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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143화 (143/463)

143화

달빛이 피부를 적시는 밤이다.

새하얗게 번지는 빛무리가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둥글게 뜬 만월의 손길은 이곳에도 차별 없이 내려앉았건만.

“후우, 훅···!”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깊이도 가늠이 되질 않는다.

입을 쩍 벌린 어둠은 속을 내보이지 않았다.

푸스스슥―

손가락을 박아 넣은 자리에서 돌가루가 흘러내렸다.

“후우······ 끝이 없는데, 이거?”

산꼭대기에서부터 아래로 쑥 패인 지형.

아이가 모래성에 손가락을 들이밀 듯, 초월적 존재가 인세에 장난삼아 뚫어 놓은 구멍 같다.

수직으로 펼친 절벽은 디딜 곳 하나 없었고, 둥글게 둘러친 자연의 방벽은 거대한 우물 안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주었다.

“하늘밖에 안 보이네.”

암벽에 매달린 마른 비가 고개를 들었다.

까마득한 어둠의 구간을 지나, 저 멀리 보이는 하늘에는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달이 뿜어내는 빛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시커먼 어둠이 내려앉는 달빛을 집어삼키는 것만 같았다.

“별비야, 괜찮아?”

그그그극―

날카로운 무언가가 절벽을 긁는 소리.

곧이어 어둠을 뚫고 불만에 찬 울음소리가 수직 동굴을 울렸다.

“크앙!”

내가 살펴보고 내려가자고 했지?

이틀째 벼랑에 매달려서 이게 뭐 하는 짓이냔 말이다!

별비가 짜증 섞인 울음을 토했다.

그리고 마른 비는 넉살 좋은 웃음으로 별비를 달랬다.

“에이, 어차피 내려올 수밖에 없었잖아. 확인을 해봐야지. 이렇게 깊은 걸 보면 뭔가 있을 거 같지 않아? 두근두근하지?”

“······.”

하나도 안 두근거린다.

이 미칠 듯이 긍정적인 새끼야.

내려갔다가 아무것도 없으면 어쩔 거야?

우리 지금 5일 동안 한숨도 못 잔 건 알고나 있냐?

하다못해 내려오기 전에 밥이라도 먹고 왔으면······.

별비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마른 비를 믿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감각을 건드리는 무언가를.

저 아래에는 직접 보기 전엔 짐작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콰악!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별비는 착실하게 아래쪽으로 발톱을 박아 넣었다.

“음······. 설마 땅 밑까지 내려가는 건 아니겠지?”

무려 이틀이다.

이틀 내내 쉬지 않고 절벽을 탔다.

이 정도 내려왔으면 끝이 보일만도 하련만.

발아래 도사린 어둠은 도무지 바닥을 드러낼 기미가 없었다.

“별비야. 이러다가 우리······.”

콱!

“여기서······.”

콰악!

“힘이 빠져서 죽는 건 아니겠지?”

마른 비가 암벽에 손가락을 박아 넣으며 말했다.

“크항!”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어둠 너머에서 별비가 빽 소리 질렀다.

“야, 모르는 거야. 손가락 한 번 찔러 넣을 때마다 기운이 빠져나간다고.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나도 슬슬 지치기 시작했어.”

“카항···!”

저놈의 주둥이를 그냥···!

그 입 좀 다물라고 면박을 주려던 순간이었다.

터턱!

“어?!”

마른 비의 외마디 소리가 별비의 입을 막았다.

“이거···!”

발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발바닥을 단단히 받치는 수평의 대지.

이틀 동안 허공을 더듬던 다리가 마침내 땅에 안착했다.

“다, 다 왔어!”

역시 사람은 땅을 밟아야 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절벽을 기어 내려가는 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마른 비의 얼굴에 화색이 돈 순간,

화아아아악―!

동굴을 울리며 빛이 일어났다.

텅 빈 공간에 급속도로 생기가 들어차고, 활성화된 기운이 수직 동굴의 정상을 향해 치달린다.

난데없는 푸른빛이 꽉 들어찬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세상에···!”

허공을 질주한 푸른빛은 수직 동굴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였다.

달빛을 삼켰던 어둠을 나무라듯이.

마른 비는 호흡을 고르는 것도 잊고, 승천하는 빛을 홀린 듯이 올려다봤다.

“하늘이···!”

동굴 입구까지 다다른 빛은 그릇을 꽉 채운 물처럼 흘러넘쳤다.

그리고 단숨에 영역을 하늘까지 확장해 나갔다.

머나만 설원의 땅, 축복받은 자만이 볼 수 있다는 극광(極光)의 한 자락처럼.

밤하늘에 펼친 푸른 장막이 달빛을 머금고 반짝인다.

은하수를 압도하는 미지의 경이.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의 편린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이건······.”

전 애뢰산 산군이 발견했던 곳.

산의 정기에 밀접한 별비가 더듬어낸 장소.

마른 비의 감각이 이끈 지점!

드넓은 산맥을 가로지르는 지맥(地脈)의 심장이 이곳에 있었다.

“저기! 저걸 봐!”

하늘로 치솟은 푸른 기운보다 눈길을 끄는 건 따로 있었다.

수직 동굴의 바닥, 그 정중앙에서.

푸른 무언가가 살아 있는 것처럼 일렁인다.

그것은 타오르는 불꽃같기도 했고, 흩어지는 연기 같기도 했다.

눈에는 보이지만 잡히지 않는 환영이었다.

“이제 알겠어······. 내가 느꼈던 감각의 실체! 이게 우릴 부른 거야.”

불렀다?

글쎄.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느껴졌고, 홀린 듯이 이끌렸을 뿐이다.

감각이 더듬은 녹색의 길.

그 끝엔 맥동하는 산의 지기(地氣)를 품은 핵이 있었다.

“산맥의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어! 위에서 발견하기 힘든 이유가 이거였구나!”

까마득한 깊이와, 자연기를 흡수하는 지맥.

저 위에서는 찾기 힘든 게 당연했다.

실체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산의 기운과 구별이 어려웠으니까.

별비의 아비도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 확신은 없었으리라.

산맥의 지기를 관장하는 심장이 처음으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자연기가··· 고여 있어!”

대자연의 기운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이곳에 모였던 지기 역시 지맥을 타고 산맥 전체로 뻗어 나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하고 고이게 되는 미량의 기운들.

지금 마른 비 앞에 있는 건 아득한 세월 동안 축적된 자연기의 응집체였다.

“네가 우릴 부른 거야?”

마른 비는 마치 인간에게 말을 걸듯 물었다.

대답이 있을 리가 없음에도.

하지만 놀랍게도 애뢰산의 심장은 마른 비의 물음에 응답하듯 반짝였다.

“가까이······ 오라고?”

야수 친화?

별비에게 건네받은 자연기?

그도 아니면 운남의 대자연이 선택한, 특별한 존재라서?

모르겠다. 알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마른 비는 별비조차 듣지 못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맞구나! 네가 날 인도한 거였어.”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미리 예정된 하늘의 안배처럼,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는 점.

무엇을 떠맡기려는지는 몰라도, 운남의 대자연은 마른 비를 ‘선택’했다.

휘아아악―

마른 비가 은은하게 일렁이는 청광에 다가간 순간.

청정한 바람이 불었다.

맑은 공기로 가득 찬 숲에 들어선 것처럼, 대자연의 기운이 지친 육신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동굴을 내려오며 쌓인 피로가 거짓말처럼 씻겨 나갔다.

“확실해.”

단련된 육체가,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이 말한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환영은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고.

“별비야. 이리 와.”

넋을 놓고 있던 별비가 흠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무슨 조화인지는 몰라도, 그것의 주인은 너다.

난 그것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그게 기다려온 건 내가 아니라 너다.

별비의 사양에, 이번에는 마른 비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난 2년 전에 독림에서 죽었어. 네가 있기에 내가 있는 거야. 지금도, 앞으로도, 내게 주어지는 모든 걸 너와 나눌 거야.”

“······.”

······망할 놈이 또 엉뚱한 데서 제멋대로 감동을 주네.

어찌 모를까.

눈앞에서 타오르는 자연기의 정수.

그것을 취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쑥스러워진 별비가 괜히 툴툴댔다.

그리고 마른 비의 옆에 나란히 섰다.

“크항!”

좋다. 함께 강해지자!

독 처먹고 빌빌대던 꼬맹이를 살려놓은 덕 좀 보자고!

태고의 자연이 살아 숨 쉬는 땅, 운남.

펄떡이는 대자연의 심장 한복판에서, 청년과 야수가 푸른 형상에 손을 뻗었다.

검치호

“크하아아아앙!”

산맥을 가를 듯한 울음소리.

굉음과 함께 숲의 한 자락이 잘렸다.

바위가 부서지고, 거목이 쓰러진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날뛰는 야수 때문에 애뢰산은 신음하고 있었다.

“크헝! 카아앙!”

어디냐!

아직 산을 벗어나지 않은 걸 안다!

어디 처박혀서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 거냐!

당장 튀어나오지 못해!

검치호의 눈은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은빛여우의 숨이 멎은 후,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게 된 야수는 오로지 마른 비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애꿎은 바위 하나가 또 박살 나려는 순간.

화아아아악!

산맥 저편에서 강렬한 투기가 치솟았다.

앞발을 휘두르던 검치호가 우뚝 멈췄다.

핏발 선 야수의 눈이 북쪽 어딘가를 짚었다.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잘근잘근 씹어 먹어야 할 인간!

애타게 찾아 헤맨 놈의 기운이었다.

“카아아아앙!”

포효를 터뜨린 야수가 폭발하듯 달려 나갔다.

콰콰콰콰캉!

애뢰산의 지형이 변하고 있었다.

마른 비의 기운이 포착된 지점을 향해 달리는 검치호는 궤적에 걸리는 지형지물을 모조리 갈아엎으며 똑바로 나아갔다.

단숨에 산 하나를 넘은 검치호의 눈은 살기로 번들거렸다.

“카항!”

저 언덕!

저 언덕만 넘으면 된다!

저것만 넘으면 드디어 그 찢어죽일 놈을!

“······?!”

없다.

산맥 너머까지 치솟았던 투기!

그건 자신에게 보내는 도전장이 분명했다.

주제를 모르는 피조물이 덤비라고 도발을 한 게 확실하다.

한데 없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그새 어디로···?!

푸화아악!

저 멀리 북서쪽에서 또다시 투기가 솟았다.

자신이 뛰어오는 사이 쥐새끼는 거리를 벌린 모양이었다.

검치호가 분을 못 이기고 부들부들 떨었다.

싸우자는 게 아니었나?

다시 보는 날, 나를 죽이겠다면서?

이게 뭐 하는 짓거리냐?

피가 머리에 쏠린 검치호는 유인이란 걸 떠올릴 정신도 없었다.

아니, 유인이어도 상관없다.

마른 비를 잡을 수만 있다면, 검치호는 지옥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작정이었다.

산맥을 뒤집을 듯 울어 젖힌 괴수가 추격을 재개했다.

꽈아아앙!

숲이 통째로 터져 나가고, 고대의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해가 서산 너머로 넘어가는 시점, 마른 비는 석양을 등지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수직으로 낙하하는 폭포가 우렁찬 물소리를 울린다.

검치호가 폭포 너머, 반대쪽 절벽 끝에 선 마른 비를 눈에 담았다.

“칼이빨. 오랜만이네.”

2년 만에 마주한 숙적.

좀 더 극적인 순간이 되리라 상상해왔건만.

막상 검치호를 눈앞에 두자, 마른 비는 스스로 느끼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여기였지? 너에게 등을 얻어맞고 추락한 곳.”

마른 비가 팔을 뒤로 돌려서 등을 어루만졌다.

그곳엔 깊게 패인 검치호의 발톱 자국이 선명했다.

“너에게 실바람이 물려 죽은 곳.”

참담했던 기억이다.

은빛여우와 실바람을 떠올린 마른 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널 죽이러 왔다.”

하늘을 벌겋게 물들인 노을은 곧 뿌려질 피의 예고일지니.

“덤벼. 사냥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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