을 대표하는 엽장 중 하나인 자신의 이름을 알아내는 건 어려울 게 없겠지.
마른 비에 대한 마웅의 의심이 짙어지려는 순간.
“응? 덫에 걸린 널 구해 줬어? 아저씨가? 그렇게 만났구나! 좋은 인연이네.”
“컹! 커헝!”
“근데 말야. 나 지금 너와 말이 통한다는 걸 증명해야 하거든. 뭔가 결정적인 건 없을까? 다른 사람이 모를, 저 아저씨만의 비밀 같은 거.”
“가릉? 꾸웅… 꿍…… 컹컹!”
“응? 짝짓기할 때…… 묶어? 뭘?”
의심스런 눈초리로 지켜보던 마웅의 눈이 커졌다.
“……밧줄? 누구를?”
“그마아아안!”
마웅이 사색이 돼서 외쳤다.
“믿는다! 믿어! 너는 짐승과 대화가 가능한! 하늘이 내린 인간이야! 그러니까 씨발! 거기까지만 해애애!”
얼굴이 시뻘게진 마웅이 괴성을 질렀다.
“믿을 수가 없군.”
마웅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짐승의 말을 알아듣는 인간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평생을 사냥꾼으로 살며 수많은 짐승을 보았다.
그리고 그만큼의 사람을 거쳤다.
하지만 동물과 대화가 가능한 인간 따윈 들어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었다.
매우 드물지만, 동물과의 교감이 가능한 경우는 있다.
수천의 주인인 엽주가 그런 사람이 아니던가.
그 놀라운 능력과 사냥 솜씨를 목격했을 때, 누구에게도 윗자리를 내줄 생각이 없던 다섯 명의 초일류 사냥꾼들은 서슴없이 상석을 양보했다.
허나 교감과 말을 알아듣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믿지 않을 수 없지만, 여전히 믿기 어려운 상황.
마웅은 혼란스러웠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부족 사람들도 신기해하는 거니까 아저씨가 놀라는 건 당연해.”
말을 잃은 사냥꾼들의 시선을 태연하게 넘기며, 마른 비가 말했다.
“그것도 놀랍지만… 나는 엽장의 취향이 더…….”
옆에 서 있던 사냥꾼 한 명이 마웅을 힐끔거렸다.
“크흠. 거, 형수님 생각도 좀 하시오. 취향은 존중하오만, 그건 좀…….”
“닥쳐! 도끼로 찍어 버리기 전에!”
머리까지 새빨개진 마웅이 고함을 질렀다.
‘이런 씨부럴. 이 마웅이 독에 갇힌 쥐 신세가 된 것도 어이가 없는데, 어디서 희한한 놈이 와서 이런 망신을…….’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생각을 정리한 마웅이 마른 비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