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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40화 (140/463)

140화

‘뭐, 뭐야?!’

마른 비는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벌떡 일어설 뻔했다.

‘아니야! 정신 차려! 이쪽이 아니다!’

눈으로 외치는 별비를 보지 못했다면 정말 일어서서 싸울 준비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척 봐도 제정신이 아닌 듯한 검치호는 산 아래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고, 길목에서 멀찍이 자리 잡은 둘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붉은 발톱의 말이 맞았어.’

달빛마저 일그러뜨리는 자연기의 잔흔.

검치호가 내달린 경로엔 아직도 투명한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마른 비와 별비가 강해졌듯.

검치호도 강해진 것이다.

셀 수 없는 맹수를 사냥하고, 애뢰산의 자연기를 흠뻑 받아들인 괴수는 광서우의 말대로 살아 있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이길 수…… 없을지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검치호는 맞설 수 없는 상대였다.

마른 비는 난생처음으로 전의가 꺾이는 걸 느꼈다.

“그르르…….”

정신 차려.

너답지 않게 왜 이러냐.

별비의 울음은 그래서 시기적절했다.

강할 걸 몰랐나?

물론 우리 예상보다 훨씬 괴물이긴 해.

그래서 그게 뭐?

둘이 함께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한 건 비아, 너다.

그리고 그 ‘대머리 밧줄’도 말했잖나.

싸움과 사냥은 다르다고.

절대로 흔들리지 말라는 붉은 발톱의 조언 덕분일까?

검치호의 이름만 들어도 흥분하던 별비가 오히려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르릉.”

아직 우린 붉은 발톱이 말한 가능성을 열어보지 않았다.

아니, 처음엔 그런 건 생각하지도 않았잖아.

계획대로 준비하고, 놈을 사냥하면 돼.

안 통하면? 뒈지기밖에 더 하겠나.

멍하게 별비의 말을 듣던 마른 비가 자신의 볼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두려움이 내리던 눈동자에 투지가 차올랐다.

그리고 마른 비는 자신이 유달리 동요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별비, 네 말이 맞아. 고마워. 내가 잠깐 흔들렸나 봐. 뭔가… 마음이 진정되지 않고 심란해. 그리고 그건 아마…….”

마른 비와 별비가 동시에 동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에 있는 무엇 때문이야.”

동굴은 건조했다.

그리고 산 정상에 있기 때문인지 무척이나 서늘했다.

산풍이 휘이잉― 소리를 내며 동굴 깊숙이 침투하고 있었다.

“그릉…….”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별비가 눈에 힘을 주며 동굴 안쪽을 노려봤다.

“이런 느낌이 아니라니?”

벌써 산 하나를 넘었는지 아득히 멀어진 검치호의 존재감을 확인하며, 마른 비가 물었다.

“그르릉.”

애뢰산이라고 뭉뚱그려 부르지만, 이곳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산이 뭉쳐서 형성된 거대한 산악 지형이다.

직접 봐서 알겠지만, 애뢰산은 엄청나게 넓고 깊지.

그리고 이곳은 단순한 정상이 아니야.

애뢰산의 험준한 기세가 밀집되는 곳이자, 대자연의 넉넉함을 품은 곳이다.

역대 산군들이 거처로 사용했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고.

“그런데?”

“크르릉.”

너도 느껴지지 않나.

기가 변질됐다.

대기에 깃든 울분과 격노, 체념, 살의…….

칼이빨 그놈, 대체 여기서 무슨 짓을 한 거야!

가족들과의 추억이 어린 곳.

가깝게는 조부인 푸른 눈과 아비, 멀게는 그 위의 선조들까지, 별비의 핏줄들이 거처로 사용했던 곳.

훼손되어 버린 역대 산군들의 보금자리를 보며, 별비는 진하게 분노했다.

휘이잉―

그 순간, 동굴에 들었던 바람이 내부를 한 바퀴 돌아 나왔다.

그리고 거기엔 인상을 찡그리게 만드는 악취가 실려 있었다.

“피 냄새?!”

앞서 사냥했던 맹수의 것인가?

아니다. 이건 살아 있는 생물의 피 냄새다.

한데…… 이상하다.

피 자체는 싱싱하지만, 이물질의 냄새가 뒤섞여 있다.

아마 그것들이 역한 냄새를 유발하는 모양이었다.

서로를 돌아본 마른 비와 별비가 동굴로 진입했다.

『조심해. 뭐가 있을지 몰라.』

‘동굴은 별로 깊지 않아. 뭔지는 몰라도 금방 만날 거다.’

마른 비의 언령에 별비가 눈으로 답했다.

밤눈을 발동하고 조심스레 전진하던 둘은 금세 동굴의 끝에 다다랐다.

그리고 보았다.

동굴 벽에 기댄 생물체를.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무언가가 기척을 느꼈는지 꿈틀댔다.

‘뭐냐? 이게 웬…! 인간이 왜 여기에 있지?’

별비가 낮게 그르렁댔다.

한참이나 자르지 않았는지 산발을 한 머리는 축 처진 고개를 따라 늘어져 있었다.

정체불명의 인간이 힘겹게 고개를 든 순간!

마른 비는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으…….”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죽은 게 아니었나?

그가 살아 있었단 말인가?!

“으…… 은빛여우 혀어어엉!”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얼굴은 분명히 그였다.

마른 비가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나갔다.

“비… 비아…? 너냐? 드디어 네가 온 거냐? 오, 아버지 하늘이시여…!”

그가 맞았다!

한참을 씻지 못했는지 은빛여우의 얼굴엔 시커먼 때가 덕지덕지 껴 있었다.

바싹 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진 입술 사이로 꿈에서나 그리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구역질이 날 정도의 악취가 진동을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마른 비는 엉엉 울며 은빛여우를 힘껏 껴안았다.

“혀, 형! 어떻게, 어떻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눈물이 시야를 가렸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던진 남자.

죽은 줄만 알았던 은빛여우가 눈앞에 있었다.

“풋내나던 꼬마가 벌써 이렇게…! 살아 있을 거라 믿었다. 장하다, 비아야. 네가 이렇게 무사한 걸 보니…… 윽!”

고통을 억누르는 신음.

퍼뜩 정신을 차린 마른 비가 안았던 팔을 풀며 은빛여우를 살폈다.

“혀, 형! 이게, 이게…! 파, 팔! 아니, 다리도…! 흐흐흑,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형!”

은빛여우의 팔은 연체동물의 촉수처럼 흐물흐물 늘어져 있었다.

산산조각 난 뼈가 피부를 뚫고 튀어나왔고, 상처 부위엔 시커멓게 굳은 피와 고름, 진물이 뒤엉켜 썩고 있었다.

게다가 동굴 구석을 가득 메우다시피 한 배설물.

악취의 정체가 이것이었다.

다리? 다리는 아예 없었다.

팔의 상태가 너무도 처참하여, 휑한 두 다리는 차라리 깔끔해 보일 지경이었다.

“후후. 그렇게 됐다. 못 보일 꼴을 보이게 됐구나.”

감정을 억누르기 힘든지 은빛여우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힘없이 읊조리는 말투에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이 담겨 있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마른 비가 버럭 화를 냈다.

못 보일 꼴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은빛여우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것이 본인에 대한 자책이라는 걸 모두가 안다.

생명의 은인이 살아 있는 줄도 모르고,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했다.

누구도 그의 생존을 알지 못했지만, 그건 변명이다.

불가항력이건 나발이건 자신만은 알았어야 했다.

그리고 무조건 구하러 왔어야 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마른 비는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었다.

“네가 애뢰산을 빠져나간 후, 많은 일이 있었다.”

검치호가 영역을 침입한 여섯 명의 검은 수리를 살해한 후, 그믐이 내린 입산 금지 명령 때문에 와족조차 애뢰산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마른 비가 힘을 키운 2년 동안, 죽은 줄만 알았던 은빛 여우는 검치호와 내내 함께 지낸 것이다.

“이거…… 칼이빨, 그 새끼가 한 짓이죠?”

쿠구구구―

마른 비는 은빛여우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분노로 가득 찬 자연기가 폭발하려 하고 있었다.

“크항!”

정신 차려! 놈에게 발각된다!

옆에 있던 별비가 깜짝 놀라며 울음을 토했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마른 비의 눈은 푸른색이 아닌, 붉은빛에 잠식되고 있었다.

자연기가 외부로 새어 나가려는 순간,

빠아악!

은빛여우가 머리로 마른 비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그리고 무섭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비아야, 정신 차려라. 그리고 날 봐.”

그제야 마른 비의 눈에 차오르던 붉은빛이 가셨다.

겨우 정신이 든 마른 비가 얼떨떨한 얼굴로 은빛여우를 봤다.

“기운을 죽여라.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 시간이 없다. 너흰 곧 가야 해.”

너흰? ‘같이’가 아니고?

마른 비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은빛여우는 허락하지 않았다.

단단한 눈빛으로 마른 비를 억누를 뿐이다.

괴수와 2년을 보낸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날, 놈은 날 죽이지 않았다. 나약한 생물이 보인 투지에 대한 호기심인지, 너를 놓친 화풀이였는지는 알 수 없어. 아니, 아마 둘 다였을 거다. 힘을 다 써서 쓰러진 날 물고, 여기까지 데려왔지. 기운을 차리자마자 난 놈에게 달려들었다.”

입구를 막고 선 검치호.

살려면 놈을 뚫어야만 했다.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은빛여우는 끝없이 검치호에게 달려들었다.

“비참했다. 아예 상대도 되지 않았지. 난 장난감처럼 수도 없이 얻어맞고 쓰러졌다. 놈은 발톱을 꺼내지도 않았어. 그저 앞발로 후려칠 뿐이었지.”

어두운 동굴에서 은빛여우는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기절을 반복했다.

검치호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그저 끔찍한 고통을 안겨줄 뿐.

그때까지만 해도 은빛여우의 사지는 멀쩡했다.

“기절에서 깨면 짐승의 고기가 놓여 있었다. 먹고, 얻어맞고, 의식을 잃었지. 놈은 마치 내가 언제까지 버티는지 보고 싶은 듯했어.”

은빛여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기절을 반복하는 바람에 뇌에 손상이 왔는지, 깨어 있어도 의식이 가물가물했지만, 움직일 힘이 생기면 어김없이 달려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허우적대며 다가간 은빛여우를, 검치호는 가만히 밀어냈다.

그리고 심원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만. 그만하자.〕

그게 대체 무슨 조화였는지는 모른다.

언령처럼 꽂혀 든 검치호의 의지.

은빛여우는 입을 떡 벌린 채 주저앉았다.

“기절할 듯이 놀랐다. 짐승이 언령을 발하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지금도 모른다. 아무튼 그날부터 나와 칼이빨은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됐어.”

마른 비는 이미 같은 걸 경험해 보았다.

조용히 듣던 그가 입을 열었다.

“언령과는 다를 거예요. 여기로 오기 전에 붉은 발톱을 만나고 왔는데, 녀석도 그런 걸 사용했어요.”

“붉은 발톱을?! 그러고도 멀쩡히 살아나왔단 말이냐? 허…… 역시 내 눈이 옳았어. 대단하구나. 엄청난 성장이야! 그런데 붉은 발톱도 그런 걸 사용한다고?”

“네. 요령은 언령과 비슷하지만, 대상이 제한된다고 했어요.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전달이 가능하다고…….”

은빛여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주저하듯 말했다.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 그렇다면 이해가 가는구나. 내가 놈의 의지를 전달받은 게.”

은빛여우는 반려수와의 교통을 경험해봤다.

그리고 격렬한 감정을 발산하며 검치호와 수백 일을 함께 지냈다.

놈에 대한 감정이 어떻든 간에, 그건 오직 검치호만 바라보며 보낸 시간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검치호 또한 그랬다.

마른 비처럼 야수 친화를 구사하진 못할지라도, 은빛여우와 검치호가 의사를 주고받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무척이나 놀랐지만, 난 금세 정신을 차렸다.”

은빛여우는 곧바로 개소리하지 말라고 고함을 질렀다.

날 보내 주든가, 당장 죽이라고.

아니면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라고.

“당시에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칼이빨의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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