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138화 (138/463)

138화

기연

휘황한 달빛을 머금은 바람이 고산의 등허리를 질주한다.

고산(高山)이며, 또한 고산(古山)이다.

태고의 원시를 품은 운남의 심장, 애뢰산이 훑어 내리는 산풍에 몸을 떨었다.

사사삭―

밤의 장막을 가르는 두 개의 그림자.

산을 휩쓰는 바람이 힘내라는 듯 그 등을 떠밀어 주었다.

산등성이를 달리는 그림자의 눈이 스치듯 발아래의 풍광을 담아냈다.

“우와아~ 멋지다! 별비야!”

쏟아지는 달빛이 산맥을 적신다.

별을 인 산줄기들은 머나먼 미지의 땅을 희구하듯 지평선 너머로 내달렸다.

하늘을 갈망하듯 치솟은 봉우리들과, 땅에 이르길 꿈꾸는 밤하늘의 별들.

가쁘게 치닫는 와중에도, 마른 비는 닿을 듯 닿지 않는 그 간극이 아쉽기만 했다.

“그르르…….”

헛소리하지 말고 집중해.

한눈 팔 여유가 있냐?

우린 이미 녀석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별비가 들릴 듯 말 듯 울며, 눈을 흘겼다.

“아, 맞다. 산맥에 접어들었지? 집중할게.”

풍경에 심취했던 마른 비가 휘휘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그릉!”

위로!

훌쩍 뛰어오른 청년과 백호가 굵디굵은 거목에 올라탔다.

오므린 발가락으로 몸을 지탱하고, 내뻗은 다리로 줄기를 밟는다.

위로 내딛는 보폭만큼.

둘의 몸이 평지를 달리듯 수직으로 쭉쭉 뻗어 올랐다.

숨 한 번 크게 들이켜니 나무의 꼭대기였다.

“와…! 어마어마하게 넓구나.”

독림을 지나쳐 폭포까지.

설검대와 칼이빨에게 쫓기며 지나친 북쪽 지역은 애뢰산의 초입일 뿐이었다.

동쪽 산맥에서 내려다본 애뢰산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했다.

“그릉.”

아직 멀었어.

한참을 더 가야 한다.

칼이빨의 성향을 감안하면 애뢰산의 짐승들을 부릴 리는 없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해.

녀석의 기감이 미치는 범위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하기 힘들다.

인상을 굳힌 별비가 사방을 둘러보며 뜻을 전했다.

‘별비, 이 녀석…….’

어린 시절, 눈앞에서 가족이 몰살하는 걸 봤기 때문일까?

별비는 석림을 떠나는 순간부터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꽤 정이 들어서 귀여워하던 붉은 발톱의 새끼가 마른 비와 헤어지기 싫다고 징징댈 때, 버럭 화부터 낼 만큼 여유를 잃었다.

평소엔 대범한 녀석이 칼이빨의 이름만 들으면 딱딱하게 굳는다.

별비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마른 비가 벗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어렵다는 거 알지만, 긴장 풀어. 별비야. 그때완 달라. 너는 강해졌고, 지금은 나도 있잖아. 우리 둘이 함께면 못 이길 적은 없어.”

석림을 떠나오는 날, 붉은 발톱은 말했다.

기술과 경험, 육체적인 힘은 충분하다고.

인간이든, 짐승이든 너희 나이에 그만한 전투 경험을 축적한 존재는 극히 드물 거라고.

호흡과 합격기 또한 나무랄 데 없다고.

‘그럼? 모자란 게 있다는 투인데?’

마른 비의 질문에, 붉은 발톱은 답했다.

‘너희에게 부족한 건 딱 하나다. 세월만이 선사할 수 있는 것. 자연기의 절대량.’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건 하늘이 내린 천재라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건… 우리도 계속 고민했는데 방법이…….’

‘있다.’

붉은 발톱은 장담하듯 말했다.

그리고 별비를 돌아봤다.

‘네 아비. 애뢰산의 전대 산군과 난 가까운 사이였다. 그에게 직접 들은 것이다. 아마 비아의 부친과 푸른 눈이라는 너의 조부도 모를 거야. 전대 산군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니까.’

검치호에게 유명을 달리한 아비.

그 처절했던 순간이 떠오른 별비가 움츠러들었다.

‘기억을 떠올려라. 전대 산군이 ‘그곳’을 발견했을 때, 별비 너도 그 자리에 있었어. 애뢰산에서 태어나 산의 정기에 가장 밀접하며, 애뢰산의 모든 지형을 속속들이 아는 짐승. 그리고 ‘그것’을 감지할 만한 기감을 지닌 짐승. 오직 너만이 그곳을 찾을 수 있다.’

붉은 발톱의 조언과 하나뿐인 벗의 격려.

털 한 올 한 올이 곤두설 만큼 긴장해 있던 별비가 어깨에 힘을 풀었다.

“가릉.”

잊었다.

내가 성장했다는걸.

그리고 지금은 혼자가 아니라는걸.

마음의 안정을 찾은 별비가 마른 비의 얼굴을 핥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으…… 근데 말이지. 나 이건 좀 별로야. 침 묻잖아. 너는 혀가 커서 얼굴이 침 범벅이 된단 말야.”

하여튼 이건 분위기 깨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놈이었다.

“그릉?”

여기도 아닌 거 같은데?

콸콸 쏟아지는 폭포 주변.

별비가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녀 야예 기역이 안냐?”

볼이 터지도록 무언가를 쑤셔 넣은 마른 비가 물었다.

양손에는 커다란 물고기가 들려 있었고, 두 마리 다 몸통의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

나는 기억을 되새기느라 정신이 없는데 밥이 넘어가냐?

별비가 눈으로 질책했다.

마른 비가 잡아준 물고기를 먹을 정신도 없어서 내버려 둔 채였다.

“멱어야 히믈 쓰지. 정쟉 중요햘 때 배갸 고퍄 봐. 꿀꺽. 어우, 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먹고 해, 먹고.”

저건 대범한 건지, 위기감이 없는 건지.

벌써 두 마리를 해치웠는지 마른 비의 발음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

그래. 맞는 말이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수록 몸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해야지.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 얄밉다.

물고기 두 마리를 한입에 털어 넣은 별비가 눈을 흘겼다.

“여기도 아니야?”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피던 별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르릉.”

아닌 것 같다.

뭔가…… 와닿는 게 없어.

근처에 가면 바로 느껴질 거랬는데.

별비의 말에 마른 비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붉은 발톱이 산의 정기라고 그랬지? 그거… 자연기를 이야기하는 거 아니야?”

“그릉.”

물론 그렇겠지.

아마 애뢰산 특유의 기운이 담긴 자연기를 말하는 걸 거다.

불과 물, 바람, 얼음, 땅, 뇌전 등 자연기 안에도 고유의 속성을 띤 기운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지형에는 특유의 향이 깃들기 마련이다.

뻘건 꼰대가 말한 건 분명 애뢰산의….

“나, 왠지 알 거 같은데?”

“가르릉.”

비아, 네가 감각이 뛰어난 건 알지만, 여기서 태어난 나도 느끼기가 힘든데….

“진짜야. 설명하긴 어려워도 점점 구체적인 무언가가 잡히는 기분이야. 근데 자연기의 속성은 워낙 뚜렷하니 그렇다 쳐도 이런 건 좀처럼 느끼기 힘든데…… 왜일까?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야. 아…! 혹시?!”

독림 독물들의 혼합독에 쓰러졌을 때.

별비는 죽음의 문턱을 넘은 마른 비를 되살렸다.

그때 불어넣은 정결한 기운.

인간보다 자연에 가까운 짐승의 특성상 별비는 마른 비보다 순도 높은 자연기를 지니고 있었고, 그건 마른 비의 자연기를 더욱 높은 경지로 끌어 올렸다.

마른 비의 폭발적인 성장의 배경에는 별비의 역할도 지대했던 것이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애뢰산에서 태어나 각성을 이룬 별비의 자연기에는 애뢰산의 향이 진하게 배어 있었고, 텅 빈 육신에 별비의 기운을 채웠던 마른 비는 그 향을 흠뻑 받아들였다.

“확실해. 점점 뚜렷하게 느껴져. 산에 들어오면서 느낀 이 독특한 향!”

“그라랑.”

뭐, 좋아. 그건 그렇다 치자.

근데 왜 짐승인 나보다 인간인 네가 더 잘 느끼는 거냐?

나도 감각은 굉장히 뛰어난 편인데…….

솔직히 말해.

너, 짐승 아니냐?

왠지 모를 패배감에 별비가 투덜댔다.

“향이 진해지는 곳. 감 잡았어. 이쪽이야!”

신이 난 마른 비가 몸을 날렸다.

내딛는 발을 따라 풍경이 흐른다.

속도를 올리자 숲의 정경이 빨려들 듯 다가왔다.

빠르면서도 은밀하다.

마른 비와 별비의 기동엔 야생에서 터득한 은신의 묘가 녹아 있었다.

“이쪽!”

마른 비는 거침없이 전진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녹색의 길이 자신을 인도하는 기분이다.

어둠이 내린 애뢰산의 숲은 마른 비의 발길을 늦출 수 없었다.

‘이거, 처음이 아니야.’

언제였지?

점점 농밀해지는 자연기를 추적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 그때였지. 화통달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우연히 발견했던, 자연기가 고이는 지점.

그 끝에는 마른 비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도운 야생초가 있었다.

“그릉.”

이제야 나도 느껴진다.

확실히 지금까지 우리가 갔던 곳보다 향이 훨씬 짙어.

길이 보인다.

지금 이 순간, 마른 비와 별비는 같은 길을 보고 있었다.

“그라랑.”

이걸 아까 거기서 느꼈다고?

마지막으로 묻는다.

솔직히 말해.

너, 짐승이지?

별비의 농담에 둘은 피식 웃었다.

“어? 잠깐.”

숲길을 주파하던 마른 비가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길이 나뉜다.

감각으로만 느껴지는 녹색의 길이 무수히 분할되고 있었다.

그중엔 자연기에 담긴 애뢰산 특유의 향이 옅은 곳도 있었고, 짙은 곳도 있었다.

“난감한데…….”

무작정 짙은 곳을 따라가기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이 길들이 어떻게 합쳐지고 나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연기가 고이는 곳.

애뢰산의 정기가 집약되는 곳.

일일이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찾을 수 있겠지만, 애뢰산은 보산의 이름 모를 산맥과는 비교도 안 되게 넓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르릉.”

이쪽이다.

이번에는 별비가 자신 있게 나섰다.

그리고 간략한 설명을 덧붙였다.

‘길’을 보고 나니 알겠다.

애뢰산은 엄청나게 넓지만, 기운이 응집될 만한 곳은 정해져 있지.

짐승들은 알게 모르게 그런 곳에 끌린다.

어린 시절, 아비가 데려간 곳이 그런 장소들이었어.

이제야 기억이 난다.

이 방향이라면 몇 군데만 훑으면 돼.

서두르자!

“좋았어!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두근두근 한데?”

마른 비가 기대에 찬 얼굴로 발을 놀리는 순간,

두쿵!

알 수 없는 감각이 마른 비와 별비의 심장을 옥좼다.

둘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고, 무언가가 뒤에서 잡아당긴 듯 덜컥 멈췄다.

둘의 고개가 동시에 서쪽으로 홱 돌아갔다.

“이, 이거…….”

마른 비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흐렸고,

“크르르르…….”

별비는 이빨을 드러내며 낮게 울었다.

그 표정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칼… 이빨!”

알 수 없는 감각?

아니다. 이걸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끔찍하리만치 낯익은 기운이다.

심혼에 각인된 낙인처럼 떨쳐내려야 떨쳐낼 수 없는 기운이다.

말도 안 되게 강력해서 순간 낯설게 느껴졌을 뿐.

둘의 시간을 멈추게 한 존재가 산맥 저 멀리서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키야아아아아앙!”

찢어질 듯한 야수의 포효가 애뢰산을 울렸다.

분명히 산맥 너머다.

소리의 파동과 전해지는 느낌으로 보아 소리의 진원지부터 이곳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생생하게 들리다니!’

자연기가 실린 울부짖음이다.

어떤 녀석인지는 몰라도 소리를 지른 짐승은 각성한 녀석이 틀림없었다.

‘이거… 죽기 직전의 비명이었어.’

포효? 아니다.

방금 들은 건 고통에 몸부림치는 야수가 내지른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그 직후에 찾아온, 숨 막히는 고요.

소리를 지른 짐승은 숨이 끊어진 게 분명했다.

“크허허허허헝!”

“윽…!”

“그, 그르릉…….”

분노. 울화. 살의. 격분.

심지어는 허망과 피폐함까지.

검치호의 것이 분명한 포효에는 갖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걸 폭발시킨 맹수의 포효에 애뢰산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저, 저 녀석…… 전과 달라! 왜 저러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