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전과 달리 인간의 말을 알아듣게 된 검치호는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나를 사냥하겠다고?
고작 그 정도의 힘으로?
어떤 생물도 내 앞에선 기를 펴지 못한다.
야생의 정점을 자부하던 것들도 모조리 피식자로 전락했다.
내가 야생에 던져진 순간, 운남 생물들의 먹이사슬 층위는 전부 한 단계씩 하락한 것이다.
‘그’가 애지중지하던 어린 것.
산 채로 뼈까지 씹어 먹어주마!
맹렬한 포효와 함께 검치호가 날아올랐다.
거대한 폭포를 사이에 둔 절벽과 절벽.
한참을 돌아가야 할 만큼 아득한 거리다.
하지만 검치호는 우회하기보다 폭발적인 도약을 시도했다.
날짐승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는 괴수.
어지간히 담이 큰 사람도 심장이 오그라들 만큼 엄청난 광경이었다.
“크아아아앙!”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
새하얗게 빛나는 발톱.
기형적으로 커다란 송곳니가 마른 비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었다.
‘느긋하게 돌아올 리가 없지. 바로 달려들 줄 알았다!’
마른 비는 검치호가 숲을 뚫고 나온 순간부터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검치호의 발톱이 엄습하기 직전, 수직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크항?!”
제자리 뛰기?
뭐 하는 짓이지?
그따위 몸짓으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검치호의 고개가 위로 돌아가고, 마른 비를 겨냥했던 이빨과 발톱도 위쪽을 향했다.
체공 상태인 걸 노린 모양인데, 그건 놈의 심각한 오판이다.
사정권에 접어드는 순간, 그대로 찢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자신이 착지하는 걸 내버려 둔다?
그럼 놈이 살아날 가능성은 아예 사라진다.
인간의 다리론 절대 자신을 떼어놓을 수 없으니까.
‘조금만 더!’
마른 비는 허공에 뜬 채로 준비했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함정이란 결국 예측하지 못할 무언가를 안배하는 것이며, 그로써 사냥감의 허를 찌른다.
그리고 최고의 함정은 자연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거리, 이 궤적, 이 각도!
모두 계산한 대로다.
마른 비가 선점했던 공간에서 몸을 뺐을 때, 눈부시게 타오르는 석양이 검치호의 눈을 찔렀다.
“카항?!”
찰나면 족하다.
갑작스런 빛의 습격에 검치호가 움찔할 때.
마른 비의 몸이 움직였다.
쒜에엑―!
어디서 이따위 장난질을!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
방향과 거리를 가늠하기엔 충분하다.
동공을 찌른 빛에 잠시 시력을 잃었지만, 검치호는 확신을 가지고 앞발을 그었다.
퍼서석!
“······?!”
이 감촉은 뭐냐?
마치 무른 암석을 부순 것 같은···.
빠아악!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둔탁한 충격이 후두부를 때렸다.
숨겼던 돌을 집어 던지고, 일체화를 이룬 채 뒤를 따른 마른 비가 초격을 명중시켰다.
괴수의 거체가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크앙!”
이런 간지러운 공격으로 어쩌겠다는 거냐?
너는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쳤다.
착지와 동시에 솟구쳐서 네놈의 몸뚱어리를···!
후우욱―
“······?!”
발이 빠진다.
아니, 몸 전체가 통째로 가라앉고 있었다.
땅을 디디려던 검치호는 푹 꺼지는 지면과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꽈아앙!
둥그렇게 파놓은 구덩이.
검치호의 몸체보다 조금 넓은 구멍의 바닥에는 날카로운 암석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었다.
잎이 넓은 활엽수를 겹쳐서 얹고, 흙으로 위장한 함정은 겉으로 보기엔 표가 나지 않았다.
금속류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기에 검치호의 예민한 후각으로도 감지할 수 없었다.
‘이 정도론 끄떡없겠지.’
내리꽂힌 가속도와 육중한 무게.
단단한 암석들만 골라서 가공했지만, 검치호의 단단한 피부를 뚫을 순 없다.
기껏해야 생채기를 내는 게 전부일 거다.
실제로 돌들을 가루로 만든 검치호는 멀쩡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분노로 덮인 야수의 표정 위로 짜증이 스쳤다.
〔날 죽이겠다더니 고작 이따위 것들을 준비한 거냐?〕
뇌리로 날아든 검치호의 의지에, 마른 비가 눈썹을 씰룩였다.
이걸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침착하고 차분했던 붉은 발톱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강함’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듯 우렁우렁한 울림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글쎄. 난 내가 준비한 걸 네가 버텨낼 수 있을지 의문인데? 내 예상보다 많이 모자란 거 같아, 너.”
2년 전, 설검대와의 지긋지긋한 추격전을 겪으며 도발에는 도가 튼 마른 비다.
도발은커녕 자신 앞에서 벌벌 떠는 생물들만 보아왔던 검치호가 그 조롱을 받아넘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검치호의 앞발에 핏줄이 선 순간, 마른 비가 마무리 일격을 날렸다.
“은빛여우 형이 싫어할 만하네. 멍청하고, 둔한 데다가 약해.”
“······?!”
순간, 검치호의 눈이 멍해졌다.
‘나한테 정을 느끼기라도 한 거냐? 너 같은 괴물이? 끔찍한 소리하지 마라.’
〔아··· 아니야.〕
검치호는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리듯 머리를 저었다.
‘너와의 2년은 내겐 지옥이었어. 널 저주한다.’
〔아니야. 그렇지 않다. 그럴 리 없어!〕
뭐가 아니라는 거지?
그렇지 않다는 게 무슨 말이야?
설마······ 형이 자신을 싫어할 리 없다는 뜻인가?
검치호의 의사를 읽은 순간, 마른 비는 계획이고 뭐고 달려들 뻔했다.
‘형을 그렇게 만든 놈이 그딴 소릴 지껄여?’
마른 비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죽이고 싶다.
지금 당장 달려들어서 저놈의 목을 꺾어놓고 싶다.
하지만 정면으로는 이길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주먹을 부들부들 떨던 마른 비가 가까스로 몸을 물렸다.
“······넌 오늘 무조건 죽어.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자신 있으면.”
상반된 감정이 들끓으며 교차한다.
복수와 질투.
하지만 이 순간, 은빛여우가 준비한 덫이 빛을 발하니,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검치호의 평정심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비아가 내 복수를 대신해 줄 거다. 뒈져라. 끔찍한 괴물아.’
끝까지 나에게서 벗어나려던 네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나를 저주했던 네가, 그토록 신뢰하고 아끼는 게 저 아이란 말이지?
좋다. 갈기갈기 찢어서 애뢰산에 흩뿌려주마.
아니, 살점 하나, 뼈 한 조각까지 씹어 삼켜주겠다!
콰아앙!
구덩이에서 뛰쳐나온 검치호가 마른 비를 노려봤다.
어린 것은 자신이 쫓아올 거라 확신하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빼고 있었다.
하늘을 뒤집을 듯 울부짖은 검치호가 땅을 박찼다.
쒜에엑―!
설지굉에게 따라 잡혀서 전투를 치렀던 곳.
흉웅이 검치호에게 목숨을 잃었던 장소.
그리고··· 은빛여우를 두고 도망쳐야만 했던 그곳!
마른 비는 2년 전에 가로질렀던 개활지를 달리고 있었다.
‘온다!’
숨 막힐 듯 덮쳐오는 살의!
등 뒤에서 핏빛 해일이 밀려오는 것 같다.
자연기를 끌어올려 저항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게 틀림없었다.
먹이사슬 정점에 군림하는 포식자는 끔찍한 살기를 줄기줄기 뿜으며 따라붙고 있었다.
‘셋.’
콰아앙! 우지끈!
절벽 쪽의 숲이 뚫리는 소리.
‘둘.’
후아아아악―!
공기를 가르며 거리를 좁히는 기척.
‘하나.’
야수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다.
놈은 벌써 등 뒤까지 따라붙었다.
‘다 왔어! 한 걸음만 더···!’
“크아아앙!”
기껏 도망친 게 여기냐?
하잘것없는 생물 같으니라고!
그가 틀렸다.
넌 그의 기대를 받을 자격이 없는 쓰레기였어!
검치호가 오른쪽 앞발을 들어 올리고,
‘지금!’
마른 비는 급격히 자세를 낮췄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살의를 고스란히 받으며, 좌측으로 기동한다.
마른 비를 후려치기 위해 검치호도 방향을 틀었다.
들어 올린 앞발을 유지하고, 선회를 위해 왼쪽 앞발을 디뎠을 때.
후우욱―
“······?!”
이 느낌!
아까와 같다.
축이 되는 왼발을 받쳐줄 땅이 휑하게 비었다.
훅 떨어지는 왼발과 기우는 몸.
빌어먹을 꼬마는 어느새 반전하여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타아앗!”
기회를 잡았으니 큰 기술을 먹인다?
아니다. 절대 욕심을 내선 안 된다.
큰 걸 노리다간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하고 말 터.
확실한 순간들을 포착해 피해를 누적시킨다.
마른 비의 다리가 쾌속한 일격을 뻗어냈다.
‘섬(閃), 날짐승 떨구기!’
발끝을 날카롭게 가다듬은 족격.
오직 속도에 치중한 발차기가 검치호의 턱 끝을 강타했다.
“카항···!”
한순간이면 족하다.
구덩이에 왼발을 꽂은 채 턱을 얻어맞은 놈이 정신을 못 차릴 때!
끼이이― 후아아악!
고목 위에서 거목이 내리꽂혔다.
끝을 날카롭게 깎은 통나무다.
속도에 무게가 더해져 충격을 낳을지니.
고목에 매달린 통나무가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검치호에게 치달았다.
퍼어억!
“카하앙!”
좌우에서 날아든 통나무가 검치호의 몸에 꽂혔다.
꽂혔다?
아니, 그건 바람일 뿐이다.
어지간한 생물이라면 몸이 꿰뚫린 채 날아올랐겠지만, 바윗덩이 같은 검치호의 육체를 뚫기엔 속도와 무게가 한참이나 모자란다.
그래도 효과는 있었다.
갑작스런 충격에 놈이 주춤했으니까.
지금이다!
후속타를 꽂아 넣을 시점은.
두 그루의 통나무가 검치호를 두드릴 때, 마른 비의 발은 전진하고 있었다.
‘집(集), 솔잎 털기!’
왼쪽 발이 구덩이에 빠지는 바람에 낮아진 중심.
두드리기 딱 좋은 높이다.
눈부시게 터져 나간 발차기 연격이 검치호의 턱에 작렬했다.
빠바바바박!
“크, 커헝···!”
검치호의 고개가 조금씩 하늘로 들렸다.
지칠 줄 모르고 쏟아붓는 연타가 고대의 괴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좋아! 잘하면 여기서 끝낼···!’
찌이잉―!
뇌리를 울리는 경고음.
마른 비의 감각이 치명적인 위기를 감지했다.
“큭···!”
위험하다.
당장 빠져야 한다!
마른 비가 발을 물리며 급격히 몸을 빼내자마자,
부아아악―!
섬뜩한 소리가 허공을 긁었다.
검치호의 앞발이 긁고 간 궤적에는 자연기의 잔흔이 일렁이고 있었다.
‘뭐 이런 괴물이···!’
검치호는 하늘로 들렸던 고개를 서서히 낮추고 있었다.
번들거리는 야수의 눈에는 같잖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완벽한 순간을 포착해 공격을 꽂아 넣었음에도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한 것이다.
‘당황하지 마. 이 정도는 예상했잖아.’
마음을 다잡은 마른 비가 등을 돌리고, 검치호는 구덩이에 빠졌던 앞발을 들어 올렸다.
〔또 도망을 쳐? 그가 그토록 기다린 게 이따위 쓰레기라니! 넌 그의 기대를 받을 자격이 없다! 그가 틀린 것이야!〕
검치호가 울부짖는 사이, 마른 비는 벌써 개활지를 통과한 상태였다.
2년 전과는 확연히 다른 속도.
청년이 된 소년의 앞에는 독림으로 향하는 검은 숲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장벽 같은 숲의 한복판에는 딱 인간이 지날 만한 통로가 있었다.
뒤따라오는 설검대를 위해 설지굉이 뚫어놨던 길.
어지러이 얽힌 나무들 사이로 뻥 뚫린 통로는 인간의 손길이 닿았다는 걸 증명하듯 대단히 이질적이었다.
“후우우······. 덩치는 커다란 게 말만 더럽게 많네. 날 잡지도 못하면서.”
검치호의 심기를 두드리는 말이었다.
은빛여우가 아니었더라도, 검치호는 마른 비를 따라올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만 떠들고 얼른 따라와. 거의 다 왔어. 네 무덤.”
“크, 크아아앙!”
미칠 듯이 얄미운 인간이다.
무조건 저 입부터 찢어 놓으리라 결심하며, 검치호가 검은 숲으로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