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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35화 (135/463)

135화

마웅이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의뢰인은 밝힐 수 없다. 오해는 하지 마라. 더러운 살수 놈들처럼 켕기는 게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니까. 그저 우릴 믿고 의뢰한 사람에 대한 의리일 뿐이야. 괜히 언급을 했다가 의뢰인이 귀찮은 일에 휘말리면 안 되니까.”

“음……. 알겠어. 그럼 의뢰의 내용 정도는 말해줄 수 있지? 그 의뢰인이란 사람이 붉은 발톱의 새끼들을 납치해 달라고 한 거야?”

마웅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의뢰인은 그저 ‘희귀한’ 늑대를 원했다. 엄청난 대가를 제시하며. 하지만 그런 늑대가 얼마나 있겠냐. 그러던 참에 예전에 거절했던 의뢰가 떠오른 거지.”

“예전에… 거절했던 의뢰?”

마른 비는 묘한 예감을 느끼며 마웅의 말에 집중했다.

“수천에 들어오는 의뢰란 건 보통 뻔하다. 고기나 약재, 모피 따위를 얻기 위한 짐승 사냥. 인간을 해치는 맹수나 악수의 토벌. 아니면 이번 경우처럼 희귀 동물을 원하거나 특정 짐승의 신체 부위를 요구하기도 하지.”

“앞의 두 개는 이해가 가. 근데 마지막은 좀 그러네.”

순전히 관상이나 소장, 수집을 위해 짐승을 해친다는 말인데…….

마른 비는 아무래도 세 번째 경우는 좋게 보기 힘들었다.

특히나 짐승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된 지금은 더더욱.

그나마 여규에게 한족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상에 대해 들었기에 어렵게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아, 너에겐 생소할 수도 있겠군. 중원에서도 흔한 건 아니다. 돈이 썩어나는 자들의 취미 정도라고 봐야지. 아무튼 수천에 들어오는 의뢰는 그 세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아. 그런데 3년 전, 매우 특이한 의뢰가 들어왔었다.”

“어떤 의뢰였길래?”

“지금도 의뢰인에 대해서는 모른다. 정체를 숨겨줄 것을 당부했는지 엽주가 알려주지 않더군. 하지만 의뢰의 내용은 기억해. 바로 이 석림에 있는 늑대 우두머리의 새끼를 납치해 달라는 거였다.”

“붉은 발톱의 새끼를?”

예감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마른 비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단순히 그것뿐이었다면 수락했을 거다. 하지만 의뢰인은 납치한 새끼를 근처 토착부족의 마을에 던져놓으라고 했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의뢰였지. 만약 우리가 수락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나?”

“역시…!”

짐작이 간다.

딱 한 명뿐이리라.

저런 얼토당토않은 의뢰를 수천에 넣을 자는.

‘점창의 병력으로 붉은 발톱의 새끼를 납치하려면 상상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을 테니 수천에 의뢰를 넣었구나!’

“뭐냐? 너, 뭔가 알고 있는 눈친데?”

딱딱하게 굳은 마른 비의 표정을 보며 마웅이 물었다.

“아냐. 아저씨. 계속 이야기해 줘.”

“흠…… 그래. 우리는 사냥꾼들이지, 인간 백정이 아냐. 의뢰는 당연히 거절했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건 있지. 늑대 우두머리의 특징을 물었을 때, 의뢰인은 보는 순간 알 거라고 했다더군.”

“……?”

아직 붉은 발톱을 보지 못한 마른 비다.

그래서 마웅의 뒷말이 더욱 궁금했다.

“매우 희귀한, 피처럼 붉은 털을 지닌 늑대. 당시엔 코웃음 쳤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이번 의뢰의 조건에 부합하지. 이 먼 곳까지 우리가 파견을 나온 이유다.”

“붉은 발톱의 털빛이…….”

이름을 듣고 막연하게 발톱이 붉은색이겠거니 했다.

한데 핏빛의 털이라니.

자줏빛 털을 지닌 외톨이만큼이나 특이한 녀석인 모양이었다.

“호진. 새끼들을 데려와라.”

“……진짜 의뢰를 포기하는 겁니까?”

호진의 음성에선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리고 염려도.

“진 엽장한테 빌미를 주는 꼴일 텐데요.”

“헹! 마음대로 해보라지. 제까짓 게 어쩌려고?”

마웅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코웃음 쳤다.

“내 입으로 뱉은 말이다.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할 거면 접싯물에 코 박고 뒈져야지.”

마웅이 훤한 머리를 쓸며 말했다.

그런 마웅에게 마른 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꽤 곤란해질 분위긴데? 아저씨, 괜찮겠어?”

“전혀. 아무 문제없다.”

큰소리 탕탕 치는 마웅을 물끄러미 보던 마른 비가 오른 주먹을 내밀었다.

“아저씨, 얼굴은 무섭게 생겼는데 좋은 사람이구나. 친구 하자.”

“……?”

처음 보는 동작이 의아하지만, 눈치로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마웅이 솥뚜껑 같은 주먹을 마주 내밀었다.

“내 얼굴이 뭐가 어때서? 마누라는 볼 때마다 귀엽다고 하는데.”

툭.

주먹과 주먹이 맞닿고, 마음과 마음이 만났다.

“꼬맹이. 어디서 뭐 하다 온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네가 마음에 든다. 친구 먹고, 다음에 다시 한판 붙자.”

나쁘게 말하면 산적 두목이요, 좋게 보면 남자답게 선 굵은 얼굴이다.

어찌 됐든 마웅은 생김새처럼 시원시원한 남자였다.

나이, 출신, 배경.

그따위 게 무슨 상관이랴.

마음에 들면 그만이다.

운남 원시 부족의 소년과 중원 최고의 사냥꾼 중 한 명은 그렇게 만났다.

“새끼들을 데려왔습니다. 엽장.”

쇠창살로 만든 휴대용 우리.

축 처진 새끼 늑대 다섯 마리가 다섯 개의 우리에 갇혀 있었다.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 좁은 공간에 한 달간 갇혀 있으면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마른 비가 눈살을 찌푸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크르르…….”

그러나 곧 마른 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섯 개의 우리 중 하나.

새끼 한 마리가 팔팔하게 날뛰며 이빨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크앙! 캉!”

녀석은 다섯 마리의 새끼 중에서도 한눈에 띄었다.

다른 네 마리의 새끼가 옅은 붉은색이라면, 녀석의 털은 피처럼 붉었기 때문이다.

“크아앙!”

한 달간 갇혀 있었음에도 녀석은 투지를 잃지 않았다.

자신을 납치한 무리의 수장이 마웅이란 걸 아는지,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적의를 드러냈다.

“허어. 지치지도 않나. 한 달 내내 이러더군. 대단한 물건이야, 이놈. 크면 아마 엄청난 맹수가 될 거다.”

마웅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리고 마른 비를 돌아봤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중간에서 만나 새끼들을 건네줄까? 인간들이 협상하듯이? 아니, 잠깐……. 우리가 놈들을 공격했는데 새끼들을 건네준다고 우릴 가만둔다는 보장이 있나?”

그제야 중요한 부분에 생각이 미친 마웅이 미간을 찌푸렸다.

“걱정 마. 아저씨들, 새끼들을 납치할 때 늑대들을 죽이지 않았다면서? 정말 잘한 거야. 그리고 석림의 늑대들에게는 새끼들의 안전이 우선이야. 협상은 잘될 거야.”

마른 비가 이빨을 드러낸 새끼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놀랍게도 사냥꾼들에게는 적의를 보이던 녀석이 마른 비에게는 머리를 내주며 얌전해졌다.

여기저기서 ‘허!’ 하는 탄성이 터졌다.

“짐승들과 협상이라니…….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는군. 좋다. 널 믿는다. 그럼 이제 놈들에게 가서….”

“아니. 내 친구가 이미 갔어. 우리가 나눈 이야기도 전달이 되었을 거야.”

“친구… 라니?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그렇지? 별비야?”

마른 비가 사냥꾼들의 뒤편을 보며 말했다.

홱 돌아가는 고개.

사냥꾼들의 뒤편, 높게 솟은 돌산 위에는 새하얀 범이 햇살을 가리며 서 있었다.

“반가워. 드디어 만나네. 네가 붉은 발톱이구나.”

백호의 옆.

새하얀 털빛과 대조되는 핏빛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덩치는 별비보다 작지만, 뿜어내는 존재감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아니, 발을 디딜 때마다 다가오는 기운은 별비의 기세를 앞지르고 있었다.

석림의 붉은 제왕이 바야흐로 인간들 앞에 옥체를 내보인 순간이었다.

“이… 이럴 수가…!”

다르다.

늑대들의 보금자리를 빠져나오며 먼발치서 봤을 때와는.

자신들이 그랬듯이 힘을 숨긴 것인가?

진정한 힘을 드러낸 붉은 발톱은 수천 사냥꾼들로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 이런 걸 잡겠다고 큰소리를…!’

마웅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붉은 늑대에게서 발산되는 어마어마한 기세.

평생을 사냥꾼으로 살아왔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

눈앞에 있는 야수가 얼마나 엄청난 괴물인지를.

범을 마주한 토끼처럼, 수천 사냥꾼들은 기세에 눌려 움직이지도 못하고 떨 뿐이었다.

투벅 투벅.

붉은 발톱은 앞마당을 산책하듯 태연하게 걸어왔다.

점차 농밀해지는 야수의 기운에 줄줄이 서 있는 사냥꾼들이 도망치듯 물러났다.

붉은 발톱이 철창에 갇힌 새끼들의 앞까지 다다랐을 때, 침을 꿀꺽 삼킨 마웅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여, 열쇠를…….”

붉은 발톱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건 확실한데,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자신의 키보다도 한 뼘 위에 있는 늑대의 눈을 마주 보며, 마웅이 열쇠를 앞으로 내밀었다.

“……?”

붉은 발톱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아차…!’

도저히 짐승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존재여서일까?

아니면 두려움에 잠식돼서 정신을 놓은 걸까.

‘이런 병신! 늑대에게 열쇠를 주면 어쩌자는 말이냐!’

마웅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내, 내가 열어 주겠소.”

늑대에게 반 공대를 쓰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마웅은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스윽.

붉은 발톱이 작게 고개를 저으며 오른쪽 앞발을 들었다.

녀석이 마웅의 반응을 재미있어 한다는 걸 눈치챈 건 마른 비뿐이었다.

서걱.

수천의 사냥꾼들이 또 한번 석상처럼 굳을 일이 벌어졌다.

붉은 발톱이 앞발로 철 우리를 쓰다듬자, 강철로 된 철창이 두부처럼 잘려나갔다.

찰나의 순간, 새하얀 발톱이 튀어나와 철창을 자르는 걸 본 사람은 마른 비와 마웅뿐이었다.

“끼이잉, 낑…!”

풀려난 새끼들이 붉은 발톱에게 쩔뚝이며 달려갔다.

붉은색 기둥 같은 앞발에 머리를 부비며, 새끼들은 그간의 고충을 토해내듯 낑낑댔다.

“크아앙!”

단 한 마리.

붉은 발톱을 축소한 듯 새빨간 털을 지닌 새끼만이 풀려난 후에도 문제없이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마웅에게 달려들었다.

“어?!”

이건 마른 비도 예상하지 못했다.

당사자인 마웅은 더 당황했다.

아직 어린 녀석이라 제압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코앞에 붉은 발톱이 있는 상황에서 손을 쓰기가 난감한 것이다.

상황을 정리한 건 붉은 발톱이었다.

터턱.

날아오른 녀석을 앞발로 제지하고, 끌어안듯 품으로 당긴다.

진정하라는 듯 혀로 머리를 몇 번 핥자, 씩씩대던 녀석이 겨우 분을 가라앉혔다.

새끼들을 확보한 붉은 발톱이 마른 비를 바라봤다.

〔네가 ‘그’의 자식이구나.〕

“어?!”

마른 비는 소스라칠 듯 놀랐다.

‘이, 이게 뭐야? 언령?!’

동물들의 의사를 마른 비가 일방적으로 읽는 것과는 다르다.

와족의 전사들이 자연기를 이용해 의지를 전달하듯, 붉은 발톱은 자신의 뜻을 전해오고 있었다.

『너… 너… 언령을 사용할 줄 알아?』

마른 비가 얼떨떨한 얼굴로 더듬더듬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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