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얼굴이 빨개지도록 고함을 지르는 은빛여우를 두고, 검치호는 돌아섰다.
그리고 그대로 동굴을 나가버렸다.
처음이었다.
기절하지 않은 상태로 남겨진 것은.
검치호가 충분히 멀어졌다고 판단되자, 은빛여우는 탈출을 시도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애뢰산은 넓고, 내가 전력을 다해 달려도 느긋하게 사냥을 마치고 뒤쫓는 놈에게 따라잡혔지. 죽어라 달리다가 무언가에 맞고 기절하고, 눈을 떠보면 동굴이었다. 은신? 아마 ‘새벽 어스름’이라도 놈의 이목을 피할 수 없을 거다. 무슨 짓을 해도 놈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어…….”
그건 형용할 수 없는 절망이었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은 원수.
평생을 함께한 실바람을 잡아먹은 괴물.
하지만 당해낼 수 없고,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사무치는 원한과 뼈저리는 좌절 속에 은빛여우는 망가져 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날 살려 두는지. 놈은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날 가만히 내버려 뒀어. 꼬박꼬박 먹이를 가져다주고, 근처를 산책해도 놔뒀지. 웃긴 게 뭔지 아니? 더 이상 핍박받지 않고, 자유 아닌 자유가 주어지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비집고 올라오더구나.”
자조적인 말투.
하지만 그건 은빛여우의 자기 비하였다.
말과 달리, 그는 수십 번이나 죽으려 했다.
하지만 죽을 수 없었다.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은 채 수십 일이 흘렀다. 그건 그거대로 끔찍하더군. 어느 날, 나는 칼이빨에게 물었다. 아니, 소리 질렀지. 왜 날 살려 두냐고. 이게 대체 뭐 하는 개수작이냐고. 놈은 대답하지 않았어.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난 보았다. 놈의 눈에 담겨 있는 혼란을. 칼이빨도 자신이 왜 그러는지 모르고 있었던 거야.”
* * *
하늘의 장난으로 시공을 뛰어넘어 현세에 던져진 존재.
어릴 때의 기억은 있지만, 부모는 생각나지 않는다.
몸에 힘이 붙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혼자였다.
이성이 발현되고 사고가 가능해진 순간, 압도적인 힘으로 단숨에 먹이사슬의 정점에 올랐다.
산 정상에 거하는 대호를 쓰러뜨리자, 모두가 날 두려워했다.
어째서인지 동족은 존재하지 않았고, 어떤 짐승도 다가오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그게 당연한 거다.
군림자에게는 동족도, 동료도, 가족도 필요 없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그것들’을 보았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그것들은 다른 생물들이 그랬듯 내 앞에서 생존을 갈구하며 몸부림쳤다.
마음껏 유린하는 도중, 벌레와 다를 바 없는 미물이 품으로 뛰어들더니 턱에 묵직한 공격을 꽂았다.
분노가 치밀었다.
그것이 지키려는 ‘어린 것’을 눈앞에서 찢으려 했으나, 어린 것은 과감하게 폭포로 뛰어들었다.
처음으로 사냥감을 놓친 순간이었다.
원래는 방해한 놈을 가지고 놀다 죽일 생각이었다.
동굴로 가져와서 해가 수백 번 뜨고 질 동안 철저히 괴롭혔다.
그것의 눈에 좌절과 절망이 어릴 때,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렸을 때, 숨통을 끊을 작정이었다.
기가 찼다.
이 나약한 생물은 포기를 모르는 듯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길 수도 없고 도망도 못 치는 주제에 왜 포기하지 않는 거냐!
처음으로 호기심이란 감정이 차올랐다.
호기심이 관심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것의 생각, 감정, 울음의 뜻이 궁금했다.
계속해서 때려눕히면서도 놈의 모든 걸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들렸다.’
놈의 울음이. 감정이. 생각이.
경이적인 정신력을 보여줬던 놈은 망가지기 직전이었다.
〔그만. 그만하자.〕
한 번 ‘들리고 나니’ 어렵지 않았다.
자연기에 의지를 싣는 요령을 터득했고, 난 놈에게 나의 뜻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난생 처음이었다.
나 아닌 다른 존재와 ‘의사’를 교환한 것은.
그건 생소하고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장난감으로 여겼던 생물은 힘은 약했지만, 경이적인 정신력을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고 다른 개체를 살린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었다.
그건 과거 산의 주인이었던 대호가 취한 행동과 동일했다.
이 녀석들은 왜 그런 거지?
자신의 생존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나?
점점 놈이 궁금해졌고, 전처럼 의사를 주고받고 싶었다.
하지만 놈은, ‘인간’이라 불리는 생물은 입을 열지 않았다.
“왜 날 살려두는 거냐! 이게 대체 뭐 하는 개수작이야! 죽여! 차라리 죽이란 말이다!”
처음으로 의지를 전한 이후.
해가 수십 번 뜨고 질 동안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했던 인간이 부르짖었다.
왜 모르는 거지?
내가 관심을 가지고 돌봐주는 걸 모르는 거냐?
왜 멀어지려 하지?
아니, 그보다 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차라리 각성하지 않았다면.
이성과 의지가 발현되지 않았다면, 그저 본능에 따라 살며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외로움’이란 감정을 깨닫지 못했을 텐데.
그토록 고대하던 ‘대화’의 기회를 맞이하고도, 검치호는 은빛여우의 질문에 대꾸하지 못했다.
* * *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검치호는 나에게 정을 느끼게 된 것 같다.”
마른 비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고, 은빛여우는 작게 한숨을 쉰 후 말을 이었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놈은 어지간한 인간을 상회하는 지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감정도 가지고 있어. 우리의 반려수처럼 말이다. 하지만 반려수들과 달리 칼이빨은 감정을 나눠본 적이 없어. 이미 멸종한 종. 어릴 때부터 철저히 혼자였겠지.”
“그러니까…… 칼이빨이 외로움을 알게 됐다고요? 형과 지내면서? 그러다가 정이 들었고?”
마른 비가 떠듬떠듬 질문했다.
“그래. 웃기게도 그런 것 같다.”
“하나도 안 웃겨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쳐요! 그런 놈이 형을 이 꼴로 만들어?!”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인가.
형이 정신이 피폐해져서 무언가 단단히 오인을 한 거다.
마른 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거다. 놈은 다른 개체와 대화한 적도, 어울린 적도 없어. 지능만 발달한, 감정을 다뤄본 적 없는 미숙아. 마치…… 네 살배기 어린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떼를 쓰는 것과 같달까?”
“그게 무슨…!”
“계속 도망치니 다리를 자르더구나. 그럼 내가 자신의 곁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지.”
이제는 더 할 말도 없다.
마른 비가 무섭게 침묵을 지켰다.
“어느 순간 칼이빨의 마음이 읽히더구나. ‘내 마음이 이런데 넌 왜 받아들이지 않는 거냐? 왜 나를 피하지? 왜 자꾸 날 떠나려 하는 거야?’ 감정의 일방적인 강요……. 거기엔 상대에 대한 배려가 존재하지 않지. 다리가 잘리고 나니 모든 희망이 꺼지더군. 난 그때 또 한번 죽으려 했다.”
하지만 은빛여우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였다.
“내가 기어서라도 동굴을 벗어나려는 걸 보고, 칼이빨은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정을 품은 존재에게 철저히 외면당하자 미치기 시작한 거지. 비뚤어진 집착과 소유욕쯤 되려나? 웃기지 않니? 저토록 막강한 괴물이 말이야. 내 매력이 이 정도다, 비아야. 후후.”
웃음이 나오는가?
이 상황에서?
난 사지가 잘린 당신의 모습에 천불이 끓어오르는데?
마른 비는 입술을 깨물며 울음과 화를 삼켰다.
“기어가는 내 팔을 부수고, 자연기를 운용해 치료하더군. 부인이 말을 안 듣는다고 잔인하게 구타하고, 앓아누우면 돌보는, 막돼먹은 남편도 아니고 말야. 그즈음이었다. 그 생각이 떠오른 게. 그래서 죽지 않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지.”
“……무슨 생각이요?”
마주 보는 것조차 끔찍한 괴수.
하나뿐인 벗의 원수.
그런 놈에게 강제로 끌려와 모진 일을 겪으며, 지금까지 연명해 온 은빛여우다.
몸서리 쳐지는 내용들이고, 듣기도 싫다.
그러나 들어야 한다.
그가 전하고 싶어 하니까.
“놈을 사냥할 방법.”
“사냥…… 이요?”
생각지도 못한 화제 전환이다.
칙칙하게 가라앉았던 마른 비의 눈이 차츰 또렷해졌다.
“그래. 사냥. 내 팔을 부수고 울부짖는 검치호에게, 나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떤 이야기를…….”
“비아, 너의 이야기를 말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 괴수에게 내 이야기를 왜…?
마른 비는 은빛여우가 무슨 일을 벌인 건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내가 목숨을 던져서 살린 존재. 그리고 놈이 처음으로 놓친 사냥감. 나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이는 놈에게 너의 이야기를 해줬지. 지극한 애정을 담아서 말이야.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이 가니? 처음엔 내가 말을 걸어서 좋아하던 놈이 점점 광분하기 시작했다. 놈은 자신의 상태를 깨닫지 못했지만, 그건…… 분명히 질투였어.”
믿기 힘들고, 와닿지 않는 이야기다.
그 재앙 같은 괴수가 인간의 치정사에 얽힌 기분이랄까.
물론 남녀 간의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마른 비는 은빛여우가 지금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놓는 은빛여우의 눈은 맑고 또렷했다.
“난 놈에게 말해줬다. 네가 언젠가 찾아올 거라고. 2년 전에 너를 살려 보낸 날, 난 놈에게 선언했었지. 비아, 너를 다시 보게 되는 날, 넌 반드시 죽을 거라고 말이야.”
기억한다.
은빛여우를 두고 눈물을 흩뿌리며 돌아설 때, 마른 비는 약속했다.
반드시 복수해 주겠노라고.
그리고 은빛여우는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로 검치호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네가 그걸 봤어야 한다.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떠는 놈의 모습을. 나를 가혹하게 두드렸지만, 놈은 결국 날 죽이지 못했어. 그러더니 괴성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가더군. 그때부터였다. 놈이 애뢰산의 맹수들을 닥치는 대로 사냥하기 시작한 게.”
이제야 앞뒤가 맞는다.
황조롱이가 알려준 정보.
검치호가 광분하여 날뛴 배경에는 놀랍게도 은빛여우가 있었던 것이다.
“비아, 네가 반드시 오리라 믿었다. 네 성격상 힘이 완전히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진 않겠지. 성년식이 끝나기 전에 결판을 내리라 봤다. 하지만 내가 직접 확인한 칼이빨은 네가 아무리 빠르게 성장했다고 해도 이길 수 없는 존재였어. 네가 파고들 허점을 만들어 두어야만 했다.”
은빛여우가 죽지 않고 버텼던 이유.
마른 비를 위해서다.
그는 복수하러 찾아올 동생을 위해 끔찍한 시간을 견뎠던 거였다.
“흐, 흐흑……. 왜… 왜 이렇게까지…….”
눈물을 참을 수 없다.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자신을 염려한 그의 눈을 바라보기 힘들다.
참담했던 그의 2년이 사무치게 아팠다.
“왜긴. 다른 이유가 있겠니. 동생이잖아.”
사지가 망가지고서도 은빛여우는 웃었다.
동굴의 어둠을 밝히는 그의 미소가 너무 눈부셔서, 마른 비는 엉엉 울며 주저앉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