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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42화 (142/463)

142화

“내 다리를 자른 순간, 놈의 인내는 끊어졌다. 포기하지 않은 내가 이긴 거야. 놈의 정신은 헝클어졌다.”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힘의 차이.

그러나 은빛여우는 결국 검치호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고통과 피로로 얼룩진 얼굴에 흡족함이 떠올랐다.

그 순간을 위해 그가 감내했을 고통을, 마른 비는 짐작할 수 없었다.

“비아, 너의 존재가 지금의 칼이빨에게는 가장 큰 독이다. 너를 보는 순간 광분하며 달려들겠지. 정면대결로는 결코 놈을 이길 수 없어. 침착함을 잃어버린 그 녀석을 사냥하는 거다.”

중상을 입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은빛여우는 말을 이었다.

“네가 치밀한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아. 하지만 아무 준비도 없이 칼이빨을 치러 오진 않았겠지. 나름의 계획이 있으리라 믿는다. 내가 한 건 그걸 수월하게 돕는 작업일 뿐이야.”

“형, 잠깐만···.”

검치호가 돌아올까 봐 걱정이 돼서?

묘하게 서두르는 느낌이다.

은빛여우는 마른 비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부디 성공하길 바란다. 만약 힘이 모자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네가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형, 잠깐만! 이제 못 볼 것처럼 이야기하지 마요. 형이 살아 있다는 걸 안 이상, 절대 두고 가지 않아. 제가 형을 안을게요. 일단 가면서···.”

은빛여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냐? 너보다 월등히 강한 적에게 쫓기며 나를 안고 가겠다고? 그게 다 죽자는 말과 뭐가 다르지? 정신 차려라!”

“같이 죽어도 상관없어요! 그때는 형이 저를 지켰지만, 이제는 제가 형을 지킬 거예요!”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자살행위라는 걸 알지만, 마른 비는 절대 은빛여우를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은빛여우는 마른 비가 이렇게 나올 것까지 예상했다.

짐작은 했지만, 막상 그 마음을 접하자 울컥한 사내가 잠시 시간차를 두고 말했다.

“마음은 고맙구나. 하지만 그건 안 돼. 칼이빨의 모든 신경은 내게 쏠려 있다. 내가 움직이는 순간, 녀석은 곧바로 알아챌 거야. 설령 몰래 빠져나간다 해도, 내 기운과 냄새를 놓칠 리 없다. 함께 가면,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몰살할 거다.”

“그래도 상관없···!”

“아니, 안 돼. 너를 믿고 따라온 벗까지 죽일 셈이냐?”

마른 비가 아차 하며 별비를 돌아봤다.

생각지도 못한 재회에 별비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과거와 달리, 그에겐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있었다.

“그 눈동자······. 푸른 눈의 핏줄이군. 살아남은 새끼가 있었던가!”

기운을 죽이고 있지만, 한눈에 알겠다.

영롱한 눈동자와 자연스레 배어나는 위엄.

흰 호랑이는 각성한 녀석이 분명했다.

은빛여우는 문득 마른 비의 지난 2년이 궁금해졌다.

“이제 가라, 비아야. 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칼이빨은 절대 날 죽이지 않아. 멋지게 녀석을 사냥하고, 날 데리러 와라. 기다리고 있겠다.”

“······.”

은빛여우의 말이 옳다는 걸 안다.

가장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최선의 방법이다.

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왠지 이대로 가면 은빛여우를 다시는 못 볼 것만 같았다.

“삐로롱, 삐롱!”

그때, 황조롱이의 다급한 울음이 들려왔다.

동굴 위에서 검치호가 떠난 방향을 주시하던 새가 괴수의 귀환을 감지한 것이다.

“떠나라! 어서!”

은빛여우가 다급한 얼굴로 마른 비를 재촉했다.

마른 비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며 말했다.

“······알았어요. 꼭, 꼭 놈을 죽이고 데리러 올게요. 더 이상 칼이빨을 자극하지 말아요, 형!”

하지 못한 말이 남은 걸까?

은빛여우가 돌아서는 마른 비를 불렀다.

“자, 잠깐! 비아야! 한 가지만···! 전쟁은 어떻게 됐지? 족장님은, 할아범은 무사하시냐?”

훌쩍이던 마른 비가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우리가 이겼어요. 아버지도, 할아범도 건강하세요. 걱정 말아요, 형. 곧 보게 될 거예요.”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정말 다행이야······. 이제 됐다. 어서 가거라.”

마른 비가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질끈 감았다 뜬 청년의 눈이 번쩍였다.

“가자, 별비야. 한시라도 빨리 붉은 발톱이 말한 곳을 찾아야 해.”

은빛여우는 멀어지는 마른 비의 등을 아련히 바라봤다.

투벅, 투벅.

묵직한 발소리가 다가오고, 기척이 감지된다.

사냥을 마친 괴수가 동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

멈칫하는 기척.

코를 킁킁거리는 소리.

이어질 반응이 예상된다.

“커허엉!”

후아아악―

바람과 함께 무언가가 날아든다.

동굴을 꽉 채운, 시커먼 물체가 은빛여우의 시야를 가렸다.

“크헝! 크아아앙!”

이 냄새!

풋내가 가시긴 했지만, 그놈의 냄새다.

2년 전에 놓친 사냥감!

네가 주구장창 자랑하던 어린 것!

그 찢어 죽일 놈이 여길 다녀간 건가!

“크와아아아앙!”

어디냐!

그놈이 왔다 간 걸 안다!

어디로 갔냔 말이다!

미친 듯이 울부짖던 검치호가 울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 크게 당황한 듯 주춤했다.

천천히 딛는 야수의 앞발은 떨리고 있었다.

“그아··· 가르릉?”

2년 내내 투지를 잃지 않은 존재.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던 인간.

사지가 잘려도 활활 타오르던 눈빛이 꺼져가고 있었다.

“너는······.”

무언가를 말하려던 은빛여우가 말을 삼켰다.

비아가 녀석과의 싸움을 앞둔 지금, 해서는 안 될 말이기 때문이다.

‘불쌍한 녀석.’

그저 영역에 침입한 존재들을 응징했을 뿐이다.

타고난 본성대로 맹수로서 사냥감을 사냥했을 뿐이다.

뒤늦게 외로움을 알았고, 다른 존재에게 정을 붙였다.

하지만 그 감정을 받아들이기엔 실바람을 잃은 자신의 한이 너무도 컸다.

복수를 위해 찾아올 마른 비를 살려야만 했다.

방법이 끔찍했지만, 모르고 저지른 짓들이다.

사람도 아니고 맹수가 마음을 전하는 법을 어찌 알겠나.

처음엔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웠지만, 상황을 헤아리고, 녀석의 마음을 읽게 되니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었던 게 사실이다.

은빛여우는 자신의 애정을 갈구하는 마음을 이용하여 검치호의 정신을 무너뜨린 점에 약간의 미안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시작이 달랐다면······.’

다른 형태로 만났다면, 가까운 사이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니, 그랬다면 서로 엮일 일도, 정이 쌓일 일도 없었겠지.

현실이 중요할 뿐 가정은 무의미하다.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며, 자신은 결국 녀석의 마음을 외면하고, 실바람의 복수와 비아를 살리는 걸 택했다.

‘용서해라. 네가 나에게 준 고통과, 내가 너에게 남길 상처······. 우린 인연이 아니었던 거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된 육신.

어떻게 그렇게 멀쩡히 대화하고, 생기 가득한 눈빛을 쏘아낼 수 있었을까.

육체에 남은 마지막 힘을 그러모았던 것이다.

꺼져가는 촛불이 마지막 빛을 태우듯, 모든 힘을 소진한 은빛여우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너··· 너······. 왜 갑자기······!〕

잠깐 사냥을 다녀온 사이에 이토록 악화될 리가 없다.

모종의 이유로 무리하게 기운을 끌어모은 게 틀림없었다.

뚝뚝 끊어지는 의지에서 검치호의 동요가 읽혔다.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거든. 몸은 이 모양이지만··· 마지막 모습만은······ 의연했던 형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자신은 선택했고, 준비했다.

비아의 사냥을 도와줄 덫이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검치호에 대한 연민을 떨치며, 은빛여우는 어렵게, 어렵게 내뱉었다.

“멍청한······ 짐승 같으니라고. 왜 동요하지? 나한테 정을 느끼기라도 한 거냐? 너 같은 괴물이? 쿨럭, 쿨룩···! 끔찍한 소리하지 마라.”

힘겹게 끊어지는 말들을, 검치호는 떨리는 눈으로 듣고 있었다.

은빛여우는 준비했던 마지막 말을 꺼냈다.

“너와 보낸 2년은··· 내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 널 저주한다. 비아가······ 내 복수를 대신해 줄 거야.”

스르륵 감기는 눈.

은빛여우가 남긴 마지막 말은 연민을 숨긴 저주였다.

“뒈······ 져라. 이 끔찍한 괴물아.”

누가 검치호의 심정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적막이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괴수는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쪽!”

마른 비는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철저하게 기척과 흔적을 지우며 이동했고, 검치호의 탐지 범위를 벗어나자마자 전력으로 질주했다.

감각으로만 더듬을 수 있는 녹색의 길을 찾는 데에 마른 비는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가르릉······.”

정말······ 대단한 인간이다.

2년 전에도 보았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오히려 별비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은빛여우가 보여준 불굴의 정신과 마른 비를 위한 희생은 별비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마른 비와 달리, 냉정할 수 있었던 별비는 눈치챘다.

은빛여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서 별비는 더욱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비아에게 말하면 안 되겠지. 그는··· 숨기길 바랄 거야.’

마른 비가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검치호를 사냥할 때까진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는다.

별비는 은빛여우의 의중을 헤아렸다.

그때,

“크하아아아앙!!”

산맥을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가 터졌다.

분노, 살의, 증오, 원한, 그리고··· 진한 상실감과 슬픔.

수십 가지 감정이 버무려진 울음은 하나의 감정으로 마감됐다.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살의.

산맥 전체를 전율케 하는 살기가 방향을 찾고 있었다.

“집중해, 별비야. 쉽게 찾지는 못할 거야.”

마른 비는 동요하지 않았다.

오직 길을 찾는 데 집중할 뿐이다.

정신이 든 별비가 앞에 펼쳐질 지형을 떠올렸다.

“헉, 헉······.”

마른 비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삼 일.

한숨도 자지 않고 애뢰산 곳곳을 누볐다.

수십 갈래로 쪼개지고 합쳐지는 감각의 길.

산의 기운은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고, 그 모든 게 유기적으로 결합되며 하나의 생물처럼 맥동했다.

별비가 없었다면 찾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다.

기운이 고이는 지점을 헤아릴 수도 없었으니까.

애뢰산의 정기를 받은 짐승만이 느낄 수 있는 교묘한 장소였으니까.

붉은 발톱의 말처럼 오직 별비만이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여기야. 여기가 틀림없어.”

그러나 마른 비가 없었다면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거다.

놀랍게도 기운을 더듬는 감각은 별비보다도 마른 비가 뛰어났고, 그 덕에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었다.

별비가 예상한 지점을 샅샅이 훑은 끝에, 둘은 동쪽 산맥의 정상 부근에서 시커멓게 뚫린 구멍을 발견했다.

“그라랑?”

여기가··· 맞나?

별비는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다른 곳과 달리, 저 아래에서 무언가가 감지되긴 한다.

애뢰산 전역에서 모인 정기가 구멍으로 쏟아지듯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고이지 않는다.

흘러내린 기운들이 수증기가 증발하듯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분명 어릴 때 아비가 데려왔던 장소인 건 맞는데, 도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여기야! 여기가 맞아! 날 믿어, 별비야.”

또 저 근거 없는 자신감!

맨날 지 느낌이 다 맞지.

“일단 가 보자!”

별비가 구시렁대는 사이 마른 비가 훌쩍 뛰어내렸다.

“크르르앙?!”

야, 야! 좀 살펴보고···!

아······. 또 제멋대로 가버렸어!

인간들이 이래서 욕을 하는구나.

울고 싶다······ 시발.

크게 한숨을 쉰 별비가 무저갱 같은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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