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촤아아악! 서걱! 쿠쿵!
약간은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설지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종횡으로 얽힌 나무들을 통째로 날려버리며, 괴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속도는 뻥 뚫린 통로를 달리는 마른 비와 비슷할 정도였다.
‘다 왔어! 조금만, 조금만 더···!’
여유 있던 도발과 달리 마른 비는 초조했다.
직접 손발을 맞대본 검치호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다.
지난 2년간 자신이 눈부신 발전을 이뤘듯 검치호도 성장한 것이다.
인간에 비해 육체적 조건이 월등한 야수가 자연기까지 다루니, 그 성장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저놈, 이대로 가면 푸른 눈보다도 강해질 거야.’
현시대의 야수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한 고대 종이다.
너른 하늘과 함께하며 자연기와 기술을 갈고 닦은 푸른 눈이지만, 하늘이 정해준 종의 한계를 뛰어넘진 못할 터였다.
검치호는 아직 모든 힘을 내보이지 않았고, 어쩌면 놈은 이미 푸른 눈을 능가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달라질 건 없어.’
애초에 푸른 눈 이상의 맹수를 상정하고 준비한 사냥이다.
놈이 얼마나 강해졌든 충분히 잡을 수 있다.
그렇게 믿고 가야 한다.
검은 숲이 끝나는 순간, 마른 비가 신형을 날렸다.
추아아악!
마른 비가 독림에 당도한 직후, 검치호도 검은 숲을 뚫었다.
처음으로 독림에 발을 들인 검치호는 무척이나 불쾌했다.
“크르릉······.”
뭐냐, 빛 한 점 들지 않는 이 시커먼 늪은?
이 눅눅하고 더러운 공기······ 독인가?
그러고 보니 독충과 독사들 천지군.
어쩐지 이 지역은 다가오기도 싫더니만······.
네놈이 기껏 머리를 굴려 준비한 게 독이냐?
콰악!
뱀이나 두꺼비 등 그나마 뇌가 발달한 파충류는 검치호의 막강함을 인지한 모양이었다.
검치호가 나타난 순간, 제 영역을 지키던 놈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으니까.
용감하게(?) 달려든 건 독충들이었다.
놈들은 검치호가 영역에 들어오자 기둥 같은 다리에 달라붙어 독을 주입하려 했다.
2년 전에 마른 비에게 그랬듯 독이 통하지 않자 당황하며 물러났지만.
〔이런 잔머리뿐이라니. 하찮고도 하찮구나.〕
독이 통할 리도 없지만, 이깟 미물들이 자신의 가죽을 뚫을 리 만무하다.
검치호는 달라붙는 독충들을 내버려 두고 마른 비를 찾았다.
찢어 죽일 꼬마는 늪이 시작되는 가장자리에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이제야 포기한 건가? 그럼 이만 죽어라.〕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
검치호는 곧바로 마른 비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마른 비는 힐끗 뒤를 돌아봤다.
‘여기만 잘 넘기면.’
최상의 함정은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며, 뛰어난 사냥꾼일수록 함정의 연계를 중요시한다.
타격을 쌓아 피해를 누적시키듯 종류가 다른 함정들을 중첩시켜 사냥감의 기력을 갉아먹는 것이다.
검치호가 떨어져 내리는 찰나, 마른 비는 또다시 후퇴했다.
〔또? 또 도망가는 것이냐!〕
검치호의 ‘목소리’가 마른 비의 뇌리를 울렸다.
거기엔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들 분노가 서려 있었지만, 마른 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녀석의 발이 떨어져 내리는 부분, 검치호가 딛는 자리를 주시할 뿐이다.
투벅!
‘제길! 짧아. 조금만 더!’
어쩔 수 없다.
여기선 목숨을 걸고 부딪칠 수밖에.
자연기를 끌어올려 범의 앙심을 발동한 마른 비가 침을 삼켰다.
“쿠아아앙!”
마른 비를 따라 들어온 검치호가 앞발을 휘둘렀다.
한 방만 제대로 맞아도 죽는다.
구름 걷기. 낙엽 가누기.
찰랑거리는 늪 안쪽으로 진입하며, 마른 비는 필사적으로 검치호의 공격을 흘렸다.
첨버엉!
‘들어왔어!’
2년 전엔 알아볼 겨를이 없었지만, 이번에 들어와 확인한 ‘그것들’은 늪의 가장자리를 차지한 주인들이다.
그리고 독림에 거주하는 생물답게 지독한 놈들이었다.
식은땀이 절로 흐르는 공격을 피하며, 마른 비는 늪 안쪽으로 검치호를 유인했다.
첨버엉! 첨벙!
굵직한 네 개의 다리.
면적이 큰 만큼 ‘놈들’의 표적이 되기도 좋다.
시커먼 물속에서 더욱 새카만 것들이 검치호에게 달라붙는 걸 확인하고, 마른 비는 몸을 뺐다.
아니, 빼내려 했다.
“크하항!”
안이했다.
두어 번 공격을 흘리고, 한눈을 파는 마른 비를 검치호가 놓칠 리 없었다.
흉웅의 목을 한 방에 날려버린 앞발이 마른 비의 몸통을 강타했다.
‘죽는다···!’
그건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자연기를 있는 대로 때려 부어 피격 부위를 강화하고, 깃털 날리기로 체중을 흩뜨린다.
낙엽 가누기와 구름 걷기까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회피술을 동원했지만, 검치호의 공격은 너무나 빠르고 지나치게 강했다.
콰아앙!
웬만한 공격은 바람에 흩날리는 깃털처럼 받아넘길 수 있으련만.
와족의 회피기로도 흘릴 수 없을 만큼 검치호의 공격은 무지막지했다.
붕 떠오른 마른 비가 물수제비로 던져진 돌처럼 늪의 표면을 튕기며 날아갔다.
퍼어억!
설지굉이 판자를 이용해야만 넘을 수 있었던 늪을, 마른 비는 얻어맞은 충격으로 건너뛰었다.
늪의 반대쪽 땅에 처박힌 마른 비가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커··· 커허억!”
내장이 뒤집힌 것 같은 충격.
마른 비가 고개를 돌리며 피를 한 움큼 토했다.
범의 앙심을 터득하지 못했다면, 순간적으로 발동한 깃털 날리기가 아니었다면, 맞는 순간 즉사했으리라.
‘이, 일어나야···!’
엎어져 있을 시간이 없다.
저 괴물은 곧바로 쫓아올 테니까.
흔들리는 시야를 억지로 붙들며, 마른 비는 일어섰다.
꽈아앙!
육중한 무게만큼이나 착지음도 엄청나다.
늪의 어둠을 밝히며, 붉은 눈 한 쌍이 타오르고 있었다.
투벅, 투벅.
석림에서 만난 마웅과 수천의 사냥꾼들.
그들은 중원 최고의 사냥꾼들이라 했다.
그들이 제대로 준비하고 달려든다면, 이 괴물을 잡을 수 있을까?
어려울 것 같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냥의 비기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어쨌든 자신은 지금 이 괴물과 맞서고 있고, 거꾸러뜨려야만 한다.
그리고 결국 사냥의 마지막 단계는 직접 숨통을 끊는 작업일 수밖에 없었다.
허리를 세운 마른 비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할 거다. 이만 죽어라.〕
엄습하는 거대한 적의 앞에서, 마른 비는 선언했다.
“이 이상 물러날 생각도 없어. 네 무덤이 바로 여기거든.”
키이이잉―
그것은 고대부터 내려오는 술법이다.
전사로 인정받은 자에게만 허락되는 와족 비전의 술식이다.
전투화장이 마른 비의 얼굴에서 빛을 발했다.
“으아아아!”
너른 하늘조차 마른 비의 잠재력을 모두 들여다보지 못했다.
푸르게 타오르는 눈.
맥동하는 심장.
팽창하다 못해 터질 듯이 꿈틀대는 육체!
현재 끌어 쓸 수 있는 자연기의 한계치를 뛰어넘는 기운이 폭발한다.
어둠이 잠식한 늪에 광전사가 강림했다.
“형은 너에게 안쓰러움을 느낀 모양이지만, 난 아냐.”
실바람을 잡아먹고, 형의 사지를 잘라놓은 괴물.
외로움? 정?
개 같은 소리.
세상에 던져져 살아가는 생물 중 사연 없는 존재가 어디 있겠나.
모든 건 행위의 결과가 증거할 뿐이다.
이놈은 내게 소중한 이들을 해쳤다!
천성이 선한 마른 비지만, 검치호에게는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못했다.
“칼이빨. 여기서 죽어라.”
마른 비의 눈이 빛을 담았다.
꽈아앙!
번갯불이 공간을 압축하고, 괴수의 턱 밑으로 파고든 청년이 다리를 올려 찬다.
그것은 푸른빛을 두른 대지의 창이니, 괴수의 고개가 하늘로 덜컥 꺾였다.
“크··· 커···!”
듣기도 싫은 울음을 뱉게 놔둘 것 같으냐.
수직으로 회전한 마른 비가 뒤꿈치로 괴수의 정수리를 쪼갰다.
날짐승 떨구기에 이은 거목 쪼개기.
검치호의 고개는 하늘로 치솟다 말고 도로 땅바닥으로 처박혔다.
괴수의 턱 끝에 올빼미 사냥이 꽂히고, 휘돌아 내치는 어깨가 산 허물기를 토해낸다.
정타를 얻어맞은 검치호의 몸이 뒤편으로 날아갔다.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인다!’
체력은 충분하나, 자연기의 절대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애뢰산 지맥의 심장으로부터 자연기의 정수를 건네받았지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시간이 없었다.
녀석에게 붙잡힌 형을 구출해야 했기 때문에.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를 자연기의 소화 작업을 기다릴 순 없었다.
‘그럼에도······.’
힘이 넘친다.
정수를 흡수하기 전과 지금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날아가는 검치호를 훌쩍 앞지른 마른 비가 오른손 정권을 장전했다.
“하아앗!”
낭랑한 기합성과 함께 뻗어 나가는 주먹.
와족 정권 바위 부수기가 날아드는 검치호의 몸체를 두드렸다.
뻐어어억!
부순다?
이건 차라리 꽂혔다는 표현이 옳다.
마른 비의 팔뚝은 검치호의 몸에 깊게 박혀서 어깨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대의 괴수는 신음도 토하지 못하고 피를 뿜었다.
‘지금이다!’
큰 기술을 쓸 기회를 잡았다.
연달아 두들겨 맞은 녀석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강렬한 일격으로 괴수의 숨통을 끊는다.
휘릭―
마른 비의 등이 검치호를 향하고, 정심한 자연기가 등판에 중첩된다.
전신으로 끊어치는 충격파!
우둔한 땅의 비기, 천둥바위가 검치호를 덮쳤다.
“크하앙!”
이변이 감지된 건 그 순간이었다.
퍼퍼퍼펑!
중첩시킨 기의 방벽이 터져 나간다.
괴수의 날카로운 발톱이 천둥바위를 찢어발기며 전진하고 있었다.
등을 후벼 파는 섬뜩한 통증에 마른 비가 신음을 터뜨렸다.
“아아악!”
마른 비가 등에 꽂힌 발톱을 빼내며 뒤로 물러났다.
풀썩 떨어져 내린 검치호도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잠시간의 소강상태.
타격을 입은 인간과 괴수는 서로를 노려보며 부상을 추슬렀다.
‘성급했어······.’
빠르고 간결한 기술들로 좀 더 피해를 누적시켰어야 했다.
인간이라면 벌써 숨이 끊어졌겠지만, 상대는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막강한 고대의 괴수였다.
얼굴에 수놓인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번쩍이는 가운데, 마른 비의 눈이 후회를 담았다.
‘상처는······.’
천만다행인 건 발톱이 깊게 박히진 않았다는 점이다.
천둥바위를 뚫으면서 녀석의 기운도 많이 상쇄된 모양이었다.
강피가 버텨주지 못했다면 장기가 상했을 터.
통증은 있지만 다행히 몸을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놀랍구나.〕
몸을 우뚝 세운 검치호가 마른 비에게 의지를 보냈다.
〔이렇게 큰 타격을 입은 건 처음이다. 방금 그걸 허용했다면 위험할 뻔했어. 힘과 속도는 물론이고 기운까지 갑자기 상승하다니. 꽁꽁 숨겨둔 게 그것이었나.〕
‘제길. 놀라운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그렇게 얻어맞고도 벌써 회복을 하다니.’
마른 비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에 죽였던 곰보다도 강하구나. 아니, 산의 주인이었던 파란 눈의 대호를 능가하는 힘이야. 인간이 이런 힘을 축적하다니······.〕
칭찬?
마른 비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섬뜩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와 침착하게 전달되는 의지.
예상을 뛰어넘는 마른 비의 힘을 겪자, 질투와 분노에 잠식됐던 검치호가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은빛여우가 마른 비를 위해 안배한 덫이 효력을 다하는 순간이었다.
〔쓰레기라는 말은 취소하겠다. 그가 기대를 걸 만해.〕
검치호가 뭐라고 떠들건 마른 비는 싸움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 사냥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준비한 덫은 아직 발동되지 않았다.
‘······아직도! 인간이라면 벌써 쓰러지고도 남을 시간인데. 역시 엄청나구나. 이 괴물.’
지껄여라.
최대한 길게.
‘놈들’이 달라붙은 이상, 언젠가는 반드시 그 결과가 나타나리라.
마른 비는 검치호의 털끝 하나까지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이제 전력을 다해 너를 죽이겠다.〕
그러든지 말든지.
근데, 내가 그걸 두고 볼 것 같으냐?
아직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들이쳐야 할 때니까.
검치호가 움직이기 직전, 마른 비가 선수를 쳤다.
『모두 나와! 한데 뭉쳐서 침입자를 공격해!』
와족 비전, 야수 제어.
한층 강렬해진 언령이 마른 비의 입에서 터져 나오자, 독림이 들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