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꼬마야. 늑대들의 전언이라고 했지? 그래, 우리를 돌산에 몰아넣은 그것들이 무슨 말을 하더냐? 아니, 그전에 넌 그 늑대들과 무슨 관계지?”
“딱히 관계가 있는 건 아니야. 단련을 위해서 석림의 우두머리인 붉은 발톱을 찾아왔어. 그랬다가 포위당했고, 도와 달라길래 승낙한 게 전부야.”
“아무 관계가 아니다……. 그런데 덫까지 해체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다? 그걸 믿으란 말이냐? 그게 너에게 무슨 득이 된다고?”
“믿어.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 새끼를 구하고 싶다는데 그걸 어떻게 거절해? 위험을 무릅쓴 것도 아냐. 아저씨들은 나한테 위협적이지 않거든.”
마른 비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말하는 어조였다.
듣던 사냥꾼들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헛웃음만 나올 뿐 반박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아무튼 흑랑이 그랬어. 아저씨들이 붉은 발톱의 새끼들을 납치했고, 되찾으려고 할 때마다 죽이려고 협박을 한다며?”
“그건 사실이다. 놀랍게도 이곳의 늑대들은 상황을 판단하는 것 같더군. 우리가 우회한 걸 깨닫고 바로 돌아온 것도 그렇고, 포위해서 우릴 몰아넣은 것도 그렇다. 공격받았을 때 혹시나 해서 새끼에게 칼을 들이대니 바로 물러나더군.”
마웅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맞아. 석림의 늑대들은 똑똑해. 붉은 발톱과 흑랑은 특히나. 어지간한 인간 이상일걸?”
“늑대가…… 인간보다 똑똑하다고?”
옆에서 사냥꾼 한 명이 중얼거렸다.
“짐승의 말을 알아듣는 인간도 있는데 못 믿을 것도 없지. 게다가 우린 몸으로 직접 겪지 않았나. 늑대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겠군. 새끼들을 돌려 달라는 거겠지?”
“맞아, 아저씨.”
“안 된다.”
마웅의 단호한 말에 마른 비가 눈을 찌푸렸다.
“왜?”
“우리는 의뢰를 받았고, 수천 사냥꾼들은 의뢰를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고작 그것 때문에?”
“고작? 역시 꼬맹이라 이해를 하지 못하는군. 조직에 대한 신뢰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번 금이 가는 순간, 돌이킬 수 없지. 어려운 의뢰도 많았지만, 우리는 항상 성공했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마웅의 눈은 확신에 차 있었다.
마른 비는 그런 마웅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이번에는 아냐, 아저씨. 붉은 발톱은 더 이상 물러나지 않을 거야. 아저씨가 새끼들을 돌려주지 않으면, 희생을 각오하고 아저씨들을 칠 거야.”
“그게 늑대들의 계획인 모양이군. 그전에 너를 만나서, 이를테면 협상을 위해 널 보낸 거고.”
마웅이 늘어뜨렸던 도끼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날카롭게 세운 날을 천천히 훑었다.
“인정한다. 이곳의 늑대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청난 놈들이라는 걸. 하지만 우린 사냥꾼이야. 그것도 중원 제일의. 놈들이 덤빈다면 우린 놈들을 사냥할 것이다.”
자부심 어린 말이었다.
그리고 나름의 근거가 있기도 했다.
고립되어 있는 한 달간, 마웅은 시간을 들여 피난처였던 돌산을 사냥터로 바꿔 놓았고, 충분한 준비를 끝낸 지금, 사냥에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저씨가 굉장한 사냥꾼이라는 건 알겠어. 느껴지거든. 하지만 아저씨가 모르는 게 있어.”
“모른다? 무얼 말이냐?”
“붉은 발톱. 그리고 흑랑. 그 녀석들도 사냥꾼이야. 아저씨보다 훨씬 뛰어난. 새끼들만 아니라면 아저씨들은 벌써 죽었어.”
마웅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꼬마야. 묘하게도 네가 마음에 들어서 들어주고 있었다만,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다.”
“아니, 좀 더 들어. 아저씨는 선택해야 해.”
“…….”
“조직의 위신과, 아저씨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목숨 중에 무엇이 우선인지를. 작심하고 덤비는 석림의 늑대들을 아저씨는 결코 이길 수 없어. 내가 직접 보고 판단한 거니까 믿어야 해.”
“듣자 듣자 하니까 시건방진 꼬마가 끝을 모르는구나! 네깟 게 뭐라고 그런 판단을 내린단 말이냐!”
중원 최고의 사냥꾼 집단, 수천.
그 수천을 대표하는 엽장에게, 마른 비가 말했다.
“내가 판단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증명해 줄까?”
마웅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증명? 어떻게 말이냐?”
“내가 아저씨보다 강하다는 걸 보여줄게. 붉은 발톱은 나보다 세. 아저씨가 날 이기지 못하면 결과는 뻔한 거야. 나한테 지면, 새끼들을 돌려주고 물러나. 그리고 사람들을 살려.”
“흐흐… 푸흐흐흐. 정말이지, 겁대가리를 상실한 꼬맹이구나. 좋다. 그렇게 하마. 단, 네가 도발한 것이니 죽어도 원망은 마라.”
단단히 화가 난 마웅이 눈을 번뜩였다.
“오랜만에 사람과 싸우는 엽장을 보겠군.”
흰 담비 모피를 두른 사내, 호진이 멀찍이 거리를 두며 중얼거렸다.
“저 꼬마, 간만에 마음에 드는 녀석인데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수.”
마웅에게 취향 운운했던 사내가 그의 혼잣말을 받았다.
“그러게. 희한한 꼬마야. 한데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군. 느껴지는 기운은 대단치 않은데.”
“운남 오지에 사는 꼬마가 고수들을 볼 기회가 있었겠수? 세상 넓은 줄 모르는 거지.”
둘의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마웅의 도끼가 떨어져 내렸다.
“엇? 참웅부(斬熊斧)?!”
“엽장이…… 전력을 다할 모양인데!”
“스물도 안 된 애를 상대로 너무한 거 아니유?”
사냥꾼들의 웅성거림을 헤치며, 마른 비가 움직였다.
‘이 아저씨. 힘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야.’
공기를 가르며 수직으로 떨어지는 도끼날.
소리만 들어도 굉장한 힘이 담긴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둔한 땅과 전상의 힘을 경험한 마른 비다.
이 정도로는 그를 놀라게 할 수 없었다.
‘확실한 차이를 보여 줘야 수긍하겠지.’
그렇다면 정면으로 깨부순다.
‘범의 앙심.’
철골과 강피, 자연기를 기반으로 한 육체 강화.
올려친 왼 주먹이 도끼의 날을 향해 똑바로 나아갔다.
“이… 이런 미친!”
“안 돼! 꼬마야! 왼팔이 통째로 절단 난다!”
“무슨 생각인 거야, 저 녀석!”
누구도 인식하지 못했지만, 사냥꾼들은 어느새 마른 비를 염려하고 있었다.
2년 새 진화한 야수 친화는 짐승을 넘어 인간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게 확실했다.
쩌저저저정!
요란한 충돌음.
하늘로 튕겨져 나가는 도끼!
마웅이 경악하며 눈을 부릅떴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왜 전력을 다했겠는가.
왜 스물도 안 된 청년을 상대로 선공을 펼쳤겠는가.
구경꾼들은 알지 못했지만, 마른 비와 마주 선 마웅은 갑자기 자신을 압박해 오는 엄청난 기세에 초조함을 느꼈었다.
“아저씨, 더 해볼래?”
두 눈에서 은은히 빛나는 청광.
여유로우면서도 고요한 기세.
담담한 한마디였지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마웅의 육신을 옥좼다.
“크아아아합!”
한 번 밀렸다고 물러날쏘냐.
내가 바로 수천의 엽장, 마웅이다!
부아아앙!
하늘에서 크게 휘두른 도끼가 회전력을 등에 업고 쏟아진다.
화산(華山)의 악수(惡獸), 식인 흑곰을 일격에 쪼갠 그때처럼.
내공을 박박 긁은 한 수에는 마웅의 모든 게 담겨 있었다.
“아저씨, 이걸로 끝내는 거다?”
휘도는 몸체.
전면을 향한 등.
중첩된 자연기가 대기를 때리니, 광범위 충격파가 공간을 집어삼켰다.
“천둥바위.”
쿠콰카카카캉!
산산조각 난 철부와, 하늘로 솟구친 거구의 사내.
피를 뿜으며 날아간 마웅이 털썩 떨어져 내렸다.
“…….”
돌산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
마웅이 눈을 떴을 때는 반나절이 지난 후였다.
돌산을 기웃거리는 산양을 잡아 요기를 하던 사내들이 일제히 눈을 돌렸다.
“아저씨, 일어났어?”
다정다감한 말투.
건방지게 증명 어쩌고 하던 꼬맹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탄탄한 근육질의 등이 크게 확대되며 다가왔던 건 기억이 나는데…….
“야, 너! 뭐가 어떻게…… 어어억!”
몸을 일으키던 마웅이 배를 부여잡고 엎어졌다.
“와. 아저씨 정말 튼튼하네. 도끼에 담긴 기운이 강해서 힘 조절이 완전하지 않았는데. 맷집 하나는 산이 형과 맞먹겠는걸?”
불에 구운 산양 다리 한쪽을 내밀며, 마른 비가 말했다.
“배고프지? 밥부터 먹어, 아저씨.”
“……내가 진 거냐?”
답변은 사냥꾼들 쪽에서 나왔다.
“졌수. 피를 뿜으며 멋지게 공중 부양을 했지. 우리도 한참이나 할 말을 잃고 서 있었수. 엽장, 도끼도 박살 났으니 이참에 무기를 밧줄로 바꿔 보는 건 어떻수? 수십 년간 연마한 기술로 싸우면 이길지 누가 아우?”
“저, 저 개새끼를! 어억…!”
얼굴이 벌게져서 신음하던 마웅이 마른 비를 올려다봤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맨손으로 참웅부를 부수다니……. 대인전이 전문은 아니지만, 조직을 키우다 보면 이런저런 놈들과 충돌하기 마련이야. 하지만 한 번도 이렇게 철저하게 깨진 적은 없었다.”
“우리도 궁금하다, 꼬맹아. 엽장이 저래 봬도 어지간한 대문파의 대주급은 돼. 구파일방이나 사파의 거대 방파에서 영입 제의가 올 정도라구. 뭐, 뼛속까지 사냥꾼이라 죄다 거절하긴 했지만 말야.”
그들의 말을 듣던 마른 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웅은 강했다.
2년 전 전쟁에서 별비와 함께 쓰러뜨린 호검대주를 떠올릴 정도로.
이렇게 비교해 보니 자신이 그때보다 월등히 강해졌다는 게 실감이 났다.
“나? 와족의 마른 비야.”
언제나처럼 마른 비의 자기소개는 간략했고,
“……끝이냐?”
뒷말을 기다리던 사냥꾼들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큭큭. 그래. 출신 알고, 이름 알았으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할까.”
겨우 통증에 적응했는지 마웅이 천천히 일어났다.
“후우……. 새끼들을 데리고 나올 때 뒤를 쫓던 늑대들 중 눈에 띄는 두 마리가 있었다. 흑랑과 붉은 발톱이라고 했나? 엄청나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녀석들이 너보다 강하단 말이지?”
“아니. 흑랑은 아마 내가 이길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붉은 발톱은 아직 보지 못했어. 하지만 고유의 이름이 붙은 녀석이니 흑랑보단 월등히 세겠지.”
“뭐야. 직접 본 게 아니냐? 고유의 이름이 붙었다는 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야생의 정점에 군림하는 녀석들. 운남 사람들이 경외와 두려움을 담아서 이름을 붙여준 거야. 내가 직접 본 건 푸른 눈과 칼이빨 뿐이지만, 이름이 붙은 놈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
자신을 한 방에 눕힌 사람의 증언이다.
평생을 사냥꾼으로 살아온 마웅은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지만,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약속은 지킨다. 솔직히 말하면 놈들이 네 말처럼 강하다고 해도 난 사냥할 자신이 있다. 너도 사냥꾼인 것 같으니 잘 알 거다. 싸움과 사냥은 다르다는 것을.”
“맞아. 그 둘은 엄연히 다르지.”
마른 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약속을 했고, 난 내 입으로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 새끼들을 돌려주마. 후우… 의뢰 실패라니. 수천의 역사에 처음으로 똥칠하는 게 내가 될 줄이야.”
시원시원한 남자였다.
마른 비가 보기에 사냥꾼으로 맞서도 붉은 발톱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굳이 입을 열어 마웅에게 무안을 주고 싶진 않았다.
“잘 생각했어, 아저씨. 근데 하나 물어봐도 돼?”
“뭐냐?”
“그 의뢰라는 거, 누가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