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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37화 (137/463)

137화

마른 비보다 격한 반응을 보인 건 별비였다.

“크헝!”

네놈이 뭘 안다고 포기해라 마라 훈수를 두는 거냐!

검치호의 이야기가 나오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별비다.

별비는 붉은 발톱에게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이빨까지 드러냈고, 마른 비가 그런 별비를 말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하는 말이겠지? 말해줄 수 있어?”

〔달리 무슨 이유가 있겠나. 간단하다. 너희가 약하기 때문이다.〕

‘약하다.’

그 말이 마른 비는 물론이고, 별비에게 주는 영향은 지대했다.

‘약해서’ 무력하게 잽싼 다리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약해서’ 은빛여우와 실바람을 뒤로 한 채 도망쳐야만 했다.

‘약해서’ 가족이 몰살을 당했으며, ‘약해서’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는 독림에서 숨어 지냈다.

당장이라도 검치호를 쓰러뜨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도 ‘약하기’ 때문이다.

진실에 기반한, 붉은 발톱의 도발 아닌 도발은 마른 비와 별비의 가슴을 헤집기에 충분했다.

“크허허허허헝!”

소 피를 뒤집어쓴 똥개 같은 놈이 어디서 그따위 개소리를 늘어놓느냐!

죽여 버리겠다!

마른 비가 말릴 새도 없었다.

격노한 별비는 폭발하듯 뛰쳐나갔고, 하얀 거체가 붉은 짐승을 덮쳤다.

〔이래서 약하다는 것이다.〕

무지막지한 기세로 쇄도하는 별비를 보면서도, 붉은 발톱은 침착하기만 했다.

탓!

땅을 박차는 도약음.

앞? 위? 그도 아니면 왼쪽이나 오른쪽?

아니다. 뒤다.

붉은 발톱은 뒤로, 그것도 아주 짧게 기동했다.

부아아악!

푸른 기운이 맺힌 별비의 앞발은 말 그대로 공간을 찢어발겼다.

요동치는 대기와 헝클어진 자연기.

붉은 발톱은 딱 공격의 여파가 미치는 거리까지만 물러섰고, 앞발이 허공을 긁자마자 곧바로 전진했다.

“크허헝!”

그딴 얄팍한 수에 당할 것 같으냐!

무수한 싸움을 거듭한 별비다.

회심의 일격이 빗나갔지만, 별비는 이미 다음을 대비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붉은 늑대의 머리를 향해 하얀 일격이 휘둘러졌다.

부아아악!

“?!”

‘퍼억!’이란 소리가 나야 한다.

피가 흩뿌려지고, 내동댕이쳐진 똥개가 땅에 부딪히고 날아올라야 한다.

한데 허전하다.

앞발이 긁고 간 공간에는 붉은 잔상만이 남아있었다.

콰악!

포효는커녕 낮은 울부짖음도 없다.

이 노련한 늑대는 찰나를 쪼개며 묵묵하게 전투를 수행할 뿐이다.

붉은 발톱이 별비의 목을 문 채로 회전했다.

“크아아아앙! 커헝…!”

별비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자연기를 응집한 턱만으로도 충분할 터.

하지만 붉은 발톱은 작심했는지 회전까지 더해 별비의 목덜미를 찢었다.

외피에 두른 자연기가 뚫리고, 극심한 부상을 입은 별비가 의식을 잃었다.

쿠웅!

마른 비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별비가 쓰러지고, 붉은 발톱이 몸을 돌리자, 마른 비는 그제야 싸울 태세를 갖췄다.

“다음은 내 차롄가? 별비랑은 다를 거야. 긴장해.”

청년은 아무런 동요도 내비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붉은 발톱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친구가 당했는데도 분노하지 않는가? 약하다는 조롱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단 말이냐? 너에겐 의리도, 자존심도 없는가?〕

“일부러 그런 거잖아.”

마른 비는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시험? 뭐 그런 거 아니야? 뭐가 됐든 좋아. 네 말대로 우린 약하고, 강해져야만 해. 시작한 이상, 네가 책임지고 우릴 강하게 만들어.”

부탁은 부탁인데, 명령에 가깝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붉은 발톱이 인간이었다면 흡족하게 웃었으리라.

〔이 흰 호랑이는 강하다. 침착하게 덤볐다면 나도 이렇게 쉽게 쓰러뜨리진 못했겠지. 너마저 이성을 잃었다면 난 너희를 때려눕히고 미련 없이 뒤돌았을 거다. 두 놈이 다 그런다면 아예 가망이 없는 거니까. 어떤 상황, 어떤 도발에도 흔들리면 안 된다는 걸 명심해라.〕

“알았어. 별비가 깨어나면 별비에게도 전할게.”

〔시간 끌 필요 없겠지. 바로 시작하자. 덤벼라.〕

푸른빛을 두른 청년이 붉은 맹수에게 달려들었다.

“별비! 집중해!”

사방이 돌산으로 가로막힌 분지.

마른 비의 고함이 분지 너머까지 터져나갔다.

“크허헝!”

너나 잘해라!

이번에도 저놈을 못 눕히면 쪽팔려서 얼굴 들고 살 수 있겠냐!

별비가 대꾸하며 횡으로 기동했다.

잔상을 남기며 이동하는 하얀 섬광의 첨단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마른 비가 별비와 만났다.

“하아아앗!”

“크허헝!”

힘의 극대화.

혼으로 이어진 일인일수의 자연기가 공명한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린 일격에는 마른 비와 별비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중첩된 자연기가 뻗어 나가며 대지를 뒤흔드는 십자포화가 붉은 늑대를 덮쳤다.

“크아아아앙!”

가벼이 볼 수 없는 힘이다.

어지간해선 울부짖지 않는 붉은 발톱이 목청껏 포효를 터뜨렸다.

추아아아악!

다섯 줄기 붉은 궤적이 허공에 그어졌다.

무인으로 치자면 성명절기나 다름없다.

붉은 발톱의 이름을 운남 전역에 떨치게 된 일격이 대기를 갈랐다.

쿠콰콰카아앙!

십자형 푸른 기운과 다섯 줄기 붉은 궤적이 정면으로 충돌하자, 병풍처럼 둘러친 암석들이 후폭풍을 못 이기고 터져나갔다.

후두둑 떨어지는 돌조각과 휘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결과를 기다리는 마른 비와 별비의 눈에 긴장감이 어렸다.

투벅, 투벅.

뿌연 먼지를 뚫고 붉은 짐승이 다가온다.

앞발 하나를 쩔뚝이긴 하지만, 큰 손해는 없어 보였다.

마른 비의 얼굴에 실망이 어리고, 별비는 힘이 빠진 듯 낮게 울었다.

〔기절하기 전에 머리에 새겨 넣도록. 현재를 직시해야 미래가 열리는 법이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해라. 그리고 세월을 녹여 힘을 쌓아 올리는 것이다.〕

“그르릉…….”

이런 미친…….

저거 늑대 맞아?!

힘들어 죽겠는데 뻘건 꼰대가 잔소리는…….

별비의 투덜거림을 끝으로, 둘은 맞추기라도 한 듯 혼절했다.

〔…….〕

마른 비와 별비를 내려다보는 붉은 발톱의 눈이 깊어졌다.

한 달. 고작 한 달이다.

이 두 녀석이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낸 기간은.

물론 둘이 함께 덤빈 결과지만, 그것만으로도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힘의 무게추는 뒤집힐 게 분명했다.

정말 대단하군.

검은 늑대가 다가오며 낮게 울었다.

세월이 배인 눈동자에는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오셨습니까. 흑랑.〕

붉은 발톱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그늘 안에 있지만, 이 나이 지긋한 늑대는 존중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전상이 긴 코에게 그랬듯, 붉은 발톱 또한 흑랑에게 존경의 염을 표하고 있었다.

“그르르.”

‘그’의 자식과, 애뢰산 전 산군의 새끼.

인연이 이렇게 이어질 줄 누가 알았겠나.

핏줄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한 꼬마들이야.

자네가 고생이 많군.

흑랑이 붉은 발톱의 노고를 다독였다.

〔별말씀을. 흑랑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이리했을 겁니다. 새끼들을 구해준 보답은 해야죠.〕

“그릉?”

이 꼬마가 마음에 든 건 아니고?

흑랑의 울음은 마치 다 안다는 듯한 인간의 웃음을 닮아 있었다.

〔……부정할 수 없군요. 묘한 인간입니다. 의사를 주고받을수록 점점 감화되더군요. 제가 이 정도니 다른 식구들이 껌뻑 죽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단련이 끝나면 다들 ‘비아’의 곁에 머무르려고 진을 치고 있더군요.〕

‘비아.’

붉은 발톱은 마른 비의 이름을 명확히 불렀다.

야생의 짐승이, 그것도 고유의 이름을 지닌 존재가 친밀함을 담아 인간의 이름을 부르는 건 운남의 역사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르릉.”

특히 ‘첫째’가 비아를 많이 따르더군.

첫째.

마웅에게 앙칼지게 덤비던 붉은 발톱의 새끼를 일컬음이다.

다섯 마리의 새끼 중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녀석은 육체와 정신, 모든 면에서 붉은 발톱을 가장 많이 닮아 있었다.

석림의 늑대들 모두가 붉은 발톱의 후계자로 생각하는 ‘첫째’는 수천 사냥꾼들에게서 풀려난 이후, 마른 비의 옆에 붙어 있다시피 했다.

심지어 최근엔 반려수인 별비를 질투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어 몇몇 늑대들의 걱정을 자아내기도 했다.

〔석림의 늑대가 인간을 따르다니. 재미있는 현상이에요. ‘그분’말고는 인간에게 정을 붙인 석림의 늑대는 없지 않습니까.〕

“그르릉.”

아, ‘그분’ 말인가. 내 아버지께 듣기로는 석림에 있을 때도 유별났다고 하더군.

붉은 발톱과 흑랑이 떠올린 건 자줏빛의 늑대였다.

흑랑조차 직접 조우하기 전까지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선조.

전전대의 우두머리로 확실시됐지만, 무리 생활을 싫어하고 홀로 다니길 즐겼던 별종이라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인간과 긴 세월에 걸쳐 싸우더니, 결국 패하고 그 인간을 따라갔다고 했다.

동족들에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수년이 지나 흑랑이 태어나고, 각성하여 인간들을 해쳤을 때, 인간들을 따라온 선조는 기절한 흑랑을 깨워 그들의 말을 전했다.

흑랑이 고분고분하게 따른 이유가 크지만, 너른 하늘이 인간을 해친 늑대들을 죽이지 않은 배경에는 외톨이의 중재가 큰 부분을 차지했었다.

“크릉.”

걱정되지 않나.

첫째가 저렇게 인간을 따르는데.

흑랑의 울음에 붉은 발톱은 곧바로 대꾸했다.

〔전혀요. 제 피를 가장 진하게 이어받은 아이입니다. 정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입장을 잊을 리 없죠. 그리고 비아는 이미 흰 호랑이와 이어졌습니다. 첫째가 비아를 따라나설 일은 없을 겁니다.〕

놀랄 만한 일이다.

붉은 발톱의 울음에는 와족의 반려수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담겨 있었다.

평범한 인간들은 물론이요, 운남 짐승들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는 와족조차 석림 늑대들의 지능 수준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흑랑. 제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했습니다. 뒤를 부탁드립니다.〕

흑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대체…!”

마른 비의 눈빛이 흔들렸다.

별비는 동요하는 걸 넘어 경악을 토했다.

수백 마리의 늑대들이 한데 뭉쳐 만들어 낸 포위진.

돌산 중앙에 갇힌 마른 비와 별비는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크항?!”

어떻게 이럴 수가?!

별비의 날카로운 울음은 그럴 만했다.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상대도 안 되는 놈들이다.

앞발 한 번 휘두르기만 해도 우수수 나가떨어질 녀석들이 정교한 지휘 아래 엄청난 압박을 가해오고 있었다.

포위진을 형성한 늑대들의 중심에는 흑랑이 있었다.

〔흑랑께서 이끄는 집단 사냥은 나조차도 애를 먹을 정도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발버둥 쳐 보도록.〕

돌산 꼭대기에서 양측의 전투를 지켜보는 붉은 발톱이 담담히 의사를 전해 왔다.

“크항!”

저 꼰대가 제 일 아니라고 속 편하게 지껄이기는!

짧은 투덜거림과 함께 마른 비와 별비가 늑대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르릉…….”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했네.

흑랑은 피곤에 절어 있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나자빠진 마른 비와 별비.

둘의 주위에는 수백 마리의 늑대가 낑낑대며 엎어져 있었다.

〔또 한 달…….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군요.〕

붉은 발톱의 울음은 인간의 침음에 가까웠다.

마른 비와 별비는 고작 한 달 만에 흑랑이 이끄는 석림의 늑대들과 막상막하의 접전을 펼치는 수준에 다다랐다.

붉은 발톱은 자신의 성장세에 경악을 토했던 짐승들의 심정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으윽……. 몸이 움직이질 않아……. 붉은 발톱, 어때?”

벌써 의식을 차렸는가!

회복 속도도 경이로울 따름이다.

마른 비는 바닥에 엎어진 채 겨우 고개만 돌려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발톱이 인간처럼 혀를 찼다.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놀랍구나.〕

“히히.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 싸움에 제법 재능이 있나 봐.”

“가르릉.”

두드려 맞고 뻗은 주제에 좋다고 웃는 거 봐라.

쪽팔리지도 않냐?

어느새 정신을 차린 별비가 끙끙대며 고개를 돌렸다.

이 욕심 많은 호랑이는 이 정도로도 만족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 칼이빨에게 가도 되겠지? 마을로 복귀해야 하는 날짜가 얼마 안 남았어. 우리가 죽든, 그놈을 죽이든. 성년식이 끝나기 전에 결판을 낼 거야.”

2년 전에 마을을 나온 순간부터.

마른 비와 별비는 그렇게 정했다.

녀석을 압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래. 그게 현명한 판단일 수는 있겠지.

그럼 그게 언제일까?

5년? 10년? 어쩌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른다.

원한은 쌓아두면 독이 된다.

당장은 티가 나지 않지만, 한이 맺힌 자의 심신을 끝없이 갉아먹는다.

무엇보다 검치호를 쓰러뜨리지 않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마른 비와 별비의 시간은 소중한 이들이 쓰러진 날 이후로 멈춰 있었다.

하지만 붉은 발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대로는 이길 수 없다. 놈은 나보다 월등히 강하다.〕

“크아아앙!”

그럼 뭘 어쩌란 말이냐.

기약 없이 힘만 키워?

그놈을 능가하는 게 언제가 될지 모르는데?

우린 갈 거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서 놈을 사냥한다.

난 더 이상 못 기다려!

별비가 격하게 울부짖었다.

〔끝까지 들어라. 난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이길 수 없다고 했지.〕

“……이대로는?”

마른 비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집중했다.

“그 말은…….”

〔그래. 있다. 놈을 쓰러뜨릴 힘을 손에 넣을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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