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우르르르―
수백 마리의 독물이 한데 뭉친 그것은 검은 늪에 뜬 시커먼 태양과 같았다.
늪에 서식하는 독물의 사분지 일을 끌어모은 응집체가 검치호를 향해 치달았다.
놈의 앞에서 야수 제어를 풀어버리면.
2년 전과 같은 절독의 구름이 생성되리라.
마른 비가 준비한 회심의 덫이자, 검치호를 어렵게, 어렵게 독림까지 유인한 이유였다.
“크허허허허헝!”
독물들의 돌진을 가만히 지켜보던 검치호가 포효를 터뜨렸다.
거기에는 마른 비의 야수 제어를 날려버릴 만큼 막강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스아아악―
검치호의 포효에 독물들을 지배하던 언령이 풀렸다.
잠시 멀뚱히 있던 독물들은 사방에 가득 찬 적들을 인식했고, 발작적으로 독을 터뜨렸다.
푸화하학!
마른 비와 검치호의 중간에서 터져버린 독무.
서서히 흩어지는 연기 너머로 경악에 찬 마른 비의 얼굴이 보였다.
〔이 지독한 독기라니! 무방비로 노출됐으면 위험했겠어. 이런 기분 나쁜 곳까지 기어 들어온 이유가 이거였나.〕
검치호는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예상을 뛰어넘은 마른 비의 선전이 은빛여우를 향한 비정상적인 집착을 걷어낸 모양이었다.
여유롭게 걸어오는 포식자 앞에서, 마른 비의 어깨가 긴장을 머금었다.
〔인간이란 생물은 참으로 흥미롭구나. 그리고 위험해. ‘그’나 너와 같은 개체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싹을 잘라둘 필요가 있겠어.〕
검치호가 인간에 대해 경계심을 품게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건 생존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야수의 본능이었다.
〔너를 죽이고, 나는 산을 나갈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불길한 예감에 마른 비의 얼굴이 굳었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오랫동안 불안정한 상태였다. 정······. 그는 내게 정을 느낀 거냐고 물었지. 아직도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깨달았다. 그건 대단히 위험한 감정이야. 다시는 나 아닌 존재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은빛여우가 녀석의 마음을 받아주었다면.
그랬다면, 검치호는 다른 결론을 내렸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찌 됐든 검치호는 처음으로 정을 품게 된 존재에게 거절당했고, 최악의 결론을 내렸다.
〔나는 산을 나가서, 눈에 띄는 모든 인간을 죽일 것이다.〕
‘그게 왜 그런 결론으로 이어지는 건데?’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
누구와도 소통해본 적 없는 괴물은 혼자서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리고 만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일지도.
검치호의 정신을 뒤흔든 은빛여우와, 육체적인 위협을 느끼게 한 마른 비.
무적이라 자부했던 자신에게 위협을 준 존재들이 모두 인간이라는 점에서, 녀석의 판단은 합리적일지도 몰랐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 그런 짓을 했다가는 너, 순식간에 죽어.”
아버지를 비롯한 와족의 어른들이 전부 몰려와서 척살하겠지.
하지만 그 전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검치호를 여기서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더해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전부 쏟아붓는다.’
자연기를 끌어올리는 마른 비에게 검치호가 물었다.
〔죽는다? 저 바깥에는 나를 죽일 존재가 있단 말이냐?〕
일일이 설명해 줄 이유가 없다.
번갯불을 튕기며, 마른 비가 말했다.
“몰라도 돼. 넌 여기서 죽을 테니까.”
콰아앙―!
〔어리석군. 그건 이미 보았다.〕
달려드는 마른 비를 그대로 물려는 듯 검치호가 아가리를 쩍 벌렸다.
‘순간 가속.’
번갯불의 원리와 흡사한 광서우의 순간 가속.
하지만 제자리에서 발동하는 번갯불과 달리 광서우의 그것은 기동 중에 한 번 더 속도를 끌어올린다.
마른 비는 수식어가 붙은 녀석들의 기술을 흡수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스파팟―
검치호의 동체시력을 벗어난 눈부신 기동.
괴수는 순간적으로 마른 비의 위치를 놓쳤다.
‘무소의 뿔.’
인간의 신체에서 가장 날카롭고 단단한 부위.
광서우가 자랑하는 뿔을 모방한 팔꿈치가 검치호의 턱을 올려쳤다.
‘악어 이빨.’
거악의 엄청난 치악력에서 착안한 공격이다.
상하에서 동시에 휘둘러진 주먹이 검치호의 대가리를 물었다.
‘뼈창.’
전상의 상아는 가로막는 모든 걸 꿰뚫는다.
날카롭게 세운 손끝이 검치호의 목젖을 찔렀다.
‘이 정도로 쓰러질 리가······.’
없다.
새롭게 터득한 기술들이지만, 검치호를 눕히기엔 모자라다.
역시나 급습을 버텨낸 괴수는 입을 쩍 벌린 채 쇄도하고 있었다.
‘여기서 승부를 건다!’
전투화장을 통해 폭발시킨 자연기가 육체에 깃든다.
검치호를 향한 분노와 필살의 의지가 범의 앙심의 효과를 극한까지 끌어 올렸다.
‘교룡갑(蛟龍甲).’
상상속의 동물, 교룡.
뿔이 없는 용은 어떤 것도 뚫지 못하는 외피를 지녔다고 했다.
중원에선 상어를 두고 교룡이라고도 칭하지만, 마른 비는 그런 건 알지 못했다.
이무기라고 해도 믿을 대망을 보며, 그믐에게 들은 교룡을 떠올렸을 뿐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교룡이 네 발을 지녔다는 건 까맣게 잊었지만.
어쨌거나 마른 비에게 중요한 건 ‘어떤 것도 뚫지 못하는’이라는 대목이었다.
피부에 흘려 넣은 자연기가 와족의 강피를 철갑처럼 무장시켰다.
콰콰콱!
마른 비는 정면에서 검치호의 공격을 받아냈다.
흉악한 이빨을 위아래로 붙잡고, 전력을 다해 버틴다.
팔뚝에 솟아오른 힘줄이 터질 듯이 꿈틀대고 있었다.
“으, 으윽··· 으아아아아!”
역시 거악처럼은 되지 않는가.
죽을힘을 다했지만 검치호의 아가리를 강제로 여는 건 불가능했다.
오히려 녀석의 입은 점점 닫히고 있었다.
그그그극- 그극.
비정상적으로 긴 두 개의 송곳니.
그중 하나가 마른 비의 어깨를 파고들기 직전이었다.
교룡갑을 펼치지 않았다면 벌써 어깨가 뚫렸을 거다.
괴수의 이빨과 인간의 피부가 마찰하며 쇠붙이가 갈리는 소음을 울렸다.
‘됐어! 붙잡았어!’
절체절명의 상황.
하지만 마른 비는 노렸던 바를 달성한 사람처럼 눈을 번쩍였다.
지금이다.
아껴두고 아껴둔 비장의 덫을 발동할 때가!
마른 비의 입술이 열리고, 언령이 터져 나갔다.
『지금이야! 별비야!』
“크아아아아앙!”
늪을 갈아엎을 포효가 터지고, 한 줄기 백색 섬광이 어둠을 갈랐다.
몇 번이나 뛰쳐나가려는 몸을 억누르며 마른 비의 지시를 기다렸던 맹수.
나무 위에 은신해 있던 별비가 오랜 기다림을 깨고 검치호를 덮쳤다.
“커허허헝!”
콰아악!
별비는 마른 비가 붙잡고 있는 검치호의 목을 정확히 물었다.
그 얼마나 고통스런 인내의 시간이었나.
살아남기 위해 독림에 숨어든 날부터, 부모형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힘을 키운 나날들.
억누르고 억눌러서 곪아가던 원한이 짜낸 고름처럼 터져 나갔다.
으드득!
“카하앙!”
별비에게 목을 물린 검치호가 고통에 찬 신음을 토했다.
앞발까지 이용해 검치호를 내리누른 별비가 푸른 눈동자로 말했다.
바로 지금이라고!
“타아앗!”
수직으로 솟구치는 육체.
두 다리에 자연기를 때려부은 마른 비가 우렁차게 외쳤다.
“죽어! 이 괴물아!”
그믐에게 전수받은 비기.
어둠을 가르는 다섯 줄기 섬광은 패배를 모르는 섬격이라.
인간의 몸 정중앙을 노리는 중선오격이 검치호의 턱, 그 한 점에 집중됐다.
빠가각!
별비가 내리누르는 힘을 능가하는 충격이다.
일순간 검치호와 별비가 통째로 허공에 붕 떠올랐다.
‘끝낸다!’
휘리릭―
이제는 숙련의 경지에 이른 기술이다.
그래서 이런 응용이 가능하다.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징벌이 땅에서부터 솟아오를지니.
‘역(逆), 불벼락!’
회전하며 거꾸로 차올린 뒤꿈치가 또다시 검치호의 턱에 명중했다.
우드드득!
‘끝났어!’
뼈가 부서지는 이 느낌.
정말 부서졌는지는 모르지만, 제대로 들어간 건 확실하다.
금성철벽 같던 검치호의 육체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커··· 어어어······.”
괴수는 마치 인간처럼 신음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들 사이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활활 타오르던 눈동자가 빛을 잃고 꺼져 있었다.
“해, 해냈어! 우리가 이겼어, 별비야!”
마른 비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별비도 승리를 확신했는지 눈으로 웃고 있었다.
이제 정신을 잃은 놈의 숨통을 끊고 은빛여우 형에게······.
“자, 잠깐.”
무언가······ 이상하다.
설명하기 힘든 위화감.
뭐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이, 이놈!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치명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쓰러지지 않은 채 버티고 있다.
목덜미를 문 별비를 매단 채로.
그 순간, 놈의 오른쪽 앞발이 위로 올라갔다.
터턱.
“크항?!”
목을 문 별비의 얼굴을 앞발로 밀어낸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 놈은 온몸으로 버티는 별비를 한쪽 발만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크, 카항···!”
별비가 버티지 못하고 이빨을 뽑았을 때.
새카맣게 죽었던 검치호의 눈이 번쩍였다.
핏빛으로 타오르는 눈이 적들을 포착한다.
목덜미를 놓은 별비가 땅을 딛기도 전에.
검치호의 앞발이 휘둘러졌다.
퍼어어억!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별비가 저 멀리 날아가 풀썩 쓰러졌다.
“벼, 별비야!”
마른 비가 날카롭게 외친 순간, 어둠 속에 또 하나의 그늘이 드리웠다.
“크르르르······.”
머리 위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은 녀석의 피가 분명하다.
마른 비가 고개를 들자 시커먼 그림자 위에서 붉은빛 두 개가 번쩍였다.
〔저 호랑이······. 전 산군의 핏줄이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더니, 너와 함께 있었나.〕
퍼어억!
철퇴 같은 앞발이 마른 비를 후려쳤다.
붕 떠오른 청년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역시 인간은 위험한 존재다. 다 죽여 버려야 해. 너희가 더 성장하기 전에 만나서 다행이군.〕
‘이, 이럴 수가. 어떻게 그걸 맞고도······.’
마른 비는 엎어진 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건 이길 수 없다.
이런 괴물을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현세에 재림한 고대의 괴수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아냐. 포기하지 마. 포기하면 모든 게 끝이야.’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은빛여우 형이 자신을 위해 감내한 순간들.
그가 겪었을 아픔을 생각하면 이런 건 고통 축에도 끼지 못한다.
고작 이 정도에 주저앉으면 무슨 낯으로 그를 볼 수 있을까.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하리라.
떨리는 팔로 땅을 짚으며, 마른 비는 일어섰다.
〔그 눈. 포기를 모르던 그의 눈빛과 같군. 불쾌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최대한 괴롭히다가 천천히 죽여주마. 네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걸 보고 말 것이다.〕
어둠을 가르며, 괴수가 다가온다.
마른 비는 새카만 절망을 느꼈지만, 굴하지 않고 어떻게든 활로를 찾으려 집중했다.
하지만 활로는 보이지 않았고, 괴수는 서너 번 발을 내디디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끝······ 인가.’
덮쳐오는 재앙 앞에서, 마른 비는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부릅뜨고 죽으려 했다.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