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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39화 (139/463)

139화

발걸음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던 녀석이다.

흘러나갈 소리를 죽이고, 기척을 없애는 게 몸에 배어 있던 녀석이다.

그랬던 검치호가 지금은 보란 듯이 위치를 드러내고 있었다.

뿐이랴.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있는 힘껏 내지른 포효에는 불안정한 감정 상태까지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크아아앙! 크헝! 크허헝!”

애뢰산의 산군은 절규하듯 포효하고 있었다.

그건 마치 억눌리고 비틀려서 결국은 곪아버린 울화의 발산과 같았다.

아득한 과거에 멸종했으나 하늘의 장난으로 현세에 재림한 폭군.

검치호의 울부짖음에 산천초목이 숨을 죽였다.

“이상해. 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마른 비가 숨을 죽이고 중얼댔다.

“삐루룩.”

파팟!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검치호의 동향에 정신을 빼앗긴 사이, 등 뒤로 다가온 무언가!

마른 비와 별비가 번개처럼 반전하며 싸울 태세를 갖췄다.

“삐루룩. 삐룩.”

“어디…?”

놀랍게도 한 번에 위치를 잡기 힘들다.

눈살을 좁히며 어둠을 훑은 마른 비가 나무 위에 앉은 희끄무레한 물체를 발견했다.

“삐루루.”

“……새?”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는 몸짓은 새들의 전형적인 버릇이다.

운남에 서식하는 동물치곤 자그마한 체구.

밤색의 털 위로 갈색 반점이 흩어져 있고, 끝이 구부러진 부리의 형태로 보아 매과에 속하는 새였다.

“황조롱이…….”

마른 비와 별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조롱이는 뛰어난 사냥꾼이지만, 둘에게 위협이 될 만한 짐승은 아니다.

겨우 안정을 찾은 별비가 마른 비를 놀렸다.

“가르릉.”

장족의 발전이네.

이제 새 종류도 알아보는구만.

난 처음에 네가 멧돼지보다도 멍청한 줄 알았다.

검치호 때문에 바짝 움츠러들었던 마른 비도 긴장을 풀었다.

“휴우……. 깜짝 놀랐네. 야, 놀리지 마. 관심이 없었던 것뿐이라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몰랐다니. 우리가 칼이빨한테 너무 집중했나 보다.”

“삐로롱.”

“응?”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마른 비가 황조롱이를 유심히 살폈다.

“너… 지금 나한테 말 거는 거야?”

“삐롱.”

가만히 보니 작은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다른 짐승들에 비해 유달리 영특해 보이는 새였다.

“삐로로.”

“음. 생각보다 알아듣기가 힘든데. 우릴 기다… 렸다구?”

정신을 집중하니 조롱이의 의사가 차츰 읽힌다.

야수 친화까지 발동하고 나서야 마른 비는 새의 뜻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널 보냈다고? 우리에게? 누가? ……붉은 발톱?! 너, 붉은 발톱의 친구야?”

황조롱이는 마른 비와 별비를 위해 붉은 발톱이 보낸 조력자였다.

아니, 보냈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원래 애뢰산에 서식하는 녀석이니까.

친구냐는 질문도 틀렸다.

철저한 상하 관계.

괴후를 처치한 후 너른 하늘이 남긴 경고를 들었던 짐승들과 같은 부류다.

황조롱이는 애뢰산을 살피는 붉은 발톱의 밀정이었다.

“삐로롱.”

“따라오라구?”

커다란 바위들로 둘러싸인 계곡.

황조롱이는 마른 비와 별비를 새들의 쉼터로 안내했다.

녹색의 길을 찾은 감각으로 살피니 산의 기운이 교차하며 우묵하게 패인 듯한 지형이었다.

이런 곳이라면 어지간해선 자연기나 기척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는다.

자연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짐승들이 본능에 이끌려 찾아 드는 곳.

자연기의 활용 여부와 관계없이, 대자연의 섭리는 어김없이 만물에 깃들어 있었다.

“삐로로롱. 삐롱.”

황조롱이는 영특해 보이는 눈을 반짝이며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2년 전, 다수의 인간들이 산에 진입했고, 검치호를 만나 몰살한 부분부터 시작됐다.

광서우와 달리 붉은 발톱은 마른 비가 살아남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건 눈앞에서 귀엽게 종알대는 새가 알려준 게 틀림없었다.

1년여 전부터 시작된 검치호의 폭주.

조롱이는 아마도 그게 마른 비를 놓친 일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산군이었던 별비의 아비를 공격한 걸 제외하면, 과거의 검치호는 덤비는 적만을 거꾸러뜨렸다.

그랬던 놈이 맹수의 씨를 말리듯 애뢰산 곳곳을 누비며 짐승들을 사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마치 울분을 풀 곳을 찾지 못한 인간이 엉뚱한 곳에다가 화풀이하는 것과 같았다.

자연기가 충만한 애뢰산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강인한 야수들을 품고 있었고, 넓은 크기만큼이나 그 숫자도 헤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1년간의 사냥.

무자비한 학살 끝에 남은 건 발톱과 이빨을 가졌으되 대항할 힘이 없는 야수들과 나약한 초식동물뿐이었다.

“왜… 그런 거지? 나를 놓쳐서? 단순히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마른 비를 놓친 것만으로 검치호의 광분과 폭주를 해석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황조롱이도 거기까진 알지 못했다.

지능이 발달한 녀석이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짐승의 기준일 뿐.

각성하지도 않은 녀석에게 더 이상 파고들길 바라는 건 무리가 있었다.

“삐로롱.”

“단서가…… 있다고?”

사냥을 마친 검치호가 돌아가는 곳.

검치호가 집으로 삼은 보금자리.

황조롱이는 애뢰산 정상에 위치한 동굴을 언급했다.

검치호는 맹수를 사냥하고 나면 조금 진정이 되는데, 그곳으로 돌아가면 다시 광분에 찬 포효를 터뜨린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가만히 듣고 있던 별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크르릉…….”

망할 자식이…….

예상은 했지만 그곳에 터를 잡았군.

“왜? 아는 곳이야?”

알다마다.

애뢰산 정상의 동굴은…… 과거 나의 가족이 머물던 곳이었다.

“아…….”

그렇다면 거기가 별비의 아픈 기억이 서린 곳이다.

어느 날 불쑥 보금자리로 쳐들어온 검치호에게 가족이 몰살했다고 했으니까.

“그럼 칼이빨의 폭주가…… 별비의 아버지, 전 애뢰산 산군과 관계가 있는 건가? 아냐, 그렇게 보기엔 시일이 너무…….”

별비의 아비와 연관을 짓기엔 시간차가 너무 크다.

애뢰산 산군이 쓰러진 건 수년 전의 일이니까.

마른 비가 검치호와 만난 건 2년 전.

그때의 검치호는 냉정하고 침착했었다.

“보금자리로 돌아갈 때마다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인다……. 별비의 가족들이 머물던 동굴과 관련이 있는 건 분명한데……. 거기에 칼이빨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추측만으로 이 이상의 무언가를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가보자.”

마른 비가 별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크항?”

미친 거냐?

칼이빨의 보금자리로 가자고?

거기가 어디라고 들어가?

우선 붉은 발톱이 알려준 곳을 찾고, 계획대로 놈을 유인해서….

“위험한 행동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왠지…… 가야만 할 것 같아. 칼이빨을 사냥하는 데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아냐. 솔직히 잘 모르겠어. 그냥 느낌이지만, 동굴에 대해 듣는 순간 거길 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

별비가 마른 비를 조용히 바라봤다.

2년간 함께 지내며 경험한 벗의 ‘직감’.

자연기인지 타고난 감각인지는 몰라도, 그건 때때로 놀랄 만한 결과를 보여주곤 했다.

단순한 느낌이라고 치부하기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잘 들어맞는 걸 여러 번 목격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마른 비가 강해질수록 더욱 정확해졌다.

별비가 신음하듯 울었다.

“그르르르…….”

망할. 인간이 머리는 안 쓰고 맨날 즉흥적으로…….

어쩌다가 이런 놈을 골라서…….

체념한 표정의 별비가 머리를 휘휘 저었다.

“그릉.”

알겠다. 비아, 네 느낌을 믿어보자.

그럼 붉은 발톱이 찾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할 거냐?

“그건 나중에. 동굴 쪽을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분명히 무언가가 있어.”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다.

불안인지 흥분인지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누르며, 마른 비가 서쪽 하늘을 올려다봤다.

“삐로로로. 삐롱.”

멀리 보이는 고목 위에서 황조롱이가 재잘댔다.

마른 비와 별비는 죽은 듯이 낮게 호흡하며 수풀 속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거의 다 왔어. 여기서부턴 조심해. 절대로 기척을 흘리면 안 돼.’

마른 비는 눈으로 말했고,

‘너나 잘해라. 칠칠맞게 실수하지 말고.’

별비도 눈으로 답했다.

‘다행이야. 녀석의 탐지 범위가 고스란히 드러나서.’

마른 비가 침을 꼴깍 삼키며 열 걸음 앞의 허공을 노려봤다.

천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검치호는 2년 전과 달리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지 않았고, 발산되는 힘을 방만하게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래서 느껴진다.

녀석의 기감이 미치는 범위가.

주변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지만, 마른 비와 별비에겐 열 걸음 앞에서 일렁이는 감각의 그물이 또렷이 보였다.

아니, 그물이라기보다는 투명한 막이란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안에 들어서는 순간 녀석의 탐지 범위에 속하게 될 테고,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곧바로 녀석을 마주하게 될 터였다.

‘진짜…… 무지막지하네.’

마른 비가 침을 꿀꺽 삼켰다.

별비가 대략적으로 알려준 애뢰산 정상까지는 야트막한 산 하나가 가로막고 있다.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범위라니.

녀석이 힘을 감췄을 경우를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내가 먼저 간다. 저 안으로 들어간 뒤에는 나를 따라와라.’

별비가 엎드린 자세 그대로 낮게 전진했다.

황조롱이가 앞에서 방향을 일러 주지만, 결국 숲을 헤치고 길을 찾는 건 둘의 몫이다.

앞장서는 별비의 뒷모습을 보며, 마른 비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일체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은신.

애뢰산의 호흡을 읽고, 자연의 일부로 녹아든다.

마른 비와 별비가 지형의 결을 타고 검치호의 사정권에 진입했다.

밤공기가 선선한 운남의 밤.

애뢰산 정상을 비추는 달빛은 하늘의 손길처럼 부드럽기만 했다.

하지만 바위의 틈 사이에 몸을 숨긴 마른 비는 솜털까지 곤두서는 끔찍한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후욱, 후욱…….’

고작 반나절이다.

아니, 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을 합치면 하루인가.

달릴 경우, 밥 먹을 시간이면 주파할 거리를 달팽이가 기어가듯 느리게 이동했고, 결국 애뢰산 정상이 보이는 위치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이 이상은 안 돼. 더 가까이 가면 발각된다.’

날카롭게 솟은 바위와 그 밑에 뚫린 동굴.

동굴의 입구가 손톱만 하게 보이는 지점에서 별비는 멈췄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지형에 녹아들었다.

흘러나갈 숨소리까지 죽이며 동굴을 주시한 지 반나절.

마른 비는 일주일은 뜬눈으로 지샌 것 같은 피로를 느꼈다.

“크르르…… 크하아앙!”

동굴에선 간간이 야수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극심한 긴장으로 인한 착시일까?

검치호가 발작 같은 울음을 터뜨릴 때마다 대기가 점멸하듯 번쩍이는 것만 같았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어떤 짐승을 사냥한 건지는 몰라도 이건 너무 오래….’

그 순간, 공기가 폭발하듯 요동쳤다.

그리고 숙적이 마침내 동굴을 박차고 나왔다.

“크허허허허헝!”

투명한 달빛을 이고 산의 정상에서 울부짖는 짐승.

휘휘 젓는 머리를 따라 붓으로 그린 듯한 두 줄기 궤적이 허공에 남는다.

피처럼 붉은 광망이 허공에 빛의 선을 그었다.

“커허엉!”

콰아앙!

검치호가 느닷없이 난폭한 질주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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