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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36화 (136/463)

136화

〔언령? 인간들은 이것을 언령이라고 부르는가? 그저 대자연의 기운에 의지를 싣는 것 아닌가. 별로 어려운 건 아니지. 받아들일 준비가 된 인간이 아니면 전달되지 않을 뿐.〕

받아들일 준비가 된 인간.

대상이 한정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언령과는 다른 무엇이었다.

또한 푸른 눈이나 검치호가 이런 걸 사용하지 않았던 걸 감안하면, 단순히 힘이 세다고 구사할 수 있는 기술은 아닌 게 분명했다.

『후아…! 깜짝 놀랐네. 이걸 목소리라고 해야 하나. 울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진짜 신기하다! 별비에게도 가르쳐줄 수 있어?』

그 말에, 붉은 발톱이 별비를 돌아봤다.

저 뒤에 심드렁하게 있던 백호는 ‘뭐? 왜?’라는 눈빛으로 그 시선을 받았다.

〔아마 가르쳐 준대도 거절할 거다. 잠깐 이야기해 보았는데, 저건 발톱이 여문 지도 얼마 안 되는 녀석이 왜 저렇게 삐딱한가?〕

『삐딱? 왜?』

〔보자마자 싸우고 싶다는 기색을 팍팍 풍기더군. 내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오는 내내 인상을 쓰고 있었고.〕

『큭큭. 그랬어? 아마 네가 더 강하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걸 거야. 인간들은 그걸 호승심이라고 해.』

〔그런가? 덩치에 맞지 않게 귀여운 녀석이군.〕

붉은 발톱이 살갑게 다가와서일까?

마른 비는 어느새 녀석과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른 비를 바라보는 붉은 늑대와, 입술을 달싹이며 웃음을 터뜨리는 마른 비.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지만, 수천의 사냥꾼들은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침묵을 지켰다.

〔네 덕분에 새끼들을 구할 수 있었다. 네가 오지 않았다면, 난 공격 명령을 내렸을 거야. 인간들은 전멸하고, 내 새끼들도 모두 죽었겠지. 고맙다.〕

『아냐. 도와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마른 비가 히죽 웃었다.

『그럼 이제 약속 지킬 거지? 새끼들을 돌려주었으니 저 사람들을 놔줘.』

붉은 발톱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의사를 전해왔다.

〔우린 네 아비가 식구들을 살려준 이래로, 한 번도 먼저 인간을 공격한 적이 없다.〕

‘어?’

바로 약속을 지키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뭔가 심상치 않다.

미소를 그렸던 마른 비의 입매가 서서히 굳었다.

〔대신 우린 우리를 먼저 공격한 놈들은 절대 살려두지 않는다. 그건 한 번도 깨진 적 없는 석림의 철칙이야.』

『붉은 발톱…… 너, 너 설마…….』

마른 비의 눈가가 잘게 경련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돌산은 어느새 소리 없이 나타난 늑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크르릉…….”

웃음기 없이 굳어버린 마른 비의 표정과 이빨을 드러낸 늑대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사냥꾼들이 헛바람을 삼켰다.

“이, 이런 젠장…….”

“그럼 그렇지. 짐승과 협상이라니…! 여, 엽장, 어떻게 할 거요?! 우, 우리 다 죽게 생겼소!”

붉은 발톱은 늑대들을 대동하지 않은 채 홀로 왔다.

그게 새끼들을 확보하고, 늑대들이 덫과 함정을 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을 줄이야!

완전히 얼어버린 사냥꾼들 틈에서 마웅이 나지막이 말했다.

“꼬맹아. 우리, 여기서 죽는 거냐?”

마른 비는 답하지 못했다.

눈치로 보아 붉은 발톱에게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했다.

“후우……. 내 잘못이군. 짐승의 말을 알아듣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꼬맹이의 힘에 놀랐다. 판단력이 흐려졌어. 당연히 약속이 지켜질 거라 믿다니……. 뱉은 말을 지켜야 한다는, 웃기지도 않는 허세가 일을 더 악화시켰어.”

마웅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미안하다, 모두.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어떻게든 해 보마.”

사냥꾼들에게 고개를 숙인 마웅이 붉은 발톱에게 걸어갔다.

그의 눈에서 두려움은 사라져 있었다.

“너 같은 영물이라면 내 말을 알아듣겠지.”

마른 비의 줄기찬 언령에도 침묵을 지키던 붉은 발톱이 마웅을 돌아봤다.

“이들은 내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너도 우두머리니 내 심정을 알겠지. 너희를 공격한 책임은 내가 지겠다. 부디, 이들을 돌려보내다오.”

짐승이 허리를 숙인다는 것의 의미를 알까.

어떤 처분도 달게 받겠다는 듯 직각으로 허리를 꺾은 마웅이다.

붉은 발톱은 무방비한 그의 뒤통수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흑랑의 말을 믿고, 내가 이 사람들에게 제안한 거야! 네가 이들을 공격하려면, 나부터 죽여야 할 거야!”

마른 비가 씩씩대며 마웅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마웅에게 외쳤다.

“아저씨! 허리 펴! 아저씨는 잘못한 거 없어! 새끼들을 납치한 건 잘못이지만, 이 제안은 늑대들이 먼저 한 거야! 그건 앞의 일들을 덮어두자는 뜻이고! 그리고 아저씨들은 늑대들을 한 마리도 죽이지 않았잖아!”

쿠구구구-

분노한 마른 비가 감췄던 힘을 방출했다.

눈이 푸르게 타오르고, 공간이 일렁인다.

붉은 발톱의 기운에 잠식됐던 돌산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이, 이 녀석…! 전력을 다했던 게 아니었나!’

고개를 든 마웅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참웅부를 파훼하고, 도끼를 깨부순 건 약과였다.

진정한 힘을 드러낸 마른 비는 이미 내로라하는 대문파의 장로급 이상의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내가 잘못 봤어. 자연기가 틀릴 때도 있구나. 너, 비열해.”

이글거리는 청화(靑火) 한 쌍이 석림의 제왕을 노려본다.

붉은빛에 맞서는 푸른빛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난 여기서 죽겠지만, 너도 성하진 않을 거야. 각오해.”

“크르릉…….”

“시끄러. 지금 와서 그런 말 해봤자…… 어? 뭐라고?”

잘못 본 걸까?

보일 듯 말 듯 한 곡선을 그린 붉은 발톱의 주둥이는 마치 사람이 웃는 것만 같았다.

“전하라고? 뭘?”

“그르릉.”

“내가… 너희를 살려 주는 이유는…… 세 가지다?”

마른 비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늑대의 의지.

삶을 포기한 채 망연자실해 있던 사냥꾼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크르르르르…….”

“첫째, 나의 식구가 하나라도 죽었다면… 협상 따윈 없었다. 둘째, 중재에 나선 것이 ‘그’의 아들이기에 내가 양보하는 것임을 알라. 셋째, 너희의 수장이 책임을 아는 사내라는 점에 감사하라.”

이게 정말 짐승이 하는 말이라고?

사냥꾼들 모두가 마른 비의 입을 바라보며 멍청히 서 있었다.

그러나 붉은 발톱의 전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크르릉…….”

“다신 석림을 찾지 마라. 그대들과 같은 냄새를 풍기는 자가 또다시 진입한다면, 그땐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니.”

붉은 늑대가 약속을 지킬 모양이다.

삶을 포기했던 자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소리죽여 환호했다.

“절대, 절대 이곳에 오지 않겠습니다!”

“암요, 그렇고말고요!”

사냥꾼들.

그들은 짐승을 사냥하지만, 동시에 자연을 경외하는 자들이다.

평생을 야생에서 살아가기에 대자연의 위대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대적할 수 없고, 이성을 지닌 붉은 늑대는 숫제 산신령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크르르.”

“너희의 터전으로 돌아가라. 이 청년과 사내 덕에 목숨을 구한 줄 알도록.”

“가, 감사합니다!”

“저희가 죽을죄를 지었구만유!”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 어떤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당장은 목숨을 구한 것에 안도할 따름이다.

사방을 둘러싼 늑대들의 눈치를 살피며, 수천의 사냥꾼들이 떠날 준비를 했다.

“놔주는 건가…!”

마웅이 눈을 꾹 감으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사냥을 자신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직접 마주한 붉은 늑대는 대적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숨을 구한 원시 부족의 청년도.

“꼬맹이. 네 말이 맞았다. 네가 오지 않았다면 우린 몰살했을 거야.”

마웅이 마른 비를 바라봤다.

“가슴이 철렁했어. 정말 다행이야, 아저씨.”

이 어린 친구는 자신들을 살렸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그게 마웅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덕분에 식구들이 살았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으마.”

“아냐. 잊어버려. 부담스럽게 그러지 마.”

햇살 아래 하얗게 웃는 청년은 눈부시기만 했다.

“꼬맹아. 난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다. 넌 이런 변방에서 머무를 남자가 아냐. 언젠가 꼭 중원으로 나와라. 그리고 수천을 찾아. 이 마웅이 너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 주겠다.”

그것은 확신이다.

또한 미래로 이어질 약속이기도 했다.

마른 비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중원…! 알았어, 아저씨. 꼭 그렇게 할게.”

막연하게 그리던 미래가 뚜렷해지는 순간이다.

화통달과의 인연이 그랬듯 마웅과의 만남은 마른 비에게 다른 세상으로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근데 네 친구라는 게…… 설마 저거냐?”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푸른빛의 눈.

사방신의 하나로서 서쪽을 수호하는 상서로운 존재.

돌산 위에 우뚝 선 백호는 모두의 이목을 끌어 당기기에 충분했다.

“응. 별비라고 해. 내 제일 소중한 친구야.”

“……엄청나군.”

마웅이 옅게 신음을 흘렸다.

실존하기만 한다면 용조차 사냥할 거라는 게 수천에 대한 세간의 평가다.

한 번도 사냥에 실패한 적 없는 최고의 사냥꾼들.

하지만 오늘부로 그 평가를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지. 모든 준비를 갖추고, 셋 이상의 엽장이 달라붙으면…….’

그러면 가능할 것도 같다.

엽주를 제외하면 스스로를 최고라 여기는 그들이 협동을 할지는 미지수지만…….

“후우……. 운남. 운남. 못 잡을 짐승이 없다고 여겼는데……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짧은 탄식을 끝으로, 마웅이 고개를 들었다.

“짐 챙겨라, 이것들아. 복귀한다.”

“그르릉.”

저놈,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별비의 울음에 마른 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고?”

“가릉.”

그래. 일부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거다.

인간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려고.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고, 죽다 살아났다고 생각해야 허튼 생각을 못 할 테니까.

그래서 내가 가만히 있었던 거다.

“붉은 발톱! 진짜야?”

앞서 걷던 붉은 발톱이 대꾸했다.

〔새끼들을 무사히 돌려받는다면 그럴 생각이었지. 하지만 최종 결정은 저들을 직접 본 후에 할 생각이었다.〕

“왜?”

〔악한 인간이라면 다시 문제를 일으킬 테니까. 저들의 우두머리가 썩 괜찮은 인간이라 살려 보낸 것이다.〕

“그건 그럴 수 있겠네.”

마른 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무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볼을 부풀렸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야.”

마른 비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붉은 발톱은 낮게 울었다.

〔너는 나에게 인간들의 개념을 들이미는구나. 나나 흑랑은 그렇다 쳐도 다른 늑대들이 약속의 의미를 이해하리라 생각하는가? 나조차도 놈들이 위협적이라 여겨졌다면 망설임 없이 제거했을 것이다.〕

마른 비가 볼을 더 부풀리건 말건, 붉은 발톱은 인간으로 비유한다면 진지한 어투로 의사를 전해 왔다.

〔이제 네가 날 찾은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자. 너, 애뢰산 산군이 목표인 거지?〕

“알고 있었구나! 맞아. 난 칼이빨을….”

붉은 발톱은 마른 비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그리고 매우 단정적인 느낌의 의사를 전해왔다.

〔포기해라. 넌 그 녀석을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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